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공사 농성장에서 보낸 24시간
도로공사 농성장에서 보낸 24시간
  • 정다솜 기자
  • 승인 2019.10.14 11:22
  • 수정 2020.07.29 03: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천 도로공사 본사 농성장에서 만난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
한국도로공사 건물 바깥에서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텐트를 치고 노숙 농성 중이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한국도로공사 건물 바깥에서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텐트를 치고 노숙 농성 중이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해고된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의 한국도로공사 본사 점거 농성이 한 달을 넘어섰다. 

지난달 9일, 이강래 도로공사 사장은 대법원이 이들을 직접고용하라고 판결했지만 소송에 참여한 인원만 직접고용하겠다고 밝혔다. 자회사 형태의 정규직 전환을 거부해 해고된 요금수납원 1,500명 전원에 대한 대책은 빠진 것이다.

이날은 비가 계속 내렸다. 소송 시점만 다를 뿐 같은 일을 했으니 도로공사가 1,500명 전원을 직접고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일회용 비닐 우비를 입은 채 경북 김천 도로공사 본사로 향했다. 대법원 판결 취지에 따라 1,500명 직접고용에 대한 이강래 사장과 교섭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이들의 본사 점거 농성은 그렇게 시작됐다.

저녁 8시는 도로공사 본사 안에서 점거 농성 중인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하루를 마무리 하는 종례 시간이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저녁 8시는 도로공사 본사 안에서 점거 농성 중인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하루를 마무리 하는 종례 시간이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가짜 같은 현실, 증거 남기기의 달인이 된 노동자들

지난 4일, 밤이 깜깜해지고 폴리스라인 주변이 혼잡한 틈을 타 농성장 안으로 들어갔다. 2층 로비에는 앞뒤, 옆으로 경찰에 둘러싸인 요금수납 노동자 200여 명이 줄을 맞춰 앉아 있었다. 이들은 남정수 전국민주일반연맹 교선실장의 사회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보통 농성장의 하루는 '조회(09:00)-아침식사(10:00)-집회(14:00)-저녁식사(17:00)-문화제(18:00)-종례(20:00)'로 이뤄진다. 기자는 맨 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눈으로 내가 보는데 무슨 상관이야?" 저녁 8시 15분, 등 뒤가 소란했다. 박순향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 부지부장의 목소리였다. 박 부지부장이 경찰에게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말라"고 요구하자 "내 눈으로 내가 보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경찰이 맞받아치면서 갈등은 시작됐다. 

박 부지부장이 오른손에 든 스마트폰이 눈에 띄었다. "다 찍어놨으니까. '내 눈으로 내가 보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던 경찰 나와서 사과하라!" 그는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영상으로 찍고 있었다. 종례를 마친 노동자들도 하나둘 모여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경찰은 결국 증거를 든 박 부지부장에게 사과했다.

농성장 안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경찰과 충돌이 발생할 때마다 습관처럼 증거를 남긴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농성장 안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경찰과 충돌이 발생할 때마다 습관처럼 증거를 남긴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24시간을 함께한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증거 남기기의 달인들이었다. 이들이 매일 겪는 가짜 같은 현실을 증거로 남기지 않으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새벽 1시, 김천 경찰서장이 농성장에 찾아와 머리를 숙인 일도 증거 때문이었다. "그날 경찰이 '이쁘지도 않은 얼굴 왜 쳐다보냐'는 말을 해서 우리가 사과하라고 요구했어요. 그런데 경찰이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발뺌을 한 거예요. 경찰이 끝까지 우기다가 녹화된 증거 영상이 나중에 나와서 결국 서장까지 와서 사과한 거죠." 김상미(51) 씨는 그날 상황을 이야기하며 "증거가 없었다면 그날 끝까지 사과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다녀갈 정도로 농성 초반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이들은 매일 싸우면서 조금씩 농성장을 바꿔나갔다. "하루는 잠잘 공간을 확보하고, 하루는 이쪽 경찰 인원을 좀 빼달라, 하루는 저쪽을 좀 빼달라, 하루는 잘 때 불 꺼달라고 투쟁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어요." 박주분(53) 씨는 치열하게 쌓인 매일을 담담하게 설명했다.

