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③] 작은 조직들의 ‘큰 터전’ 꿈꾸는 노동공제회들
[커버스토리③] 작은 조직들의 ‘큰 터전’ 꿈꾸는 노동공제회들
  • 강한님 기자
  • 승인 2021.11.08 22:20
  • 수정 2021.11.08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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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인공제회·노동공제연합풀빵, 설립 후 토대 마련 집중
향후 언론·퇴직자·제화노동자 등 공제회 나올 것

노동 X 공제회

함께 공(共), 건널 제(濟). 공제는 고비를 함께 건너 어려움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공제를 표방한 조직은 1920년 4월에 창립한 조선노동공제회다.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현재, 왜 다시 노동공제회일까? 이에 대해 노동이 다시 불안정 상태로 돌아갔다는 상징적인 현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오래된 미래’이자 ‘새로운 연대’라고 불리는 노동공제회를 살펴보고자 한다.

커버스토리③ 노동공제회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고용형태가 바뀌거나, 불안정하거나, 퇴직해도 괜찮을 수 있을까? 법은 세밀하지 못해 모든 노동자를 포괄하지 못한다.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다.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긴 시간 공제회에 잠잠했던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여러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노동조합들에게도 공제회는 조직화 방법으로 고려되기 시작했다. 이미 활동 중인 봉제인공제회, 노동공제연합풀빵이 있고, 공제회를 준비하는 노동조합들도 여럿이다. 먼저 활동을 시작한 노동공제회, 향후 공제회 설립을 고민하는 조직들을 만나봤다.

노동공제연합풀빵은 6월부터 ‘풀빵 노동공제교실’을 열고 노동조합과 시민, 협동조합 등에게 노동공제를 알리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 풀빵

봉제인들의 든든한 버팀목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는 2019년 봉제인공제회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봉제인공제회는 화섬식품노조 산하 특별위원회로 편제됐다. 임원도 화섬식품노조 추천이사 5명, 서울봉제인지회 추천이사 5명, 외부 전문가 5명으로 구성된다. 공제회에 가입하려면 노동조합에도 가입해야 한다. 반대로 노동조합의 조합원이면 공제회에 가입된다. 공제회에 가입하면 노동조합 교육과 노동공제회 교육도 각각 1시간씩 들어야 한다. 공제회와 노동조합이 같이 작동되는 셈이다.

봉제인공제회는 소규모·영세사업장에서 일하는 봉제노동자의 특성을 반영한 화섬식품노조의 시도다. 노동조합 입장에서도 봉제노동자를 단위사업장별로 조직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서울만 하더라도 곳곳에 작은 봉제사업장들이 있다. 5인 미만 사업장 비율이 높고, 저임금·장시간 노동이 매일 이어졌지만 사용자와 노동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봉제사업장 사용자도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을 했다.

봉제인공제회는 ‘든든한 버팀목’ 시리즈를 운영한다. 여기에는 소액신용대출 지원, 결혼축하금·장례조의금 지원, 행복한 천원상조 서비스 등이 있다. 또 중위소득 100% 이하의 봉제인공제회 조합원은 녹색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데, 의료비 전액을 지원한다. 법무법인 오월에서 무료 자문 변호를 신청할 수도 있다. 서울의 한 피부과와 공제회 조합원이면 일정 금액을 할인해주는 협약도 맺었다. 여러 서비스가 있지만, 품목마다 납부해야 하는 공제회 부금 기간이 다르다. 1개월부터 6개월까지 공제회 부금을 납입한 조합원이 이 서비스들을 이용할 수 있다.

그중 소액신용대출은 노동자들에게 꼭 필요한 공제품목이다. 봉제 노동자들은 ‘계절 실업’을 겪는다. 봉제산업엔 일감이 많은 성수기와 비수기가 존재한다. 비수기는 각 사업장이 만들어내는 옷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봉제노동자들은 실업급여를 받기 어렵다. 근로계약서 없이 작업량으로 급여를 받는 ‘객공’이 많아 노동이력 증빙이 힘들다.

봉제인공제회는 아직 자리를 잡는 중이다. 소액신용대출은 사회가치연대기금에서 대출한 돈으로 운영하고, 매달 5,000원이라는 부금만으로 사업을 진행하기 힘들어 조합비에서 조합원 한명 당 5,000원을 지원받는다. 봉제인공제회에 가입하면 공제회 부금 5,000원과 노동조합 조합비 1만 5,000원을 매월 내야 한다.

