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혜의 온기] 부산광역시 선별진료소 취재후기
[최은혜의 온기] 부산광역시 선별진료소 취재후기
  • 최은혜 기자
  • 승인 2020.09.23 11:09
  • 수정 2020.09.23 1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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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記 따뜻한 글. 언제나 따뜻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참여와혁신 최은혜 기자 ehchoi@laborplus.co.kr
참여와혁신 최은혜 기자 ehchoi@laborplus.co.kr

한 달 전의 일이다. <참여와혁신>은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과 함께 ‘코로나19에 맞선 공무원들’이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그 두 번째 취재 일정은 8월 27일 부산광역시 선별진료소였다. 광복절에 있었던 광화문집회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코로나19가 급격하게 확산하던 시기였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다행히 무사히 취재를 마치고 기사를 송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섭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으로 기자들은 재택근무를 시작하는 날이었고, 사진 촬영을 위해 동행한 동료 기자의 안전 역시 책임져야 한다는 이상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물론 이 모든 두려움은 취재 전날 저녁에 불현 듯 생겨났다.

8월 22일, 사랑제일교회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취재했던 모 언론사의 사진기자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게다가 취재 전날인 8월 26일에는 국회 출입기자의 코로나19 확진으로 국회가 폐쇄됐다는 소식이 보도되기도 했다. 그동안 잘 피해 다녔다고 생각했던 코로나19가 정말 턱 밑까지 쫓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걱정은 함께 살고 있는 엄마였다. 엄마는 가구마다 방문해 정수기를 점검하는 노동자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많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고객으로부터 “코로나19로 걱정되니 정수기 점검을 미루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가끔은 엄마가 코로나19를 옮기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는 고객도 있다고 했다. 엄마의 동료는 코로나19로 걱정스러운 마음에 8살과 6살의 어린 두 자녀를 지인의 집에 피신시키기도 했다.

‘만약 취재를 다녀왔다가 내가 감염되면 어쩌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찔했다. 가방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니트릴 장갑과 일회용 우비를 챙겨 넣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급하게 취재원에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안 됐다. 질병관리본부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야 했다.

저녁 8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질병관리본부 콜센터는 연결이 됐다. 상황을 설명한 뒤 취재를 다녀와서 2주 동안 자가격리를 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질병관리본부에서는 “선별진료소에서 일하는 공무원과 같은 수준의 방호복을 입는다면, 코로나19 감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개인위생에 각별히 신경 쓰고 하루 이틀 정도는 최대한 타인과의 접촉을 줄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답했다. 연락이 되지 않았던 취재원도 “방호복과 N95마스크, 장갑을 지급할 수 있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다음 날 아침, 부산행 KTX에 몸을 실었다. 태풍 상륙 소식이 있었지만, 다행히 취재 도중에는 비나 바람이 불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부산광역시 선별진료소에서는 모두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코로나19로부터 지역사회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최근 선별진료소에서 일하던 공무원 노동자가 땀을 닦다가 코로나19에 감염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매뉴얼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일하면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하다”고 답했다. 코로나19 사투 최전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의연한데 나 혼자 겁에 질렸던 것 같아 전날 떨었던 수선이 창피해졌다.

부산광역시 선별진료소 기사가 나간 후, 기사에는 “컨트롤타워인데 부산시 정례브리핑에서 안나오는 사람? 숨은 일꾼인가? 많은 사람들이 숨은 공로자로 묵묵히 일하고 있어요 그중 한사람인데 이제 기사로 크게 나왔으니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네요”라는 댓글이 달렸다. 그렇다. 지금도 누군가는 아무도 알아주지는 않지만, 코로나19와의 사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노고를 인지하고 개인위생과 방역수칙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부산광역시 선별진료소를 취재하고 내가 가장 크게 깨달은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