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민족혁명과 국제연대 사이에서
[기고] 민족혁명과 국제연대 사이에서
  • 참여와혁신
  • 승인 2023.07.11 10:16
  • 수정 2023.07.1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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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사회학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사회학

1920년대의 사회운동은 전반으로 보아 민족문제보다는 계급의 관점을 우위에 둔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편향은 특히 1920년대 후반 이후 민족개량주의가 급속하게 타락하는 것을 배경으로 더욱 강화됐다. 이 시기에 민족주의는 민족개량주의, 나아가서 때로는 친일 매판과 동일 차원에서 공공연하게 인정되는 일정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반대로 이 시기 세계 혁명운동은 혁명역량의 결집에 부정의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는 ‘좌편향’의 커다란 흐름 안에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이러한 상황은 일제의 교묘한 분할통치 정책과 억압으로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이재유는 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 바 있다. 1930년대 이후 치안유지법의 개정이나 경찰 테러의 강화에서 보듯이 노농대중의 생존 요구조차도 탄압한다면, 이들이 일정한 희생과 전투력을 가지고 반(半)공산주의자로 되고 또 일정한 비합법의 활동 방법을 가지고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는 모든 중간 계급의 운동을 몰락시킴에 따라 조선 내 정치 정세를 변화시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양대 계급 대립을 더욱 첨예화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정이 이 시기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현실로 이끌었다. 이재유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0년대 중반 서울로 올라와 민족 차별을 경험하며 싹튼 민족의식은 이후 반제운동과 사회/노동운동에 헌신하는 사상의 토양이 됐다. 그의 말을 빌리면 “조선 적화의 수단으로서 조선 독립을 희망”한 것이 아니라 “우선 조선 독립이 근본 문제”라 생각하고 그 실현을 위해 활동한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데 왜 조선의 독립이 필요한가를 묻는 일본 검사의 질문에 대해 이재유는 “내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함은 일본에서 독립하지 않는 이상은 언제까지나 조선은 공산주의 국가로 될 수 없고 또 설령 공산주의 국가로 된다고 해도 일본적 공산주의 국가로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현실 민족주의의 무능력과 한계에 촉발돼 그것을 민족개량주의로 매도하면서 계급주의에만 매몰된 다른 사회운동자들과 달리 그는 민족혁명의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당대의 어느 운동가들보다 민족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쳤다.

이처럼 이재유의 운동을 민족혁명의 시각에서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을 국내에 기반을 둔 이른바 국내파 운동만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 당시 이른바 국제선과의 연계를 지닌 운동에서 나타난 일정한 편향과 한계에 대한 비판에서 이재유가 이들에 대해 일정한 거부감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코민테른 코스의 기치 아래’를 내걸고 국제선의 권위를 빌어 군림하려는 영웅주의와 권위주의를 비판했다. 국제노선에 대한 무비판과 맹목의 추종, 교조화 되고 경직된 이론에 대한 고수, 자신의 운동방침을 세우지 못하고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는 안이한 현실 인식, 대중 기반 없이 소수의 운동자로 조직을 결성해서 일거에 혁명을 달성하려는 관념과 급진의 태도 등을 그는 거부했다.

이처럼 이재유는 조선의 현실에 대한 주체와 구체 운동방침을 신뢰했고, 이것이 그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올바른 국제노선이었다. 운동의 토착화와 국제주의를 동시에 추구했다는 점에서 양자는 그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민족문제와 계급 문제, 운동의 토착화와 국제 연대의 양자에 대한 균형 잡힌 인식은 당대 최고의 혁명가라는 명성에 걸맞은 것이었다.

(좌) 미야께 시까노스께 교수가 이재유를 40일 동안 숨겨준 동숭동 관사 (우) 미야께 시까노스께 경성제국대학 교수의 수형사진
= 김경일 교수 제공

국제주의와 국제 연대에 대한 이재유의 감수성은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연대와 평화를 지향하는 공동의 역사를 위한 초석이 됐다.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대항하는 공동의 대의를 위하여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였던 미야께 시까노스께(三宅鹿之助)는 구속과 해직이라는 개인과 가족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동숭동 관사에 40여 일 동안 이재유를 기꺼이 숨겨주었다. 함경남도 흥남지방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혁명적 노동운동에 헌신한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와 같이 적지 않은 일본인이 식민지 조선의 혁명운동에 참가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식민지 청년들은 반제와 반전을 지향하는 일본의 사회운동에 기꺼이 헌신했으며, 많은 일본인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취지에 공감하고 지원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20세기 전반기 반제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서 이러한 교류와 연대는 오늘날 두 나라의 시민단체들이 식민 지배를 둘러싼 과거사 문제나 정신대 문제, 역사 왜곡과 같은 쟁점들이나 후쿠시마 핵발전소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움직임 등에서 거두고 있는 일정한 성과들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전통의 연장선에서 해방과 분단 이후 60년이 넘는 분단과 냉전의 역사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간다운 사회의 건설을 전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