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솜의 다솜] 조끼들의 사회적 역할
[정다솜의 다솜] 조끼들의 사회적 역할
  • 정다솜 기자
  • 승인 2020.09.09 16:55
  • 수정 2020.09.09 2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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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사랑의 옛말. 자꾸 떠오르고 생각나는 사랑 같은 글을 쓰겠습니다.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정다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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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현장 취재를 전처럼 못 다니고 있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기자들이 대면접촉을 자제하고, 노동조합도 온라인 기자회견 등으로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에 발맞추고 있어서다.

꼼꼼한 보도자료도 대체할 수 없는 현장 분위기, 순서상 뒤에 있지만 노동자들이 진짜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내용 등을 파악할 수 없는 점이 가장 답답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현장 취재 때마다 구경하던 노동조합 조끼를 못 봐 아쉽기도 하다. 

처음 이른바 '투쟁조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지난해 여름 어느 취재원에게 "조끼가 노조에 대한 거부감을 높인다"며 "노조가 바뀌려면 조끼부터 벗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다. 사실 노조에 대한 거부감은 조끼 때문이라기보다 한국전쟁과 분단, 노조를 공산당과 연결해 '빨갱이들'이라고 몰아세운 매카시즘 등 뿌리가 오래 된 결과임을 모를 리 없는 분이었다. 

그럼 조끼가 뭐길래? 노조가 조끼를 입는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한 시기는 90년대 초·중반이다. 93년 11월 1일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상임의장 단병호)의 주관으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의 주요 요구안 중 하나는 군사정권 아래 해고됐던 노동자들의 복직이었다. 

이 집회에서 경주포항지역 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는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는 노란색 글씨가 선명한 검은 조끼를 맞춰 입고 상경했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던 이들의 통일된 복장은 주목을 받았다.

포항지역 해복추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는 2004년 <참여와혁신>과 인터뷰에서 “복직에 대한 절박한 심정을 알릴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조끼를 맞춰 글씨를 새겨 넣자는 아이디어를 냈다”며 “당시에는 지금처럼 투쟁조끼를 맞추는 곳이 없어서 시장에서 검은 천을 사서 재봉틀로 박아 조끼 모양을 만들고 유성 페인트로 일일이 구호를 찍었다”고 회상했다. (▶관련기사 : ‘습관과 특권의 조끼’를 벗어던져라)

이후 투쟁조끼는 노조의 공식 유니폼이 됐다. 요즘은 노조별 다른 색·주머니 개수·재질, 조합원마다 개성을 살린 배지와 패치의 구성, 등자보 부착 여부, 계절 따라 달라지는 소재(주로 여름엔 망사), 여기에 조끼색과 맞춘 모자·스카프 등 조끼의 다양한 면면이 드러나 취재 나갈 때마다 조끼를 살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틈날 때마다 조끼에 대해 묻기도 했다. 어느 톨게이트 노동자는 남편에게 '빨갱이 다 됐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팔뚝질을 연습해도 집에선 영 어색하고 폼이 안 났는데, 현장에서 조끼만 입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이 조끼만 입으면 못할 게 없다"며 웃기도 했다. 

조끼는 투쟁력을 높일 뿐 아니라 실용성도 갖췄다. 조끼에 이것저것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많아서 좋다고 말한 노조 활동가도 있었다. 실제로 기자는 투쟁조끼를 입고 하루를 지내본 적이 있는데 사과 한 개에 귤 두 개가 한 주머니에 들어가는 크기와 치약칫솔 세트를 넣어도 쏙 들어가는 깊이에 깊이 감명받은 바 있다. 조끼야말로 취재수첩, 펜, 휴대폰, 이어폰, 명함지갑, 보도자료 등 챙겨 다닐 물건이 많은 기자에게 필요한 옷이었다. 

이미 조끼가 재밌어진 기자는 최근 어느 노조 관계자와 대화를 나누다 또 조끼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가끔 조합원 중 조끼 입기를 꺼리는 분들에게 공단 내에서 노조 조끼는 입고 싶어도 입을 수 없는 옷이라고 설명한다고 말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측면을 고민해보지 않았다. 

맞다. 노조 조끼는 아무나 입을 수 없는 것이다. 양대노총의 조직률은 11%, 노동자 10명 중 1명만 조끼를 입을 수 있다. 고용형태별로 보면 고용노동부의 2019년 통계 기준 정규직 노조 가입률은 12.9%, 노조의 보호가 더 필요한 비정규직의 가입률은 0.7%에 불과하다.

사각지대가 넓은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등 구조적 원인도 크겠지만 대기업, 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 위주로 조직된 노조처럼 투쟁조끼 또한 안정적인 일자리의 상징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올해 3월 'LAB2050'이 정규직을 연구하면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3%가 '노동조합에 가입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정규직에 부합하는 사람'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이처럼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특권이 된 조끼를 입은 민주노총은 최근 더 많은 노동자들과 조끼를 같이 입어야겠다며 '국민동의청원' 제도를 통해 10만 명의 동의를 받아 정부와 국회를 압박하는 방식으로 '전태일3법' 입법 운동에 돌입했다. 

전태일3법은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는 근로기준법 11조 개정안 ▲모든 노동자에게 노조할 권리 보장하는 노조법 2조 개정안 ▲모든 노동자에게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안 등 3개 입법안이다. 

전태일3법 입법 운동은 조끼들이 적극적으로 사회적 역할을 해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김재하 민주노총 비상대책위원장은 "민주노총 조합원 다수는 노조가 있고,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는다. 그럼에도 민주노총이 나서는 이유는 조직력과 단결력이 높은 100만 조직이 아니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며 "전태일3법 입법 운동이야말로 민주노총의 진정한 사회적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특히 오늘(9월 9일)은 조끼들이 '구구데이 발의 총공(총공격)'을 벌이는 날이다. 조끼들은 주변에 입법발의자 9명을 조직하고, SNS 9곳에 전태일3법 입법발의 청원 방법을 안내하고, 오전 9시엔 포털 사이트에 '전태일3법'을 검색하는 방식으로 지금 곳곳에서 움직이는 중이다.

곧 다가오는 퇴근길, 구구데이를 맞아 어딘가 거칠고 촌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조끼들의 노력을 휴대폰으로 한번 찾아보는 건 어떨까. 혹시 모른다. 예상보다 조끼들을 지켜보는 일이 재밌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