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더 잘 살고픈 것은 노사 모두 매한가지
좀더 잘 살고픈 것은 노사 모두 매한가지
  • 함지윤 기자
  • 승인 2007.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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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일터를 위한 바스프 여수공장의 선택
② 바스프 노사의 고민

마주 보고 고민해야 해답이 보이더라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노사관계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보겠다고 나선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의 노사 또한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내부보다 외부의 시선들이 더 힘들게 하기도 했다”고 노사는 전한다.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지 노사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한 발 내딛었음에도 노사는 지금도 말 한마디를 조심스러워한다.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 노사가 고민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 속내를 들여다봤다.

 


● 노동조합의 고민

성과중심 경쟁 속에서 정체는 곧 도태
현재에 안주했다면 공장이 사라졌을지도

 

1992년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이 준공됐을 때 생산량은 4만톤이었다. 그 뒤 꾸준히 공장 신·증설 투자가 이뤄져 지금 현재는 총 19만톤을 생산하고 있다. 그리고 생산량의 70% 정도가 해외로 수출되고 있다.


국내 바스프의 다른 공장과 달리 여수공장은 특수기술을 필요로 하는 우레탄을 생산하고 있어 정리해고 등으로부터 안전지대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독일 바스프 본사가 여수공장과 똑같은 제품을 생산하지만 규모는 더 큰 공장을 중국에 짓고 2006년 8월부터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했다. 한국시장은 안 커지는데 중국시장은 자꾸 커지는 상황에서 중국공장의 건설은 여수공장에게는 현실적인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노동조합 김현열 위원장은 “만약 여수공장이 4만톤에 안주했으면 이미 공장이 없어졌을 것”이라며 “지금은 정체되면 제자리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세계 경제가 규모의 경제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현실에서 노조 또한 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본사 의중 파악해 대책마련 하는 것도 노조 역할

노동조합은 변화하는 세계 경제 속에서 노조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됐다. 특히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은 외투기업이기 때문에 한국바스프 회사측이나 노조 모두 독일 바스프 본사의 고용인일 뿐이고, 어느 한 쪽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 위원장은 오랜 고민 끝에 “나 혼자 싸움의 문제가 아니다”며 조합원들이 진정 바라는 것이 ‘고용안정’임을 감안할 때 “평생직장을 만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노조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한다. 지속적인 외자유치를 통해 생산시설을 증대시키고 고부가가치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은 물론 여수산단 지역 주민들에게 기여하는 바가 더 클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또 노조 간부들도 보다 장기적인 비전을 세워 노조의 방향성을 설정하게 됐다. 외투기업의 속성상 독일 본사의 의중을 미리 파악해 대응책을 세우는 것이 경영진만의 몫이 아니라 노조간부의 역할 중의 하나라 생각하게 됐다. 외투기업의 특성에 고려해 노조의 역할이 변화한 것이다.


공장의 존속근거 마련 위해 선택한 임금동결

독일 바스프 본사는 높은 인건비와 불안한 노사관계, 제한된 시장상황 등이 한국시장의 문제점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상대적으로 중국은 안정된 노사관계와 저렴한 인건비, 무한한 성장 잠재력, 풍부한 시장상황 등으로 한국보다 투자매력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신규투자유치를 위해선 “또다른 투자유인책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김 위원장의 생각이다. 이를 통해 “공장의 존속근거를 마련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김 위원장의 고민지점이다.


지난 2005년 8월에 발표한 ‘BASF 2015 실현을 위한 우리의 결의’는 이런 고민 속에서 나온 것이고,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이 계속 흑자임에도 불구하고 임금동결을 선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위원장과 노조 간부들은 임금동결로 인한 당장의 손해보다 투자유치를 통한 장기적인 고용안정과 신규고용창출로 조합원들이 얻게 될 이득이 더 클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양보한 것이다.


미래 읽고 추진하는 자신감의 원천은 ‘조합원’

물론 이에 대한 내부의 불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외투기업의 특성상 고용불안이 언제 현실화될 지 모르니 “회사가 잘 나갈 때 많이 따내야 되지 않겠느냐”는 조합원들의 목소리도 많다. 몇몇 조합원들의 우려대로 투자유치도 이뤄지지 않고 외투기업이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지금 제조업이 내리막길을 가고 있다”며 “향후 10년 안에 판도가 바뀔 것”이라고 전망한다. 외부와 내부의 우려와 비난 속에서 자신의 소신을 펼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자신 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노조가 자기 것을 챙기려 하면 주위에 사람이 없지만 음성적인 기득권을 포기하면 조합원들도 믿고 따라준다”고 믿는다.