잘못된 줄도 몰랐던 일터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일하는 동안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도로공사에서 내려오는 예고 없는 감원 지시가 대표적인 예다. "도로공사에서 상반기, 하반기에 감원 지시가 내려왔어요. 이번엔 몇 명이나 감원될까 그런 두려움을 안고 있었죠. 만약 감원 인원이 한 명이면 '아, 우리 정년 언니가 있으니까' 이러면서 안도를 하기도 했어요. 점점 동료가 나가주길 바라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거죠. 내려온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요." 

고용 불안에 시달리던 이들은 영업소의 갑질이 갑질인 줄도 모른 채 견디기도 했다. "지금 내가 너무 억울한 건 뭐냐면 열심히 일한다고 솔선수범했던 거예요. 지역축제에 가서 하이패스를 홍보하고 알리는 일이 있었거든요. 그때 초번으로 오후 2시에 일 끝나면 나가서 한두 시간씩 홍보하며 공짜노동을 했어요. 그런 식으로 내가 도로공사의 인건비 착취를 위한 갑질에 앞장선 거야. 그게 갑질인 줄도 모르고."

농성장 한쪽 '1,500명 직접고용'의 벽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농성장 한쪽 '1,500명 직접고용'의 벽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요금소의 '장애인 고용지원금 장사'를 목격하기도 했다. 농성장에서도 다리를 절뚝이거나 몸이 불편한 노동자들이 눈에 띄었는데 도로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요금소의 장애인 고용률은 25.1%다. 요금수납원 4명 중 1명이 장애인인 셈이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는 장애인을 고용하는 사업주에게 지원금을 지급한다. 그런데 요금소가 이 제도를 악용해 보조금 최고액을 받을 수 있는 수급기간이 지난 장애인들을 내보내고 다른 영업소 장애인 노동자로 대체해온 일이 지속됐다는 것이다. 

"원래 장애인 고용지원금은 장애가 있는 노동자에게도 주라는 건데 딱 월급만 주는 거예요. 당사자들은 정작 그런 줄 몰랐어요." 

"어떤 영업소는 16명 중에 한 사람 빼고 다 장애인인 곳도 있었고 장애인 이력서가 들어오면 멀쩡한 사람을 자르려고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자회사를 믿을 수 없는 이유 

불안정한 일터에서 일해온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도로공사의 자회사를 통한 '고용안정' 약속을 믿지 않는다. 도로공사의 '스마트톨링' 도입으로 어차피 자회사로 간 요금수납원들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도로공사의 자회사가 민영화된 경우도 있었다. 

"자회사는 금방 없어져요. 도로공사에서 스마트톨링을 2022년부터 도입한다는데 2년 뒤잖아요. 그때 요금수납원은 필요 없다는데 요금수납원 5,000여 명을 몰아넣은 자회사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거죠." 

캐노피 위에서 98일 만에 땅 밟은 6명, 도로공사 농성장으로 

5일 오후 1시, 98일간 서울요금소 캐노피 위에서 고공농성하던 요금수납 노동자 6명이 땅을 밟았다. 이들은 도로공사 본사에서 투쟁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김천으로 향했다. 오후 5시, '희망버스'와 함께 도착한 6명은 농성장 안으로 들어왔다. 

고공농성 98일 만에 캐노피에서 내려온 6명의 요금 수납 노동자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고공농성 98일 만에 캐노피에서 내려온 6명의 요금 수납 노동자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어떤 분이 연대하고 응원해줄 수 있지만 정말 당사자들이 없다면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건 우리한테 제일 중요한 말입니다. 당사자가 떠나고 난 다음에는 어떤 연대도 관심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끝날 때까지' 이 말을 지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김승화·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고덕톨게이트) 

