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은 쉬우나 비전 제시는 어렵다
투쟁은 쉬우나 비전 제시는 어렵다
  • 함지윤 기자
  • 승인 2007.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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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일터를 위한 바스프 여수공장의 선택
③ 이들이 꿈꾸는 내일

목소리 큰 사람 달래는 노무리더십 버려야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 노사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에 걸쳐 기업문화 혁신을 위한 신노사문화 마스터플랜을 수립해 추진해오고 있다. 마스터플랜의 단계별 목적 달성 및 효과 창출을 위해 노사 양측의 협의 하에 전략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올해 6월 6300만 달러(640억원) 규모의 신규투자를 유치함으로써 이번 마스터플랜은 소기의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줬다.


지난 3년간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이 추진한 신노사문화 마스터플랜은 우리나라 노사관계에 하나의 해법을 제시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 한국바스프(주)

 

새로운 노사문화 만들기 3개년 계획

2004년 파업이 끝난 후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은 새로운 노사문화를 만들기 위한 3년에 걸친 마스터플랜을 계획한다. 첫해에는 조직문화 진단 등을 통해 협력적 노사문화로 신노사문화를 구축하고, 두 번째 해에는 구성원의 가족까지 생각하는 공동체적 노사문화, 마지막 해에는 투자유치 등을 통해 미래를 생각하는 비전적 노사문화를 구축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진행했다. <표 참조>

 


먼저 협력적 노사문화를 만들기 위해선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그래서 노사는 ‘노사간부 워크숍’이나 ‘노사 파트너십 교육’을 통해 이런 기회를 만들고 있다.


노사간부워크숍은 이전의 ‘노조 간부 교육’이 변형된 것으로 이전에는 노조와 회사가 따로따로 교육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제 노사간부가 함께 교육을 받는다. 그래서 때론 부담스러운 내용도 있지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또 한국노동교육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노사 파트너십 향상교육’은 각 차수마다 노사가 각각 2명씩 참석해 함께 교육을 받음으로써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노사문화, 이젠 가족까지 고려할 때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이 새로운 노사문화의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은 바로 ‘공동체적 노사문화’다. 공동체적 노사문화는 기존의 노사관계가 노사 양 당사자만을 고려했던 것과 달리 나를 중심으로 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공동체로 묶고 이들 모두를 고려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공동체적 노사문화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가족’이다.


노동현장 일각에선 조합원들 사이에 가족이기주의가 심화되고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집안의 가장인 조합원들이 가정생활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앞으로의 노사관계는 조합원들 가족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수공장은 ‘직원부부 행복연수’ ‘사원자녀 Camp’ ‘부모님 초청행사’ 등을 진행하고 있는데, 구성원들의 반응이 가장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가족들은 남편과 아빠를 이해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고, 회사에 대한 인식도 좋아지더라”고 전한다.


단 이런 가족들과 함께 하는 행사는 “행사를 위한 행사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김창선 부장은 충고한다. “단발성으로 끝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생길 수 있으며, 행사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김 부장은 한 발 더 나아가 “개인적으로, 감동으로는 부족하고 조합원들을 졸도시키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꿈과 희망을 주는 노무가 진정한 노무

신노사문화 마스터플랜의 세 번째 단계는 ‘비전적 노사문화’의 구축이다. 이 마스터플랜을 계획한 김창선 부장은 “노무는 구성원들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며 “프로그램 하나를 할 때도 정말 정성을 쏟고 배려를 하면 사람들이 신뢰를 하더라”고 그간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내 눈높이가 아닌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배려를 할 때 비전 또한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신규투자유치를 통한 미래의 비전을 만드는 것이 ‘비전적 노사문화’의 내용이었다. 올해가 몇 달 남은 상황이지만 이미 그 목표는 달성했다. 김현열 위원장의 “정체는 도태”라는 말처럼 오늘날 세계경제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기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노사가 함께 기업의 비전과 구성원의 비전을 고민해야 한다.


노무는 잘해야 본전? 노무는 기획이다!

