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나와 함께 자란다
내-일은 나와 함께 자란다
  • 이동희 기자
  • 승인 2021.01.08 00:15
  • 수정 2021.01.08 0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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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일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들 Part.2
나만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좋아진 일

커버스토리 ③ 일의 열두 얼굴을 보다

일과 나

“특별한 꿈이 없어 공시생을 택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취업준비생 10명 중 3명은 적성이나 꿈보다 안정적인 노후를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그리고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라는 말이 상징하듯 우리에게 일은 하루치 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엔 자기 일에서 하루치 빵 이상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일과 나’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일은 과연 뭘까? “일이 재밌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따라가 봤다.

강오순, 견미령, 김도윤, 남윤영, 박미성, 신기하, 안형선, 이연순, 장종일, 전종렬, 정호영, 주묘희. 직접 만나거나 음성 통화, 영상 통화로 만난 12명의 이름이다. 누구보다 자신의 일을 재밌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다. 한 명 한 명 ‘왜, 그리고 어떻게 일을 재밌고 열심히 할 수 있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삶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다. 일에 삶이 묻어있고, 삶에 일이 묻어있기 때문이었다. 일과 삶, 둘 같지만 하나인 이야기에서 ‘즐거움’과 ‘최선’의 얼굴을 마주해봤다.

나만의 일로
나만의 영역을 만들다

일을 재밌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만의 영역’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만의 영역은 어떤 분야에서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기존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찾아낸 것일 수도 있다.

안형선 라이커스 대표는 이중 후자에 속한다. 라이커스(LIKE-US)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주택수리서비스를 제공한다. 집수리가 필요할 때 낯선 수리기사를 집 안으로 들이는 게 불편했던 여성, 불합리하게 느껴졌던 수리비용을 토로할 길이 없었던 여성에게 전문적인 기술을 갖춘 여성수리기사가 명확한 요금표를 들고 찾아간다. 막연히 남성이 하는 일로 여겨졌던 집수리에 여성이 진출함으로써 ‘라이커스만의 영역’이 만들어진 것이다.

“여성기술자들은 기술을 배워도 그 기술을 제공할 기회가 별로 없어요.” 안형선 대표는 물류업, 건설업 등 이른바 ‘힘을 써야 하는’ 업종에 여성의 진출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답답함을 느꼈다. 성 역할 고정관념이 뿌리 깊은 산업 속에서 여성의 일을 찾아보자! 젠더 프리 브랜드 메이커 ‘주식회사 왕왕(WANG WANG)’은 이렇게 탄생했다. 왕왕에서 만든 브랜드가 바로 라이커스다.

“이게 잘 될까? 이 서비스를 많은 사람들이 찾아줄까?” 2019년 11월 서비스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머릿속에 작은 불안감이 맴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라이커스는 별도의 유료 홍보 없이도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여성수리기사가 방문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수리기사를 부른 후에도 집에서 편안히 할 일을 할 수 있어 좋았다’ 등 서비스에 대한 높은 만족도를 두 눈으로 확인하자 불안감 대신 확신이 생겼다. “고객에게 ‘꼭 살아남아 지방에도 지점을 내 달라’는 후기를 듣기도 했어요. 서비스 기획 과정에서 했던 고민이 풀리면서 이 서비스가 도움이 되고 있구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이 들었죠.”

안형선 라이커스 대표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안형선 라이커스 대표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손끝에서 나오는 기술 하나만으로 ‘자기만의 영역’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흔히 장인(匠人) 또는 명인(名人)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장종일 대우목형 사장은 서울 을지로·청계천에서 마지막 남은 목형(木型) 업체인 ‘대우목형’을 운영하는 목형공이다. 어렸을 적 친구들에게 썰매도 직접 만들어줄 정도로 나무로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했다. 18살에 들어간 주물공장에서 10년 가까이 기술을 배운 뒤 독립해 차린 가게가 지금의 대우목형이다. 앞만 보고 달려왔더니 목형공으로 산 세월이 벌써 44년이다.

장종일 사장의 남다른 기술력 덕분일까. 다른 업체에서는 거절당한 작업이 대우목형에만 오면 뚝딱 해결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언젠가는 졸업 작품 제출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대학생이 급하게 찾아와 제발 도와 달라며 작업을 맡긴 적도 있었다. “다른 곳에 3개월 맡겼는데 안 된다고 거절당하고 나한테 찾아왔더라고. 내가 일주일 만에 해줬지. 지금까지 다른 데서 못한다고 했다는 거 나한테 맡기면 다 해줬어. 탱크도 만든다는 게 그냥 나온 말이 아니야. 없는 것 없이 다 만들 수 있어.”

