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살 아파트’ 없애려면 건설노동자 ‘적정임금제’ 도입돼야
‘순살 아파트’ 없애려면 건설노동자 ‘적정임금제’ 도입돼야
  • 김온새봄 기자
  • 승인 2023.12.26 11:28
  • 수정 2023.12.2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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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임금제 시범사업 결과 생산성·생산 품질 향상 확인돼
20일 오후 서울시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 제4간담회실에서 열린 ‘건설분야 적정임금제 추진 성과 및 효과적 확산 방안 논의’ 토론회. ⓒ 참여와혁신 김온새봄 기자 osbkim@laborplus.co.kr

건설현장에 만연한 불법 다단계 하도급과 저임금, 부실시공의 악순환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에게 적정 수준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국회 토론회에서 나왔다.

‘건설분야 적정임금제 추진 성과 및 효과적 확산 방안 논의 토론회’가 지난 20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 제4간담회실에서 열렸다. 참가자들은 그간 일부 공공부문 건설공사 현장에서 실시된 적정임금제의 성과를 소개하며 이를 효과적으로 확산·개선할 방안을 제시했다. 토론회는 더불어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와 박주민·우원식·조오섭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공동 주최했다.

적정임금제란 건설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에 하한선을 만드는 제도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은 건설업에선 도급 수급자가 수주를 받기 위해 공사비를 깎으면서 인건비 역시 삭감되기 일쑤다. 공사 기일을 과도하게 단축하는 일이나 임금 체불 역시 다반사다. 이렇게 일자리의 질이 낮아지면서 저임금·저숙련 인력이나 불법체류 외국인 인력 유입이 늘고 청년·고숙련 인력은 줄어들었다.

이에 국토교통부는 2017년 ‘건설산업 일자리 개선대책’을 통해 적정임금제 도입을 발표했다. 국토교통부는 2018년부터 한국토지주택공사(LH), 한국도로공사, 한국철도시설공단,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진행된 건축·토목공사 현장 10곳에서 시범사업을 진행했다. 경기도에서는 공공일자리 양질화 사업의 일환으로 관련 조례를 제정해 관급공사에 적정임금제를 도입했다.

전국적으로는 올해 1월부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발주하는 300억 원 이상 규모의 공사 현장에 적용될 예정이었으나 현재는 도입이 유보된 상태다. 박주민·우원식·조오섭 의원이 관련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상임위원회에서도 논의되지 않았다.

‘불법 재하도급-부실시공’ 악순환
임금 하한선으로 제동 걸 수 있어

이날 토론의 참가자들은 건설 현장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는 데 적정임금제가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심규범 건설근로자공제회 전문위원은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한 업체에 공사를 수주할 수 있게 하는 최저가낙찰제를 실시하면서 가격이 낮아질 수 있는 하한선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 현행 제도로 인해 악순환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철근이 빠진 채 시공된 ‘순살 아파트’ 논란 역시 이 과정에서 발생하게 된다고 심규범 전문위원은 지적했다. 하도급, 재하도급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말단에 있는 노동자들의 임금이 낮아지며 공사 기한은 촉박해지고 고숙련 노동자들도 현장을 떠나면서 부실시공이 만연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심규범 전문위원은 “인건비 하락에 제동을 걸면 임금을 깎는 출혈 경쟁 대신 기술 경쟁이 촉진될 수 있다. 또 제값을 주고 숙련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게 되면서 건설 작업물의 품질 역시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적정임금제를 도입한 현장의 만족도도 높았다. 김경훈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건설노조 경기도건설지부 형틀목수팀 팀장은 “현장의 다른 하도급업체나 원도급업체 모두 재정 여력을 고민하지 않고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 전했다.

김경훈 팀장은 LH에서 발주한 평택 소사 행복주택(공공임대주택) 건설 현장에서 골조 하도급업체 소속으로 일했다. 이 현장에선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했고 안면인식장치 등으로 근태를 관리해 주휴수당도 지급했다. 김경훈 팀장은 “노동자들의 결근이 줄고 집중도가 높아졌다. 공사 기한은 단축되면서 생산 품질은 더욱 향상됐다”고 이야기했다.

김회복 서울주택도시공사(SH) 안전경영실 부장은 “임금과 더불어 노동자들의 몸·마음 건강을 꼼꼼하게 관리하면서 발주자가 직접 현장 노동자를 챙기는 것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김회복 부장은 “정책이 성공적이라고 판단돼 향후 정책 확대와 보완을 함께 추진할 예정에 있다”고 했다.

기능등급제·노무비 직접지급제 등
제도적 보완 필요성도 제기돼

아울러 이날 토론자들은 적정임금제를 정착시키기 위해선 임금 산정 기준에 기능과 숙련도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짚었다. 박종국 경기도청 노동전문관은 “경력직 우선 채용 경향을 방지하기 위해선 기능과 숙련도에 따라 적정임금에 차등을 둘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용학 (사)한국건축시공기능장협회 부회장은 “적정임금제가 건설기능인의 역량을 확대하고 품질을 향상하기 위한 교두보가 되기 위해선 기능등급제와 연계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이력, 자격, 교육 이수 내역, 관리자 경력 등을 종합적으로 입증·판단해 적정임금을 단계별로 산정할 수 있게 하는 체계를 제안했다.

발주자가 노동자에게 임금을 직접 지급하도록 하는 ‘노무비 직접지급제’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현석호 건설산업연맹 정책실장은 “노동자가 아닌 ‘오야지’(현장 책임자)에게 임금을 대리지급하는 사실이 계속 확인되고 있다. 불법하도급 역시 여전히 만연한 상태”라고 지적하며 하도급 중간에서 발생하는 이런 횡령과 착취를 방지하기 위해 노무비 직접지급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옥기 건설산업연맹 위원장은 “현재의 건설 현장은 ‘소비자는 품질을 알지 못하고 판매자는 품질에 신경쓰지 않고 생산자는 품질을 지킬 수 없는’ 비정상 상태”라며 “이를 정상화하기 위해선 적정임금제 도입과 더불어 공사 기한·공사비도 적정하게 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