일하다 골병들어도 산재 승인은 요원
일하다 골병들어도 산재 승인은 요원
  • 박석모 기자
  • 승인 2013.12.09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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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기준 만들자” vs “계량 불가능”
산재심사 각 단계마다 허점 노출
[특집] 노동자 건강권 2013 ② 객관적으로 조사하자는데

지난 11월 5일,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는 민주노총 금속노조와 건설산업연맹, 화학섬유연맹 조합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근골격계 재해조사 시트 개정 투쟁 결의대회’가 열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산재사고가 일어나고,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노동계의 요구도 줄곧 이어져 왔다. 이날 결의대회의 핵심 요구는 ‘근골격계 재해조사 시트’를 약속대로 개정하라는 것이었다. 민주노총이 개정을 요구하는 재해조사 시트는 무엇일까?

ⓒ 참여와혁신 포토DB
“업무관련성 없다” 불승인 남발

앞에서 보았듯이 화학약품을 사용하는 작업을 하다가 희귀질환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건수를 기준으로 할 때 산재를 신청하는 질환의 65% 이상이 근골격계 질환이다. 일하다 골병들어 산재를 신청하는 경우가 그만큼 많다. 하지만 산재를 신청한다고 모두 인정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두 가지 사례를 통해 현재 산재심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자.

#1. 자동차 부품업체 노동자

A씨는 자동차 부품업체에서 25년째 일하고 있는 고참 노동자다. A씨는 25년 동안 2㎏의 힘으로 스프링을 당겨 체결하는 일을 반복해 왔다. 결국 A씨는 회전근이 파열되는 재해를 당했고, 수술을 통해 복원해야만 했다. 명백한 업무상 재해여서 A씨는 수술 후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다.

하지만 A씨는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 불승인 처분을 받아야 했다. 근로복지공단 자문의가 A씨의 회전근 파열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로복지공단 자문의는 A씨의 X-레이 사진만 보고 회전근 파열이 관찰되지 않는다는 소견을 제출했던 것이다.

이에 A씨는 MRI(자기공명영상)를 촬영한 결과를 6개 민간병원에 보내, 모두 파열된 회전근이 복원됐다는 진단서를 받았다. 이를 다시 근로복지공단에 보낸 후에야 A씨는 산재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A씨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노조에서 노동안전부장으로 일했던 경험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만약 A씨에게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MRI를 촬영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2. 전자회사 노동자

B씨는 전자회사에서 올해로 22년 6개월째 일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다. B씨는 이 회사에서 손목을 구부려 나사를 조이는 일을 하고 있다. 손목이 아파 병원을 찾은 B씨는 윤활막염(외상이나 염증 등으로 인해 뼈와 뼈 사이의 윤활막에 점액이 생성돼 굽히고 펴는 동작이 제한되는 관절 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손목을 구부린 자세에서 나사를 조이는 작업을 계속한 것이 원인이었다.

근로복지공단 자문의도 B씨가 제출한 진단서를 인정했지만, B씨는 산재 승인을 받지 못했다. 산재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질병판정위원회에서 B씨의 질환은 업무와의 연관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질병판정위원회는 B씨의 윤활막염을 퇴행성 질환(나이가 듦에 따라 관절, 근육 등이 퇴화돼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질환)으로 판정했던 것이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현장 모르니 불승인이 대세

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하면 일단 근로복지공단은 재해조사를 하게 돼 있다. 이때 근로복지공단은 작업이 얼마나 신체에 부담을 주는지 신체부담 정도를 조사하는데, 그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근골격계 재해조사 시트’다. 재해조사 시트는 어깨, 허리, 목 등 신체부위별로 작업의 위험요인과 노출시간을 조사하게 돼 있다.

