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나’ 사이엔 어떤 고유함이?
커버스토리 ④ 일이 더 재밌으려면
일과 나
“특별한 꿈이 없어 공시생을 택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취업준비생 10명 중 3명은 적성이나 꿈보다 안정적인 노후를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그리고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라는 말이 상징하듯 우리에게 일은 하루치 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엔 자기 일에서 하루치 빵 이상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일과 나’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일은 과연 뭘까? “일이 재밌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따라가 봤다.
“흔히 손발이 척척 맞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어떤 목표를 협동해서 이뤄낼 때 가장 재미를 느낍니다. 개인적으론 내 머릿속에 그린 것을 실현하느라 열중할 때 가장 에너지가 솟아나고 열정적으로 되는 것 같아요.” -주묘희 씨앤엠로보틱스 대표이사
일이 재미없을 때?
일이 재밌는 순간이 비범하지 않았듯 일이 재미없는 순간도 특별하지 않았다. 12명의 일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없을 때, 반복적이고 시키는 일을 해야 할 때, 부족한 능력을 실감할 때, 감정노동으로 고단할 때, 자신의 직업을 무시당하거나 차별받았을 때 일이 재미없다고 말했다.
신기하 수원교육지원청 장학사는 “학교의 요청을 해결하지 못하고 학교의 어려움을 지원해 드릴 수 없을 때” 일이 재미없다고 했다. 견미령 파크랜드노조 위원장도 “임단협에 열심히 임했는데 조합원들께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느낄 때 속상하고 위원장으로서 회의감이 든다”고 했다.
주묘희 씨앤엠로보틱스 대표이사는 “똑같은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해야 한다거나 남이 시켜서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은 재미없다”고 했다. 직장인 대부분은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데 대표이사라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주묘희 대표이사는 “반대일 수도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기에 대표이사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며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주도적인 면이 있다. 시켜서 하는 일이 나쁜 게 아니고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내 스타일인 것”이라고 답했다.
더 잘하고 싶은데 부족한 능력을 실감할 때도 힘들었다. 안형선 라이커스 대표는 “동료들과도 협업해야 하는데 협업 경험이 많지 않아서 고민과 스트레스가 컸다”며 또한 “수리하러 갔을 때 내 능력에서 안 되는 경우 힘들다”고 말했다. 다만 안형선 대표는 “거짓말 같지만 정말 일을 그만둘까, 사업을 접을까 생각했던 순간이 있는데도 일 자체가 재미없었던 적은 없었다”고 했다.
큰 기쁨을 주는 고객은 슬픔을 안기기도 한다. 정호영 현대차 영업사원은 “영업은 초고난도의 감정노동이라고 생각한다”며 “인간적으로 대하기보다는 ‘됐고, 서비스 얼마나 줄 거냐’ 이렇게 대하시는 분들도 꽤 있다. 그러다 보니 상처를 많이 받기도 했고, 좀 힘들었다”고 말했다.
내 직업이 무시당하거나 차별받는 순간도 참기 어려웠다. 장종일 대우목형 사장은 목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이렇게 표현했다. “기술하는 사람들이 단순하다. 크게 남을 해치는 것도 없고. 근데 우릴 보면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지 않나? 작업복 입고 그러니까 거부감을 느낀다. 우리는 바닥부터 걸어왔는데 등한시하는 거다.”
이연순 서울대병원 청소노동자도 “(병원에서) 우리 말을 무시하고 그럴 때 진짜 속상하다. 메르스 때 비정규직이라서 마스크도 안 줬다”며 “의료진이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가 청소를 잘 못 하면 환자도 안전하지 못한데, 막 무시받고 차별당할 때 눈물 난다. 눈이 퉁퉁 부어서 병실 들어가면 환자들이 눈치채고 ‘왜 또 무슨 일 있었어?’라고 물어본다”고 이야기했다.
일이 재밌기 위한 조건들
그럼에도 이들이 일의 재미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앞서 소개한 이유들이 있었다. 이들은 내 일이 적성에 맞아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일에서 나의 쓸모, 즉 남에게 도움을 줄 때마다 만족을 느꼈다. 가끔 힘을 잃을 때도 내 일에서 원동력을 찾아냈다. 일과 나의 관계가 좋아지다 보니 나만의 영역이 생겼다. 나만 재밌기보다 함께 재밌을 때 기쁨은 제곱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들은 언제 일이 재밌는지 명확히 알기에, 더 재밌기 위한 순간들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다만 일이 재밌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있었다. 이들은 최저생계비 이상 돈을 벌었고, 스스로 조심해야 하지만 수시로 안전을 위협받는 일터에서 일하지 않았다. 또한 “토 나올 것 같은, 하기 싫어 죽겠을 때까지 갈고 닦았던” 숙련 기간을 거쳐 나만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었다.
일을 더 재밌게 하려면?
더 재밌게 일하기 위해 필요한 변화들도 있다. 12명의 일하는 사람들은 우선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사라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서로 배려하고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조직문화가 갖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삼십 대 초반인 정호영 현대차 영업사원은 “집값이 너무 비싸다”며 주거 고민을 덜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따로 공부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견미령 파크랜드노조 위원장은 “일을 더 체계적으로, 더 제대로 하기 위해” 2017년 사이버대학에서 경영학 학사를 수료하고, 2019년 부경대학교에서 석사를 마친 뒤 박사과정을 준비 중이다. 견미령 위원장은 “재무제표, 회계 등 공부를 통해 많은 걸 알게 됐다”며 “솔직히 일과 공부를 병행하기 힘들지만 이렇게 해야만 조합원과 회사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남윤영 국립정신건강센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 “공무원들도 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뿐 아니라 팀이 같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면서도 “근무시간은 일을 더 잘하기 위해 공부하는 시간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남윤영 전문의는 “근무시간은 일하는 시간”이라며 “미국에 가서 보니 다들 일에만 집중해서 퇴근시간을 맞추고 개인 공부는 그 이후에 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일과 나 사이,
고유한 기쁨을 찾아서
물론 이들이 이야기한 일이 더 재밌어지는 요소들이 정답은 아니다. 이들의 얼굴에서 내 일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지만, 나만의 얼굴을 그릴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내 일이 언제, 어떻게 재밌는지 아는 것이다. 그 순간에 집중하면 12명이 그랬듯 일과 나 사이에 생기는 고유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다시 일로 채워질 2021년이 왔다. 지금 일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이미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를 시작했을 것이다. 희망보다 불안을 말하기 쉬운 새해가 조금 더 특별해질 수 있다면 일하는 얼굴들이 분투 속에서 새롭게 찾은 고유한 기쁨들 덕분일 수도 있겠다. 내 일의 얼굴로 채울 새해가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