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사회·노동운동의 토착화와 노동대중의 주체성
[기고] 사회·노동운동의 토착화와 노동대중의 주체성
  • 참여와혁신
  • 승인 2023.06.07 18:10
  • 수정 2023.07.3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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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사회학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사회학

흔히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흐름으로 혁명적 노동·농민조합운동을 꼽는다. 마치 1980년대의 이른바 ‘학출’ 노동운동가들이 그러했듯이 이 시기에 많은 사회운동가, 노동운동가들이 이 운동에 투신함으로써 사회운동의 대세를 이뤘다. 이재유가 주도한 혁명적 노동운동이 이 시기 무수히 많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사례와 구분되는 중요한 지점은 사회·노동운동의 토착화라는 점이다.

이재유가 사회·노동운동의 토착화를 지향한 사상의 기저에는 대중의 자율성과 주체성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다. 당시의 현실에서 보면 이는 이른바 전위와 대중의 문제와 연관된다. 미약한 사회운동의 전통을 배경으로 다수 대중이 외부의 권위에 의존한 현실에서 대부분 사회·노동운동가들 역시 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았다. 수백 년에 걸친 유교 전통의 영향으로 노동에 대한 일정한 편견과 아울러 노동자에 대한 사회의 거리감 또한 점차 극복되고는 있었다 하더라도 엄연히 편견과 거리감은 존재했다. 노동자 출신이 소수이고 지식인 학생들이 다수를 차지한 이 시기의 사회·노동운동가나 사상가조차 노동운동에 대한 대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편견이 일정한 영향권 안에 있었다.

1930년대 전반의 무수한 당재건 운동의 사례들은 대중의 기초도 없이 전국 조직을 가지고 당을 먼저 결성한 다음 노동자들을 단순히 ‘획득’하는 대상으로만 여긴 운동자들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인다. 노동대중 앞에 군림하면서 이들을 지도하려는 운동자들의 일방통행식 자세는 1933년 9월 동대문 밖의 서울고무에서 발생한 노동자 파업에서 엿볼 수 있다. 이 파업은 대중 파업에서 전위의 역할과 임무, 즉 노동대중에 대한 전위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당시의 노동자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이른바 국제선으로 통칭하는 프로핀테른에 속한 ‘정통 운동선’의 노동운동가들은 이 파업에 자신들이 ‘파견’된 이유를 노동자에 대한 ‘지도’에서 찾았다. 이와는 달리 이재유의 조직에 속한 운동자들은 지도가 아닌 ‘응원’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규정하고자 했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열띤 토론 끝에 협의한 결과는 ‘응원’이라는 이재유 그룹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노동운동가들이 파업에 대해 응원의 차원에서 개입한다면 파업에서 노동자의 적극성과 주도권이 부각되는 것이고, 이는 노동대중의 자율성과 주체성의 배양으로 이어진다. 반면 노동운동가가 파업을 지도하게 되면 노동 대중은 단순히 그 지도를 따르는 수동의 동원 대상에 불과하게 된다.

(왼쪽) 1934년 1월 검거된 이재유의 모습 (오른쪽) 이재유가 고안한 운동방침(원본을 일제가 번역한 것) = 김경일 교수 제공

이재유는 이러한 행태에 대한 비판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1932년 말에 출옥해 운동을 시작할 무렵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직접 노동자가 돼 공장으로 들어가서 활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전위로서 노동운동가는 자신이 직접 노동자가 돼 노동대중 속에 파고 들어가 대중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전위와 대중이 쉽게 분리돼 온 지금까지의 폐단을 극복하고 대중 기반의 당을 결성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대중이 없는 당은 죽은 당이므로 각각의 운동자는 공장과 작업장에 들어가 자유롭게 노동자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운동방침이었다.

이재유가 독자로 고안해낸 트로이카 조직방식을 이 대목에서 언급해야 한다. 각각의 운동자가 자기의 자유의사에 따라 개인 차원에서 접촉해 상당한 그룹이 결성될 때 비로소 조직을 한다는 이 이론은 당시 지배하던 이른바 오르그에 의한 중앙집중의 하향식 조직방식과 대조를 이룬다. 레닌의 이른바 민주집중제가 이후 ‘민주’ 요소는 무시된 채 ‘집중’ 요소만 관철된 상태에서 스탈린 체재로 이행해 간 역사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재유의 트로이카 이론은 이러한 일방의 지도-피지도 관계를 부정하고 “지도함과 동시에 자신도 지도되는” ‘민주’의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트로이카 조직에서 민주성을 담보하는 평등의 원리는 이중 차원에서 관철된다. 첫째 그것은 운동자들 사이의 관계를 기본으로 상호 대등한 트로이카로 설정한다. 이처럼 평등한 관계에 있는 운동자들은 노동 대중 속에 들어가 활동하는데, 이때 양자의 관계 역시 대등하다. 이에 따라 대중이 전위가 되고 전위가 대중으로 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의식화를 통해 전위 스스로 의식이 고양되며, 전위는 일방으로 지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가 대중으로부터 ‘지도’를 받는 것이다. 이처럼 이재유는 노동 대중의 지도력을 기꺼이 인정함으로 그들이 지닌 민중적 자율성과 역동성에 주목하고자 했다. “위대한 사람 한 사람이 통일한다 해서 혁명은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잘 보여주듯 그는 노동 대중의 주체성과 자발성을 다른 누구보다도 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