이런 조합원에 대한 믿음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읽고 일을 추진할 수 있는 김 위원장의 자신감의 원천이다.

 

ⓒ 한국바스프(주)


● 회사의 고민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서 시작되는 변화
최고경영자의 진정성이 노사관계를 바꾼다

설립 이래로 성장에만 집중해 있던 회사는 소프트웨어 측면에 대한 관심은 다소 부족했다. 따라서 파업은 예견된 것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한 회사 관계자는 2004년 파업 이전의 노사관계 상황을 ‘불모지’라고 표현한다. 노사관계에 대한 의식과 시스템, 전략이 전무한 상태로 “허약한 노사관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는 것. 회사는 노조를 상대함에 있어서 노조가 어떤 요구를 하면 그때그때 대응하는 수준이었고, 환경·안전은 매우 중요시하는 반면 노무에 대해서는 평가절하 되고 있었다.


2004년 9일간의 파업은 이런 기존의 노사관계에 대해 경각심을 울리고 변화에 대해 인지하는 계기가 됐다. 노사관계에 대한 경영진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먼저 새로 부임한 최고경영자가 보여준 노조간부에 대한 인격적 대우는 경영진이라면 경계부터 했던 노조간부들의 닫힌 마음을 열게 했다. 안청신 당시 사장은 9일간의 파업기간에 여수공장에 상주하면서 노동조합과 직접 대화를 나눴다.


회사와 직원을 생각하는 안 사장의 진솔함과 열정은 노조간부들까지도 감동시켰다. 안 사장은 노조를 진정한 경영파트너로 인정하고 직접 경영상황을 설명했고, 파업 이후 그 어느 누구에게도 파업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남 탓하지 말고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부터 성찰해 보자”며 상대에 대한 배려를 바탕으로 새로운 노사관계의 길을 열었다.


과거는 참고사항일 뿐… 미래지향적인 노무해야

파업 이후 2004년 11월에 열린 ‘전사원 노사 한마음 연수’는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이 새로운 노사관계를 쓰는 시작점이 됐다. 이 자리는 성장가도를 달리던 회사가 전 사원과 함께 하기 위해 처음으로 만든 ‘판’이었다. 처음 열린 이 행사에 대해 90%가 넘는 만족도가 나왔고, 이는 새로운 노사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2004년 파업이후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 노사는 회사측의 제안으로 ‘외투기업 신 노사문화 마스터플랜’ 사업을 3년에 걸쳐 추진하기로 합의한다. 이는 노사가 미래지향적 사고에 입각해 ‘협력적 노사문화, 공동체적 노사문화, 비전적 노사문화’ 구축을 목표로 중·장기 노사비전 마스터플랜을 운용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 또한 노사합의는 물론 회사 내부 임원진들을 설득하는 것부터도 쉽지 않았다. 3년에 걸쳐 상당한 비용이 투입돼야 하지만 사업의 성격상 그 성과가 즉각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서 일부 임원들은 효과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경영진 입장에서는 비용의 문제가 우선적으로 걸렸던 것이다. 회사는 한국노동교육원의 재정지원사업을 통해서 비용문제를 다소나마 해결할 수 있었다.


설득하려고 하면 더 설득 안 된다

이 사업은 노사공동으로 추진해야 그 진정한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회사협력을 어용노조로 보는 등의 시각이 조합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노조 입장에선 조합원뿐만 아니라 여수산단 내 다른 사업장의 노조들과의 관계까지도 고려해야만 했기에 더욱 쉽지 않았다.


더구나 노조간부들도 처음엔 “노동조합 길들이기를 하려는 게 아니냐?” “다른 의도가 숨겨진 것이 아니냐?”는 등 새로운 노사문화를 만들자는 회사의 제안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오래된 불신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노조의 불신에 대해 회사는 ‘그게 아니다. 이렇게 해야 되지 않냐’고 노조를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 임원은 “설득하려고 하면 더 설득이 안 되더라”며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공유”하면 자연스레 설득 아닌 설득이 된다고 말한다.


말이 아닌 실천으로 신뢰를 쌓아가고자 노력한 것이다. 또 회사는 ‘거래’를 하려고 하는 것도 노사관계의 해법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판은 만들고 아무것도 강제 말라

회사가 노조와 함께 새로운 노사문화를 만들어나가는 데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회사가 ‘판’을 만들기는 하지만 어떤 프로그램도 강제하지 않고 자율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또 행사를 위한 형식적인 행사, 일회적인 행사는 하지 않고 사전에 철저히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원칙이 있지만 이 원칙들의 바탕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담겨있다.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 업무지원팀 김창선 부장은 “행사를 한다고 노사관계가 잘 되지는 않는다”며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을 때 고민도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