"땅을 밟긴 밟았나 봐요. 도로공사 정문에서 들어오며 나한테 이런 조직이 있었고 이런 동지들이 있었구나 가슴 벅찼습니다." (김경남·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청북톨게이트 지회장)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지금 캐노피를 계속 지키고 있는 게 맞는가. 우리가 캐노피 위에서 할 수 있는 건 마음 졸이는 것밖에 없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도로공사에 거점을 두고 여기서 끝장을 내자는 결심을 하고 왔습니다." (도명화·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지부장) 

"여러분 만날 생각하니 새벽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때까지 해왔던 고생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 같이 투쟁하겠습니다." (이명금·공공연대노조 한국도로공사 영업소지회 부지회장)

"98일 동안 사실 지치고 힘든 순간이 많았습니다. 캐노피 아래로 시민들이 차 안에서 손 흔들어주고 경적 한번 울려줄 때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을 알기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저희가 직접고용의 결실을 맺고 내려왔으면 참 좋았겠지만 내려와서 두 배로 세 배로 더 힘을 내 끝날 때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채민자·공공연대노조 한국도로공사 영업소지회)

"불평등한 세상을 향해서 저희는 평등을 요구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해서 더 큰 소리로 단결된 목소리로 같이 외쳐야 합니다." (이옥춘·공공연대노조 한국도로공사영업소지회 북강릉영업소)

캐노피에서 내려온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환영인사를 미리 연습 중인 요금수납 노동자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캐노피에서 내려온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환영인사를 미리 연습 중인 요금수납 노동자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이날 오후, 한 시간이 넘게 자신이 겪은 일들을 정성스럽게 이야기하던 김상미(51) 씨에게 기자는 "말씀해주시는 이야기를 기사에 다 담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또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한 것 같다. 이해한다"며 "그래도 이 말은 꼭 담아달라"고 부탁했다. 

"가진 자들이 우리를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이렇게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울부짖고 있을 때 딱 한 번만 그 입장이 됐다고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종례를 마친 뒤 잘 준비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요금수납 노동자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종례를 마친 뒤 잘 준비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요금수납 노동자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빨랫줄에 나란히 걸린 수건, 옷, 모자 네 개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빨랫줄에 나란히 걸린 수건, 옷, 모자 네 개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정리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정리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불이 꺼진 도로공사 2층 로비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불이 꺼진 도로공사 2층 로비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잠들기 전 스마트폰을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잠들기 전 스마트폰을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저녁에 빨래를 한 뒤 수건, 옷가지 등을 널어놓지만 하루가 지나도 잘 마르지 않는다. 환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햇볕이 들지 않는 막힌 공간이기 때문이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저녁에 빨래를 한 뒤 수건, 옷가지 등을 널어놓지만 하루가 지나도 잘 마르지 않는다. 환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햇볕이 들지 않는 막힌 공간이기 때문이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공간을 구분하는 칸막이로 사용하는 스티로폼 상자는 개인 물건을 정리하는 '사물함'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공간을 구분하는 칸막이로 사용하는 스티로폼 상자는 개인 물건을 정리하는 '사물함'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잘 시간이 되자 앞을 보던 경찰은 뒤로 돌아앉았다. 기자는 경찰이 교대하는 매시간 50분마다 잠에서 깼다.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는 경찰의 구둣발 소리 때문이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잘 시간이 되자 앞을 보던 경찰은 뒤로 돌아앉았다. 기자는 경찰이 교대하는 매시간 50분마다 잠에서 깼다.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는 경찰의 구둣발 소리 때문이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농성장은 새벽 6시부터 분주하다. 잠에서 깬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씻고 자리를 정리하며 아침조회를 준비한다. 조회의 시작은 간단한 체조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농성장은 새벽 6시부터 분주하다. 잠에서 깬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씻고 자리를 정리하며 아침조회를 준비한다. 조회의 시작은 간단한 체조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농성장에서 인기가 많은 꽃이다. 오가는 요금수납 노동자들의 시선은 꽃에 머문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슬며시 웃는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농성장에서 인기가 많은 꽃이다. 오가는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꽃에 시선을 준다. 작게 웃는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