화섬식품노조는 산별전환이 완료된 후 공제회를 산별노조 전반으로 확대하는 것을 고민 중이다. 화섬식품노조에 조직된 사업장들도 대부분 200인 미만 사업장들로, 기업복지가 충분치 않은 곳들이다. 강도수 봉제인공제회 사무국장은 “제도개선이나 법개정을 통한 개선도 있지만 스스로의 복지를 만들어 가는 게 책임감 있는 노동의 모습이라고 본다”며 “그런데 진짜 공제회가 필요한 단위에는 재원이 없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공제회를 만들었을 때 일부 지원 해줄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공제회에 지역공동근로복지기금을 결합하는 방식도 고려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풀빵, “10년 안에 100만 공제회 만들고파”

5월 창립보고대회를 가진 노동공제연합풀빵은 업종별 공제회를 넘어 ‘전국노동공제회’를 지향한다. 풀빵은 피부에 와 닿는 노동복지를 노동자들에게 제공하고, 공제회 이름처럼 전태일의 연대·나눔 정신을 한국사회에서 되찾고자 한다. 모든 노동자들의 삶 속에서 연대를 축적해보자는 제안이다. 변화되는 노동환경엔 다양한 조직체들이 모여야 하고, 공제회라는 방법으로 이들을 모아보겠다는 목표도 있다.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기 전 노동자에게는 노동복지로 힘을 주고, 풀빵의 이런 활동은 새로운 정책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다.

풀빵은 노동공제 당사자조직과 지원조직의 연합체다. 이들 조직은 풀빵에서 ‘풀장(Pool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사회안전망인 풀장을 펼쳐나갈 것이라는 뜻이다. 풀장 1호인 적립형 공제는 9월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휴직이나 퇴직, 질병, 사고 등으로 소득이 단절되는 시기에 처한 노동자들이 대비할 수 있는 목돈을 마련하는 공제다. 풀빵의 회원, 준회원 조직에 속한 노동자들은 매달 5만 원, 10만 원, 15만 원, 20만 원 중 선택해 적립액을 쌓아갈 수 있다. 소득의 일정액을 꾸준히 적립하면 만기 시 적립액과 풀빵의 응원금이 주어진다.

이제 풀빵은 경조사공제, 비상금공제, 건강공제, 주택공제, 여행공제, 상조공제 등의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이 공제사업들을 수요조사 후 단계별로 내보이겠다는 계획이다.

노동공제운동을 알리고, 준비하고자 하는 조직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풀빵의 주요한 활동 중 하나다. 현재는 격월로 열리는 노동공제교실에서 노동공제를 배울 수 있다. 나아가 풀빵은 ‘노동공제맥가이버’라는 프로그램을 계획한다. 컨설팅, 경영 지원, IT시스템 지원 등 단위 조직이 공제 사업을 실제로 해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프로그램이다. 추후 단위조직의 공제활동 상근자도 풀빵에서 지원해보고 싶다.

한석호 풀빵 공동운영위원장은 “10년 안에 100만 명이 공제회에 가입하는 게 진짜 꿈”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노동조합이 있어도 사업장 안 임단투에만 매몰되면서 퇴근 이후는 자본에게 넘겨졌다. 그런 상황이 오히려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약화시켰다. 소비라든가 지역 내의 삶, 여행이나 여가의 영역까지도 재구성이 돼야 한다고 본다”며 “풀빵은 노동공제회들의 연합이 되고 싶다. 최소한 산별노동조합들이 공제회를 할 수 있도록 흐름을 만들어내고,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지 않은 이들을 공제회 운동으로 조직하고 싶다. 그들을 주축으로 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내는 게 풀빵의 지향점”이라고 했다.

“제화공제회, 노동자 호응 기대”

봉제, 제화, 인쇄 노동자들은 노동조건과 사업구조가 비슷해 이웃 같은 사이다. 평화시장 봉제노동자들이 청계피복노조를 만들자 제화노동자도 뒤이어 노동조합으로 뭉쳤던 걸 보면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공제회에서도 같았다. 봉제인 공제회가 생기니 제화노동자들도 공제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쪽 동지들이 하고 있는 걸 보니까 참 좋았기” 때문이다.