이렇게 현장에서 재해조사를 하면 근로복지공단 자문의가 업무관련성 평가를 해 5단계로 구분된 업무부담 정도를 표시하게 된다. 이 같은 자문의의 업무부담 정도에 대한 소견을 바탕으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산재 승인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산재심사 절차에서는 각 단계마다 개선해야 할 부분이 드러난다. 우선 재해조사에서부터 문제점이 나타난다. 원칙적으로 재해노동자가 산재를 신청하면 그 노동자가 근무했던 현장에 재해조사를 나가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재해조사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2010년을 기준으로 현장 재해조사 실시율은 18%에 머무르고 있다. 그나마 현장 재해조사를 실시하는 것도 대부분 대공장에 집중돼, 정작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중소영세공장 노동자들의 경우 대부분 근로복지공단 직원이 책상에 앉아 작성한 서류가 산재 판정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 같은 부분에 대해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원칙적으로 현장 재해조사를 실시하도록 근로복지공단의 지침을 개정했으나, 민주노총에 따르면 2013년에도 현장 재해조사 실시율은 30%대에 그치고 있다. 재해조사를 나갈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재해조사가 실시된다 하더라도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행 재해조사 시트로는 작업의 신체부담이 어느 정도인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행 재해조사 시트는 작업이 어떤 상태에서 이루어지는지를 기록하게 돼 있다. 예컨대 올려다보고 나사를 조여야 하는 작업이라면 고개를 뒤로 젖히는 각도는 어느 정도이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기록하게 돼 있다.

문제는 그렇게 작업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기록하더라도, 그러한 작업 자세가 신체에 얼마나 부담을 주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현장에서 재해조사를 실시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근로복지공단 자문의가 업무관련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업무관련성 여부는 5단계로 평가되는데, 전체의 50% 가까이가 ‘업무 부담 1/2’에 편중된다. 근로복지공단 자문의는 재해조사 결과만 가지고는 업무관련성을 판단할 수 없기에 업무관련성이 있다고 해석될 수도 있고 없다고 해석될 수도 있는 ‘업무 부담 1/2’에 표시하는 것이다. 결국 애써 현장 재해조사를 해도 객관적 기준이 없어 무용지물이 되는 셈이다.

더구나 1,700여 명에 이르는 근로복지공단 자문의 중 대부분은 작업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모르는 임상의들이다. 작업 현장에 대한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직업환경의학 전공 의사는 전체 자문의 중 60~70명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적인 기준도 없고 자문의의 전문성도 떨어져 근로복지공단 자문의에 의한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질병판정위원회에서 산재 승인 여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질병판정위원회는 2명의 의사를 포함해 모두 7명으로 구성되는데, 대부분은 작업 현장을 잘 모르는 인물들로 구성된다. 더구나 질병판정위원회에서 산재 신청 노동자 1명에 대한 서류를 검토하는 시간은 평균 10분 남짓이다. 결정적인 것은 재해조사 결과나 산재 신청 노동자가 준비한 자료가 질병판정위원회에 제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질병판정위원회는 근로복지공단이 심의안으로 작성한 3~4장짜리 요약본만을 보고 판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점들이 어우러져 2006년에는 65%에 이르던 근골격계 질환 산재승인률이 2010년 11월에는 46%대로 급감했다. 불승인 사유의 50% 이상은 퇴행성 질환이라는 이유였다. 다시 말해 일하다 골병들어도 근로복지공단은 나이 먹어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질환이라고 판정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3년 논의한 제도 개선안, 유명무실해질 판

이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노사정 3자는 지난 2010년 산재보험제도개선 태스크 포스(TF)를 구성하고 3년여에 걸쳐 논의를 해왔다. TF에는 양대 노총과 경총, 중소기업중앙회, 고용노동부, 근로복지공단이 참여했다. TF에서 노사정은 직업병 인정기준을 포함한 전반적인 산재보험제도 개선에 관한 논의를 진행했다.

TF에서는 노사정이 추천한 전문가들로 각 부문별 소위원회를 구성해 논의를 진행했다. TF에서 가장 쟁점이 됐던 부분은 근골격계 재해조사 시트 개정과 관련한 부분이었다. TF에서는 이와 관련해 두 차례에 걸쳐 연구용역을 진행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노사의 의견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TF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것은 아니다. TF 논의 결과, 퇴행성 근골격계 질환도 직업병 목록에 포함하는 것으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을 개정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개정된 시행령은 올해 7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시행령에는 이 밖에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현장 재해조사를 원칙으로 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현장 재해조사를 원칙으로 하도록 한 만큼, 현장 재해조사의 도구로 사용하는 재해조사 시트의 개정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TF에서는 이와 관련해 재해조사 시트 개선안을 마련해 올해 7월에 시행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개정 내용에 대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현재 TF논의는 파행을 겪고 있는 상태다.