김창선 부장은 “마스터플랜을 세우는 것은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간 우리나라는 노사관계 뿐만 아니라 정부정책이 자주 바뀌었다. 무슨 일이 하나 생기면 ‘언 발에 오줌 누기’식으로 정책이 뒤바뀌어 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노사관계도 마찬가지다. 일부 기업에선 임단협의 결과 등에 따라 인사노무담당 임원이 바뀌는 경우가 잦다. 그리고 담당임원이 바뀜에 따라 노무정책방향 또한 달라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김 부장은 이런 문제는 “노무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과 논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어떻게 할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가 분명하게 잡혀 있다면 사람이 바뀌는 것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한다. 실제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은 2006년에 사장이 바뀌었지만 마스터플랜은 기조 자체가 바뀌지 않고 더 강화되고 업그레이드 됐다. 계획을 잡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실행’이라고 김 부장은 말한다.

 
여수공장은 마스터플랜이나 로드맵을 잡고, 그것을 바탕으로 실행하고, 연말에는 있는 그대로 보고하고 평가한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이 평가를 바탕으로 내년 계획을 잡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노사관계가 좋지 않은 곳을 보면 대부분 이런 체계가 없고,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곳이 많다고 한다.


김 부장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노무는 잘해야 본전이 아니냐”는 말이라고 한다. “노무도 이렇게 보고서를 만들면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얼마든지 평가 받을 수 있어요. 노무가 단순히 노조에서 나온 입장에 대응전략이나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은 9월에 진행될 임단협 정책이 이미 2월에 나왔으며, 경영진들은 각 사안들이 경영에 미칠 영향에 대해 미리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회사가 먼저 목표나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바탕이 돼 노조가 회사를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노사관계는 단순히 노사간의 갈등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어떻게 운영돼야 하는지 정책을 결정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감동 없는 교육은 죽은 교육

직원교육 또한 주목할 만하다.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은 거의 대부분의 교육을 노사가 함께 받는다. 심지어 과거 노조간부들만을 대상으로 이뤄졌던 교육까지도 지금은 함께 수료하고 있다. 교육만 함께 받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을 만드는 과정에도 노조가 참여한다.


특이한 점은 교육과정은 마련돼 있지만 아무도 교육을 받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교육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불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교육을 이수한 구성원에게는 일정한 혜택을 준다. 벌은 없고 상만 있는 것이다. 매년 우수사원 중에서 40명을 선발해 해외연수를 보내주기도 한다.


‘판은 만들지만 강요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비단 교육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행사프로그램에서도 참여를 강요하지 않는다. 프로그램은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고, 강요하지 않아도 프로그램이 재미있다면 알아서 참가한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교육을 받는 사람이 교육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회사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결국 교육은 수혜자 중심으로 진행되게 된다.


김창선 부장은 “감동이 없는 교육은 죽은 교육”일 뿐이라며, “교육은 콩나물을 키우는 이치와 같다”고 말한다. 물이 빠져나가도 어느새 콩나물이 자라있는 것처럼 교육도 당장 가시적인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구성원들이 달라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도 처음에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계획할 때마다 비용대비 산출 개념으로 접근하는 임원진들을 설득해야 했다고 토로한다.

 

ⓒ 한국바스프(주)


신뢰가 바탕됐기에 가능했던 시도

새로운 노사문화를 만들어가는 이 모든 시도들이 가능했던 것은 신뢰가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더 이상 노동조합도 회사도 서로에 대해서 조합원들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 신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요즘 여수공장은 현장관리자들이 리더십을 갖도록 하는 ‘현장리더십’에 대한 고민들을 하고 있다. 리더십을 체득시켜 체화시켜야 하는데 그 과정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현장관리자들에게 리더십이 없으면 불만이 모두 노조로 들어가 노조 또한 자판기노조로 전락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로 보고 있다.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은 이제 새로운 노사문화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보고 노사간 게임의 룰을 만들었을 뿐이지 모든 노사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성과배분, 평가시스템, 노동 강도 등의 문제가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이들 노사관계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노동조합은 “울타리 안에서 매몰되는 활동은 하지 않겠다”면서 “노조가 할 수 있는 게 너무나 많다”고 이야기하고, 회사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며 “노사관계가안정됐다 할지라도 말 한마디 잘못하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신노사문화 마스터플랜을 시작했을 때 만났던 한국바스프(주) 여수공장과 3개년 계획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만난 그들은 예전보다 자신감에 차 있었다. 지금 이들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에 걸쳐 내부역량 강화에 초점을 맞춘 2단계 마스터플랜을 준비 중이다. 이들의 노사관계에 있어서의 새로운 시도가 많은 기업의 노사들에게도 전해져 대한민국 노사관계의 발전하는데 일조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