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페미니스트로 살기] 이것은 단지 불편한 자의 불평이 아니다
[그럼에도 페미니스트로 살기] 이것은 단지 불편한 자의 불평이 아니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21.03.10 14:15
  • 수정 2021.03.1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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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세계 여성의 날 릴레이 기고③ 고은하 한국지엠 명예고용평등감독관
고은하 한국지엠 명예고용평등감독관

같은 교육과 다른 처우. 내 안에 차오르는 불편을 어느 정도(?) 참고 40대를 넘어왔다. 그러나 결국 폭발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많은 사람이 ‘선택’이라고 믿는 결혼. 그 선택지를 선택이 아니라 떠밀리듯 한 이후였다. 그리고 닥친 험난한 현실, 육아!

육아는 그저 엄마 된 여자들의 의무였다. 해내지 못하면 책망받고, 세상 아이들의 모든 문제란 온통 엄마 탓인 양 모두 그 엄마를 향해 손가락을 꺼내 들었다. 나와 우리는 그 당연한 의무에 다시 이름을 붙이고 문제로 삼았다. 아름답고 당차게! ‘독박육아’, 이토록 명확한 단어를 만들어 이름 짓고 나니 그 단어의 힘으로 육아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

어린이집 등원은 엄마가, 하원은 아빠가 하는 2021년이 내게도 왔다. 거저 얻은 것은 아니다. 복직 후 3년이나 지난 후에 이뤄진 일상 투쟁의 결과였다. ‘복직한 엄마’란 혼자서 출퇴근 앞뒤 시간을 촘촘하게 나눠 계획을 세우고 아이 돌봄에 대한 대책 마련을 끝낸 사람이다. (이 대책의 주체는 ‘독박육아’를 하지 않는 가정이라도 엄마다.)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을 가득 담은 기사가 넘쳐난다. 이젠 맞벌이라면 으레 독박육아가 아닌 “함께 육아”를 하고 있는데, 이런 기사만 보면 세상은 여전히 “저 여자는 저런 페미스런 얘기를 또 한다”고들 한다. 심지어 55년생인 나의 엄마는 “그 정도도 안 하고 엄마가 되려 했느냐”며 책임감이 부족하고 이기적이라며 역정을 내신다. (심지어 딸의 출근을 돕는 성실한 사위를 한껏 칭찬하시며.)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은 누구의 몫인가 묻는다면, 여전히 그건 여성이다. 수많은 일상은 여전히 여성의 책임이거나 혹은 권한을 주는 척하면서 떠미는 책임이다. ‘알아서 하라’며. 바꿔 말하면 일상의 민주화는 여전히 아주 먼 얘기라는 것이다.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일해본 사람이라면 아주 잘 안다. 일의 책임자란 전체를 기획하고, 진행 상황을 점검한 다음, 혹시 놓친 부분이 없는지 챙겨야 하고, 일의 마무리까지 확인해야 한다. 책임자란 일이 많은 사람이다. 맞벌이를 하면서 같이 ‘바깥일’을 하고 있지만, 가정의 일은, 집안일은 여전히 여성이 ‘책임자’여야 한다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다.

학교와 어린이집은 여전히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달려오지 못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바로 달려오지 않는 엄마는 야박하고 아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엄마로 치부하면서, 자연스레 아빠에게 연락할 생각은 떠올리지 못한다. 아직은 그렇다.

40대 사무노동자, 엔지니어 그리고 아들딸을 둔 엄마. 평범한 어느 집의 막내딸이었던 나는 지금, 그럼에도 페미니스트다. 나는 내 아이들이 가정과 사회의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길 바란다. 사회에서는 건강한 구성원이자 자기 성취를 향한 주체로! 가정에서는 그저 생활비를 분담하고 일은 독박쓰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자와 더불어 가정의 주체가 되어, ‘함께 육아’를 생활로 받아들이고 살길 바란다. 그리하여 인생에서 소중하고 귀한 그 시간을 오롯이 누리길 바란다. 그리고 나는 내 배우자가 배제되는 차별을 당장의 편리함으로 외면하다 뒤늦게 집 밖을 헤매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갈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불편한 자의 문제 제기가 아니다. 더불어 삶의 다양한 입장을 살피고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성의 있는 실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