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페미니스트로 살기] 설치는 페미니즘, 세상을 바꾸다
[어쩌다 페미니스트로 살기] 설치는 페미니즘, 세상을 바꾸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21.03.09 10:04
  • 수정 2021.03.09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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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세계 여성의 날 릴레이 기고② 황지수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조직차장
황지수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조직차장 제공

2010년대에 학교를 다닌 페미니스트들이 으레 그렇듯, 나도 2014년 메갈리아와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으로 비롯된 페미니즘 리부트의 수혜를 받았다. 페미니즘을 처음 알게 됐을 때 이전과 다른 세상에 눈을 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그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바뀌었다. 그동안 불편하고 답답했지만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페미니즘의 언어를 빌려 나의 언어로 직조해낼 수 있었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세미나와 독서모임을 통해 여성 차별과 그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를 배웠다. 앞으로의 여성운동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친구들과 토론했다. 그렇게 내 나름의 치열한 여성주의자의 삶에 푹 빠져 살았다.

그런데 학교를 마칠 때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뱉는 말과 실천이라는 것들이 누구에게 가닿고 있나? 수도권 4년제 대학을 다니는, 다닐 수 있는 20대 여성? 그렇다면 다른 세대의 여성들에게, 다른 계급의 여성들에게, 내가 처한 것과 다른 조건에 처한 여성들에게 나의 몸짓과 목소리가 가닿을 수 있나?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는 내가 청자로 상정한 여성들에게도 가닿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쓴 수 장의 대자보는 어느 누군가에겐 절대 가닿지 못하는 공허한 외침이었다. 그래서 노동조합 조직활동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고 싶어서, 더 많은 여성 동지들에게 가닿고 싶어서, 외롭게 싸우는 여성 동지들에게 곁을 내주고 함께 싸우고 싶어서. 내가 배우고 겪은 페미니즘은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부푼 꿈을 안고 들어온 노동조합은 예상했지만 20대 여성에겐 꽤나 험난한 곳이었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서울지부가 꽤나 성평등한 조직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데도 그렇다. 조합원들이 젊은 여성 상근자에게 궁금해하는 건 이런 거다. ‘몇 살인지? 애인은 있는지? 결혼은 했는지? 아직 안 했다면 부모님이 시집가라는 말은 안 하는지? 아가씨들은 이런 일 힘들어서 못하는데 어떻게 하는지?’ 같은 것들. 조합원들은 여성 활동가가 남성 활동가에 비해 투쟁력이 약하진 않을까 걱정한다. 현장 담당 조직부장을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바꿔달라는 요구도 있다. 실제로 여성 활동가의 역량과 무관하게 그런 걱정들을 한다. ‘노동조합은 남성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한편 사측의 태도는 더욱 무례하다. 다른 남성 활동가에게는 존댓말을 쓰면서 나에겐 반말을 쓴다. 사측과 푸닥거리를 해야 할 때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를 자주 느낀다. 어떤 사측 관계자는 “황지수는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 욕을 너무 많이 한다”면서 내가 현장 출입하는 것을 막기도 했다. 그런데 욕이라면 나 말고 다른 남성 활동가들도 많이 했다. 이 중년 남성 사측 관계자는 태어나서 한 번도 자신보다 어린 여성에게 폭언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남성에게 폭언을 많이 들어봤다. 상대의 의도와 관계없이 현장에서 자주 모멸감을 느끼곤 한다. 이렇게 느끼는 것들이 내가 젊은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테다.

이 글이 노동조합은 젊은 여성이 활동하기 힘든 조직이니 여기 오지 마라는 이야기로 들릴까 걱정이다. 사실은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노동조합에 뛰어들기를 바란다. 앞에서 얘기했듯 페미니즘은 개인에게 부조리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을 선물한다. 그렇기에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나를 바꾸는 일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나를 뛰어넘어, 차별과 부조리를 박살내고 세상을 바꾸는 일로 이어진다.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면 “아가씨가 이렇게 힘든 일을 어떻게 하냐”는 질문이 불편하지 않았을 거고, “세상을 바꾸는 순간순간에는 언제나 여성 노동자가 있었다”고 되받아치지도 않았을 거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불편한 기색의 대꾸가 세상을 바꾸는 작은 한 걸음이라 믿는다. 노동조합이 ‘아저씨’들만의 조직이라고 생각하여 외면한다면 노동조합은 언제나 ‘아저씨’들의 것으로 남을 테다. 실제로 민주노총 내부에서 분투하고 있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그러한 것처럼, 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노동조합 안에서 설치고 부딪히고 싸웠으면 좋겠다. 노동조합에 있는 모든 노동자들이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