장종일 사장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이유는 만드는 물건이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손님이 맡기는 물건은 그때그때 다 달라. 물건이 다양하니까 만드는 재미가 쏠쏠하지. 맨날 똑같은 것만 만들면 지루해서 못해.” 이제 어떤 물건이 와도 도면만 보면 ‘이렇게 하면 되겠군’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장종일 사장은 이렇게 되기까지 대단한 무언가가 있었던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냥 열심히 한 거 말고는 없어. 순리대로 여기까지 온 거지. 안 될 때도 있어. 그때는 고민하다 보면 구상이 떠올라. 남한테 의지하지 않고 그렇게 다 해결해왔어. 내 기술이 곧 자존심이니까.”

장종일 대우목형 사장
장종일 대우목형 사장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전종렬 한칼 대표도 칼로 가득한 ‘자기만의 영역’에 여념이 없다. 24살 봄, 대장장이인 아버지를 따라 시작한 일이 어느새 10년을 꽉 채웠다. 이제는 칼갈이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서울 노량진수산시장에 위치한 가게에는 작업을 마친 칼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가 하루에 연마하는 칼만 평균 100자루가 넘는다. 날카로운 쇠붙이를 다루는 일이기에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집중, 또 집중해야 한다. 10년을 갈고 닦은 기술이지만 이걸 말로, 또는 글로 표현하려니 쉽지 않다. 대신 몸이 기억한다. 이제는 눈 감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칼을 갈 수 있는 정도가 됐다. 10년이면 장인의 반열에 오른 것 아니냐는 취재진의 말에 전종렬 대표는 “전문가 소리 듣죠. 그래도 자만하면 안 돼요”라며 웃었다.

전종렬 한칼 대표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전종렬 한칼 대표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내 일의 가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

일을 재밌게 하는 사람들은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이들의 일은 개인에서 사회로, 일에서 또 다른 일로 순환하고 확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김도윤 타투이스트는 그림이나 문자를 살갗에 새기는 일에서 나아가 타투이스트의 ‘일반 직업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개인을 위한 일에서 타투이스트로 불리는 모두를 위한 일로 나아간 것이다. 그는 타투이스트들의 노동조합인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타투유니온지회를 설립해 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2년 5월 “문신은 의료인이 하지 않으면 보건위생상 위해가 생길 수 있는 의료행위”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타투 시술은 의료행위이며 의료인이 아닌 타투이스트가 타투 시술을 하는 것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의료법 제27조 1항과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5항에 의거한 판결이었다.

하지만 김도윤 타투이스트는 “1992년 대법원 판결 외에 그 어떤 것도 타투가 불법이라고 정의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가 타투를 이야기할 때 불법을 전제하고 있는 ‘합법화’가 아닌 ‘일반 직업화’ 또는 ‘비범죄화’라는 표현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타투가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을 이용해 ‘형사 고소하겠다. 전과자 되기 싫으면 돈 내놔라’ 협박하는 고객도 종종 있다. 이로 인한 단속과 조사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타투이스트가 매년 존재한다. 이 같은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생각해 노조를 만들었다. “저는 이미 유명해졌고, 기존 손님이 다시 재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예약이 꽉 차요. 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안 되겠다, 진짜 힘들어서 못 하겠다, 이런 감정을 느꼈어요.”

타투이스트가 제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에서 타투 ‘일반 직업화’는 시작일 뿐이다. 재능 있는 타투이스트들이 더 넓은 시장에서 제값을 받고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도 그의 꿈이다. “우리나라보다 더 넓은 시장에 자리 잡은 타투이스트와 교류하고 작업할 수 있게 길을 터주는 역할도 하고 싶어요.”

김도윤 타투이스트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김도윤 타투이스트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박미성 타워크레인 조종사도 비슷한 고민을 안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 중 하나다. 건설현장에서 타워크레인은 필요에 따라 자재들을 옮기는 역할을 한다. 위아래로, 좌우로, 안에서 밖으로 무거운 자재들을 원하는 곳에 딱 맞춰 넣으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박미성 조종사의 경력은 26년, 올해 예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장에서 먼저 찾는 타워크레인 조종사다.