노동계는 TF에서 재해조사 시트에 작업의 신체부담 정도가 객관적으로 표시될 수 있도록 점수화 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계는 그와 같은 신체부담 정도를 객관적으로 계량할 기준으로 국제적인 직업병 예방 도구인 룰라와 레바를 원용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경총은 이 같은 노동계의 주장에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역시 경총의 반대를 이유로 재해조사 시트 개선안 마련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상태다.

재해조사 시트 개정과 관련한 TF에서의 논의가 파행을 겪고 있어, 그동안의 논의를 통해 마련한 일부 산재보험제도개선안도 유명무실한 실정이다. 노사정은 TF에서의 논의를 통해 근골격계 현장 재해조사를 원칙적으로 실시키로 하고 산재보험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이를 명문화했지만, 현장 재해조사를 실시할 인력이 부족하다는 사정 외에도 여전히 과거의 재해조사 시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외국 사례 없다 vs 질판위가 특이한 제도

재해조사 시트 개정과 관련해 박세민 금속노조 노동안전실장은 “현장 재해조사와 업무관련성 평가를 객관적으로 하자는데, 경총은 파장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있다”며 “민주노총이 질병판정위원회에 위원으로 들어간 것만으로도 산재 승인을 받는 노동자가 한 해 200~300명 늘었는데, 만약 재해조사 시트를 객관적으로 개정해 현장 재해조사에 활용한다면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산재승인률이 현재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세민 실장은 이어 “고용노동부는 정책을 잘 시행해 산재발생률이 낮아졌다고 생색을 내야 하는데, 재해조사 시트 개정으로 산재승인률이 높아지면 정책에 발생률 관리에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게 될까봐 우려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했다.

반면 임우택 경총 안전보건팀장은 “근골격계 소위원회에서도 직업병 인정기준을 정량화할 수도 없고 한다 하더라도 부정확하다고 이야기되고 있는 부분”이라며 “신체부담 작업에 대해 점수화한 사례가 외국에는 없다”고 밝혔다.

임우택 팀장은 이어 “노동계에서 주장하는 소위 룰라와 레바는 직업병 예방도구이지 보상기준은 아니다”며 “평가 대상에서 누락되거나 재해조사가 미비한 점을 보완하고 인력을 보강해 현장 재해조사를 충실히 함으로써 그 자료를 가지고 최종적인 판단을 하자는 게 경총의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임우택 팀장은 또 “노동계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룰라와 레바를 활용해 재해조사 시트를 개정한다면 실제 업무상 질병과 무관하게 산재승인률이 높아질 수 있다”면서 “노동계의 주장대로라면 전체 제조업이 근골격계 신체부담 작업으로 인정될 소지도 있어 산재 신청이 남발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하지만 이 같은 경총의 주장에 대해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국장은 “다른 나라에 사례가 없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질병판정위원회 제도가 오히려 다른 나라에 없는 제도”라며 “독일에서는 산재 전문의가 판정을 하고 있고, 일본의 경우에도 숙련도가 높은 노동담당부처 직원이 판단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최명선 국장은 이어 “룰라와 레바에 대해서도 경총은 보상기준이 아닌 예방도구라고 주장하지만, 룰라와 레바를 그대로 쓰자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재해조사 시트를 새로 설계하자는 것”이라며 “그렇게 작성된 재해조사 시트에 따라 현장 재해조사가 이뤄진다고 해서 그대로 산재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 질병판정위원회에서 최종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는 점을 들어 우려를 일축했다.

한편,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이 문제와 관련 “노사간의 입장차가 있고 협의가 진행되고 있는 사안이어서 입장을 따로 정리하지는 않고 있다”며 “산재보험제도와 관련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는 만큼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사의 합의가 우선”이라며 한 발 물러서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노사정이 이처럼 제도 개선에 대한 이견을 보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산재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재해노동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OECD 국가들 중에서 산재발생률 1위를 다투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의견 대립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국가적인 손실을 키우는 일이 될 수밖에 없음을 먼저 생각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