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기관사들, 아플 때 눈칫밥 삼켰다
젊은 기관사들, 아플 때 눈칫밥 삼켰다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3.04.05 00:51
  • 수정 2023.07.30 1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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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역 기관사들, 코로나19·고열에도 병가 사용 꺼려져
철도노조 구로승무지부 “직간접적인 연차·병가 금지 행위 즉시 중단돼야”
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광장 앞에서 '코로나에 운전강요, 책임자를 처벌하라, 아프면 쉴 권리 쟁취'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앞 광장에서 '코로나에 운전강요, 책임자를 처벌하라, 아프면 쉴 권리 쟁취'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서울 지하철 1호선 구로역 기관사로 일하는 A 씨는 지난해 9월 10일 추석 당일 근무 중 고열·몸살을 겪었다. 자가진단키트로 검사한 결과 코로나19 양성을 의미하는 두 줄이 떴다. A 씨는 사업소 팀장에게 조퇴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선별진료소나 병원에서 공식적으로 확진 판정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A 씨는 다음 날 선별진료소에서 결국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코로나19 확진 상태로 지하철을 운행한 것이다. “코로나19 증상 발생 시 진료받고 집에 머물며 다른 사람과 접촉 최소화”하도록 한 고용노동부 ‘코로나19 감염예방을 위한 사업장 대응지침 14판(2022.05.22.)’에 반하는 조치였다. A 씨는 “졸지에 국민 안전을 해치는 기관사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철도공사 수도권광역본부 구로승무사업소 기관사들은 A 씨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전국철도노동조합 서울지방본부 구로승무지부(지부장 정주회)는 4일 기자회견을 열고 “코로나19, A형 독감, 고열 등에도 병가 금지와 업무를 강요하는 일이 잇따라 발생한다”며 “승진 심사 점수를 주관하는 관리자가 진급 누락 사유로 ‘병가 사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탓에 직급이 낮은 기관사 사이에선 ‘병가를 사용해선 안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했다.

구로승무지부에서 이날 공개한 사례를 보면, 근무 중 극심한 생리통·두통을 겪은 B 씨의 경우 몇 차례 요구한 끝에야 다음 날 보건휴가를 허락받았다. C 씨는 감기로 인한 몸살과 졸음에 병가를 신청했으나 근무 대체자 부족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D 씨는 견습기관사라는 이유로 연차 사용에 면박을 당한 이후 ‘아파서 쉬겠다’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꺼려하게 됐다.

이나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일로 인한 부상과 질병이 만연한 상황에서 노동자가 제대로 치료받고 일할 수 있는 권리인 연차·병가를 공사 측에서 사용을 금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의 아픈 몸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광장 앞에서 열린 '코로나에 운전강요, 책임자를 처벌하라, 아프면 쉴 권리 쟁취'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앞 광장에서 열린 '코로나에 운전강요, 책임자를 처벌하라, 아프면 쉴 권리 쟁취'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승진 역전 왜 그런가 했더니... “병가 사용해서”

유급휴가 사용에 고충을 겪는 건 특히 직급이 낮은 20·30대 기관사라고 구로승무지부는 강조했다. 이들은 ”지도운용팀장들은 신입사원교육 때부터 ‘욕심 있는 선배들은 아파도 병가를 사용하지 않고 연차를 사용해서 쉰다’, ‘능력이 비슷하면 병가 사용 여부를 볼 수밖에 없다’면서 인사권을 내세우며 병가를 사용하지 못하는 자기 검열 문화를 조장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어 “연차 사용 금지 조치까지 일상적으로 벌어지기 때문에 인사권과 운용권을 가진 관리자에 대한 눈치 보기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했다.

정주회 구로승무지부 지부장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구로사업소 부소장이 ‘병가 사용’을 근무평가 감점 요인으로 설명한 뒤부터 불만이 고조됐다고 밝혔다. 지난해 하반기 구로사업소에선 2020년 입사자가 2019년 상반기 입사자보다 먼저 진급하는 ‘승진 역전’이 발생했다. 사유를 묻기 위해 찾아간 2019년도 입사자에게 부소장은 ‘2022년 X월 XX일 병가 사용’을 여러 이유 중 하나로 언급했다. 이에 2019년 입사 동기들이 대자보 게재 등으로 부소장의 ‘인사권 남용’이라며 항의했고, 2016~2021년 입사자들도 동참하며 부소장 징계를 요구했다.
 

구로승무지부 조합원들이 사업소에 붙였던 부소장 규탄 대자보 ⓒ 전국철도노동조합 서울지방본부 구로승무지부

해당 부소장은 노동조합 간부 등을 직장내 괴롭힘 가해자로 신고한 상태다. 수도권광역본부는 대자보를 철거하고 선전전에 참가한 조합원의 얼굴을 인쇄해 ‘집단괴롭힘 행위자’로 사업소에 게시했다.

정주회 지부장은 “부소장이 굉장히 구체적으로 병가·연차 가용을 기록한다는 사실과 진급에 반영된다고 설명한 것에 조합원들이 충격을 많이 받았다”며 “공공기관의 상대 평가식 승진 제도를 바꿔야 한다. 당장 제도를 바꾸기 어렵다면 운용이라도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하고 무사고 일수 등 안전 경력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로승무지부는 ▲부소장 경질 ▲노조 탄압 중단 ▲연병가 통제 근절 대책 마련 ▲공정한 승진심사(무사고 경력 존중) 실시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기업도 근로기준법상 연차와 단체협약에 따른 병가 사용을 제약할 수 없다”며 직간접적인 연차·병가 금지 행위는 즉시 중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특히 인력 부족을 (연차·병가 금지)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된다”며 “충분한 인력을 확보해야 하며 이를 위해 현행 예비율이 한계를 보였다면 산식 자체를 수정하는 등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부분들까지 고쳐야 마땅하다”고 했다.

한편 한국철도공사 관계자는 연차·병가 사용이 인사 평가에 반영될 수 있느냐는 <참여와혁신>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했다. 또 “모든 평가가 계량적인 것도 있고 비계량적인 것도 있다. 승진과 관련해서 소장(부소장)이 임의대로 하느냐고 물어보면 확인하기는 좀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노동조합에서 문제를 제기한 부소장은 한국철도공사를 통해 문의해 달라고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