제화만 놓고 본다면, 산업 특성상 평균연령이 높다. 제화공이 되길 선호하는 청년이 적어 신규 입사자가 드물다. 민주노총 민주일반연맹 전국일반노조 서울본부 제화지부는 고령의 조합원들에게 공제회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제화지부는 올해 하반기 공제회를 적극적으로 추진해볼 계획이다. 제화지부에서 먼저 공제회를 만들고, 추후 전국일반노조 서울본부 조합원들까지 확대해볼 생각도 있다. 박완규 제화지부 지부장은 “제화공은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공제회를 추진했을 때 호응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조합원들의 노후준비가 공제회 품목으로 있으면 좋겠다. 공제회에서 여행도 지원해주고, 손녀 손자들 결혼식 축의금 같은 건 같이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다. 노동조합을 통해서 조합원들이 함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공제회로 모일 미디어 비정규직

미디어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싶은 ‘미디어비정규직공동사업단’도 공제회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미디어비정규직공동사업단은 민주노총 언론노조와 방송작가지부, 전태일재단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등이 참여하는 기구다. 이들이 준비 중인 미디어노동공제회는 방송사, 신문사, 출판사 등 미디어 산업 전반의 비정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공제회를 통해 노동 복지를 함께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미디어 비정규직의 인력규모와 고용형태를 모두 파악하기 쉽지 않고, 회사들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데다 비정규직의 노동조합 조직률도 낮았다. 미디어노동공제회는 이들의 노동조합을 당장 세우긴 어려우니 공제회로 생활 속 공동체를 형성해보자는 의견들에서 시작됐다. 미디어비정규직공동사업단은 내년 5월 1일자로 공제회를 만들 계획이다. 최근엔 공제회 설립을 위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이 조사를 바탕으로 미디어노동공제회 설립방안과 공제품목이 제안된다.

이미지 언론노조 특임부위원장은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공제라는 단어가 노동조합보다 다소 편하게 수용될 때 이 방식에 확신이 들었다. 공제회를 통해 전국의 많은 미디어 비정규직들이 연대해 스스로 문제해결에 나설 수 있길 바란다”며 “지금은 수요조사로 당사자들에게 공제회를 홍보하고 있지만 조만간 대대적인 홍보작업에도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퇴직후 공제회로 좋은 삶을

퇴직자노동조합을 꾸리려는 민주노총 서울본부도 공제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는 퇴직자노조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내년 5월 1일 준비위원회로 전환하고, 11월 13일 노조를 출범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공제회도 이 일정에 맞춰 준비된다. 아직 시작단계지만 봉제인지회처럼 노동조합과 공제회가 결합한 방식에 긍정적이다.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활동하는데, 퇴직자는 교섭대상도 기업복지도 없다.

퇴직자노조는 퇴직자들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퇴직자들 간 경제적 공동체도 중요하겠다는 생각들이 있었다. 의료, 각종 경조사 등 퇴직 이후 맞닥뜨리는 여러 상황들을 공제회로 풀어보겠다는 아이디어다.

공제회에 퇴직자 간 자산격차를 고려해보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황희준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국장은 “노동조합의 정신을 평등과 연대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방향 중 하나로 퇴직자노조를 만들고자 하는데, 공제회에 연대정신이 구현된다면 좋겠다”며 “서로 연대할 수 있는 모델이 공제회에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노동공제회는 노동조합에게도 ‘자산’

강도수 봉제인공제회 사무국장은 “산별노조를 못 만들게 한 후 시간이 흐르면서 노동조합은 스스로의 기능을 교섭 중심으로만 바라봤다. 자기 역할을 확대하는 문제를 간과했던 것이고, 산별노조를 통한 전면적인 회복에는 시간이 드는 중”이라고 지적했다.

신군부의 기업별노조 강제는 노동공제회의 단절을 빚었다. 대공장 중심의 기업별노조가 사업장 안 투쟁에 집중했던 시기가 있었고, 사업장 안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이 노동조합의 주요한 성과로 비쳤다. 물론 노동조합이 고용과 처우에 집중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노동조합 밖 노동자들과의 격차, 그리고 노동조합이 이들을 잘 끌어들이지 못하는 상황도 신경 써야 할 지점이다. 여기에 작고 영세한 사업장, 비정형 노동을 기존의 조직방식으로 묶기엔 한계라는 배경도 작용한다.

노동공제회는 ‘노조 할 이유’를 기획한다. 그래서 노동공제회는 노동조합과 노동자에게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노동자는 공제회를 통해 구체적인 복지를 획득하고, 노동조합은 보다 안정적으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모아낼 것이다.

강도수 봉제인공제회 사무국장은 “기업과의 투쟁을 통해서 확보하는 임금과 복지가 아니라도, 우리의 작은 돈이라도 힘을 모으면 대안을 찾아갈 수 있다는 걸 조합원들은 공제회로 느낀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필요한 자주적인 노동조합의 가능성”이라며 “그래서 공제회는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또 다른 무기를 찾아오는 방법 중 하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