박미성 조종사는 건설현장 노동자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일할 수 있는 제도적 완비를 꿈꾼다. 지붕 없는 건설현장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휴게실, 화장실, 탈의실 같은 편의시설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탈의실이 없으면 옷 갈아입는 것도 길바닥에서 갈아입어요. 그럼 곧바로 주민들한테 민원 들어오고. 탈의실 같은 기본 시설은 있어야죠.”

이 외에도 노동자를 위한 안전화와 작업복도 갖춰져 있어야 한다, 안전장치를 의무화해야 한다, 죽지 않고 다치지 않는 현장을 만들어야 한다 등 으레 건설현장에서 노동조합이 내는 목소리를 그도 함께 내고 있다. “제가 건설노조에 부위원장으로서 있는 한 지금과 같은 목소리를 계속 낼 생각입니다.”

박미성 타워크레인 조종사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박미성 타워크레인 조종사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일이 또 다른 일로 순환하고 확장하는 사례는 주묘희 씨앤엠로보틱스 대표이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기계제조업체 씨앤엠로보틱스는 사내 부설 교육훈련기관인 ‘티플러스 아카데미(T-Plus Academy)’를 운영하고 있다. 주묘희 대표이사는 이곳에서 직접 인재 양성에 힘쓰고 있다. 국내에서 중소기업이 일학습병행 공동훈련센터를 직접 운영하는 곳은 씨앤엠로보틱스의 티플러스 아카데미가 유일하다.

주묘희 대표이사가 기업 경영에 그치지 않고 ‘교육훈련’에까지 손을 뻗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결정적인 계기는 2012년 말, 특성화고 학생을 채용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훈련의 성과를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부터다. “10개월 동안 직무교육 외에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영어, 수학, 물리 등을 기초부터 하나하나 가르쳤어요. 10개월이 지났더니 3년 경력직으로 뽑은 사람보다 잘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알게 됐죠.” 직업교육의 중요성을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우리나라는 학교에서 배운 것과 현장에서 쓰이는 직무역량과의 괴리가 너무 커서 그 간격을 좁혀 주는 직업교육이 아주 중요합니다.” 주묘희 대표이사가 기업에서 직업교육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특히, 씨앤엠로보틱스의 경우 기술력이 기반인 사업 특성상 기술자를 채용해야 하는데, 경력과 실무의 미스매칭, 재교육비용 발생, 잦은 기술인력 유출 등의 문제로 적합한 기술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현장에서 쓰이는 기술을 직접 가르치기 위해 2015년 설립한 것이 티플러스 아카데미다.

주묘희 대표이사는 지금의 일에서 교육훈련 분야 외에 이루고 싶은 꿈이 한 가지 더 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맞는 직업을 찾고, 찾은 직업에서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사회적으로 직장이 아닌 직업을 찾도록 하는 인식 변화가 필요해요. 높은 대우나 쉬운 일을 하는 직장을 갖는 것보다 자기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갖고 일을 했을 때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 수 있도록 말이죠.”

주묘희 씨앤엠로보틱스 대표이사 ⓒ 주묘희 대표이사

안형선 라이커스 대표는 지금의 주택수리서비스에서 확장할 수 있는 여러 사업 가능성을 모색 중이다. 아직은 막연한 청사진이지만, 조직이 안정되고 커지면 집수리 영역에서 나아가 도배, 타일 시공 등 인테리어 영역으로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싶다. “가끔 라이커스 최종 목표가 뭐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 저는 항상 여성들만 모여서 집 짓고, 건물 짓는 거라고 답해요. 그리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거죠. 누가 봐도 ‘이 사진이 진짜야?’ 하는 획기적인 일이 되지 않을까요?”

애초 안형선 대표가 왕왕을 설립한 목적은 성 역할 고정관념이 뿌리 깊은 산업 속에서 여성의 일을 찾아보자는 것이기 때문에 집과 관련된 영역이 아니어도 확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여전히 여성이 진출하지 못하고 있는 영역의 벽을 하나하나 허무는 것 역시 안형선 대표의 꿈이다. “너무 많죠. 자동차 경정비도 이 중 하나예요. 우리가 하거나 아니면 누가 우리처럼 나서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에서 여성을 더 많이 접하고 싶어요. 여성도 이런 일을 할 수 있구나 하고 직업적 상상력이 확장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