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왜 역사에서 이재유를 호명하는가 - 이재유의 삶과 생애
[기고] 왜 역사에서 이재유를 호명하는가 - 이재유의 삶과 생애
  • 참여와혁신
  • 승인 2023.05.09 05:50
  • 수정 2023.05.09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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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사회학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사회학

우리는 역사에서 특정 인물을 기억하고 호명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개항 이래 서구 문물의 수입과 적용을 통해 근대화를 추구해 오면서 우리 자신의 전통과 역사의 자산을 일구고 그로부터 배우는 데에는 아무래도 소홀히 온 탓도 있을 것이다. 일찍이 1925년 신채호가 「랑객(浪客)의 신년만필(新年漫筆)」이란 글에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된다”고 개탄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한국의 근대에서 1920~1930년대는 반세기 정도를 사이에 둔 1980~1990년대와 비슷한 격동의 시기였다. 특히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전반기에 국내에서는 1929년의 원산총파업이나 1930년의 평양고무공장 총파업에서 보듯이 일본의 식민 지배에 반대하고 식민지 민중의 해방을 지향하는 대중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으며, 곧이어 이는 진보적 지식인과 사회운동가들이 주도하는 비합법의 노동·농민운동으로 이행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국 진보 운동의 역사에서 이재유는 1930년대 민족혁명의 흐름을 주도한 대표 인물이다. 식민지 상태에서 조선의 독립과 민중 해방 물결의 한 가운데에서 그것을 주도함으로써 그는 이 시기의 상징이 됐다. 그에게 바쳐진 수많은 헌사 중 ‘당대 최고의 혁명가’ 혹은 ‘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거듭되는 체포와 고문, 감옥생활, 탈주, 지하 활동으로 점철된 그의 삶은 남미의 혁명가로 널리 알려진 체 게바라 못지않게 극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를 역사에서 호명하는 것은 집단 기억 상실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된 사회를 위해 불꽃처럼 살았으나 해방 이후 분단 80년을 눈앞에 둔 역사에서 망각의 강물 속으로 사라져 버린 그 기억이다.

(왼쪽) 1936년 12월 25일 이재유가 체포됐으나 일제는 4개월 동안 보도를 통제했다 이듬해 1937년 4월 30일에 해금했다. 해금되자마자 당일 1937년 4월 30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호외를 발행해 이를 알렸다. (오른쪽) 1930년대 이재유의 모습 = 김경일 교수 소장 자료

192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일본에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재동경조선청년총동맹, 신간회 동경 지회 등의 사상단체와 노동단체 등에서의 합법 운동과 아울러 조선공산당 일본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등에서 비합법 운동을 하며 도쿄 경시청을 비롯한 여러 경찰서에 무려 70여 차례나 검속될 정도로 맹렬한 활동을 했다. 1930년 제4차 공산당 사건의 관계자로 조선으로 호송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은 그는 1932년 말에 출옥한 이후 1936년 말 일제에 의해 체포되기까지 이 시기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으며, 체포된 이후에도 옥중에서 죽을 때까지 혁명가로서의 삶과 민족혁명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위대한 사람 한 사람이 통일한다고 해서 혁명은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그의 말에서 보듯이 이재유는 노동대중의 주체성과 자발성을 강조했으며, 이는 트로이카라는 독특한 조직방식을 통해서 표현됐다. 노동자, 농민과 도시 빈민, 창녀 등 식민 지배 아래에서 가장 억눌리고 박탈당한 민중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을 바탕으로 그는 구체적인 자료에 근거해 하층민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했다.

나아가 그는 이 시기의 주류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일본 제국주의 민족 정책에 대해 가장 강렬하게 비판하고 또 이에 항거함으로써 민족혁명에 대한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특유의 4천 년 역사와 문화, 혈통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언어, 풍속, 관습, 교육, 역사까지도 위조, 약탈, 동화되도록 강제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는 학교 교육에서 조선어의 상용과 조선 역사 시간을 늘릴 것을 주장했다. 최후로 검거된 이후 옥중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조선어 사용금지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다가 1944년 일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진보 운동의 역사적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추격, 고문, 학살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혁명을 실천해 간 이 시기의 대표 혁명가인 이재유의 지도와 영향 아래 이관술, 박진홍, 김삼룡, 이현상 등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변혁 운동을 주도했던 많은 운동자들이 배출됐다.

이재유를 비롯한 이들 사회주의자 대부분이 제국 시대인 20세기에 일본 제국주의의 약탈과 전쟁, 가혹한 식민 지배와 민족 말살 정책에 맞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살아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 싶다. 국가로 표상되는 공동체가 존립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젊음과 생명을 내놓고 그 부름에 응답하고자 했다. 사상과 이념의 문제로 민족해방에 대한 이들의 열정과 헌신이 역사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지고, 그들의 후손들이 그로 인한 정신의 고통과 물질의 결핍을 감내해야 하는 불공평한 비인간의 현실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