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페미니스트로 살기] 여자로 태어나서 반백 년을 훨씬 넘어 살고 있지만
[이 나이에 페미니스트로 살기] 여자로 태어나서 반백 년을 훨씬 넘어 살고 있지만
  • 참여와혁신
  • 승인 2021.03.12 00:35
  • 수정 2021.03.12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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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세계 여성의 날 릴레이 기고⑤ 이경옥 민주노총 서울본부 여성위원장
이경옥 서비스연맹 사무처장
이경옥 민주노총 서울본부 여성위원장

나는 일곱 남매의 맏딸로 4명의 여동생과 2명의 남동생이 있다. 아들을 간절히 바라셨던 부모님은 딸 넷(첫째 딸은 돌전에 병사)을 내리 낳으셨고, 기다리고 기다렸던 남동생 둘은 중간에 태어났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아들 욕심에 밑으로 딸 둘을 더 얻으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대부분의 산모가 집에서 아기를 낳을 때였는데, 남동생이 태어났던 아침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엄마의 산통은 새벽부터 시작되었고, 아들이 태어나야 한다는 집안 분위기 때문에 가족들은 긴장감으로 숨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엄마를 위해서 기도했다. 남동생을 꼭 보게 해달라고…. 아기 울음과 함께 ‘아들이다!’라는 소리에 박수와 환호를 질렀다. 나도 남동생이 생겼다는 안도감에 학교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 후로도 동생들은 어김없이 2년마다 태어났다. 살림 밑천인 딸들은 친구 대신에 동생들을 돌보는 일이 일상이 되었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 하신 엄마의 가사를 도와드렸다. 남동생을 돌봤던 셋째 딸, 내 여동생은 어린 나이에 집안의 아들인 남동생을 챙겨야 하는 중책을 맡았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두 살 터울 장남에게 치이며 다섯 딸 중에서 제일 차별을 받았던 딸이 되었다.

시골에서 살던 큰 집 사촌 언니들은 어려운 시골 살림에 학교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서 가발 공장 일과 슈퍼 계산원을 하면서 큰 집의 살림 밑천이 되었던 것에 비하면, 우리 다섯 딸들이 느낀 아들과의 차별은 배가 부른 소리 같았다.

딸 부잣집 부모님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있는 내가 시집도 못 갈까 걱정이 태산이셨다. 여기저기에 큰딸의 중매 자리를 알아보셨다. 나는 아버지 지인이 소개해주신 신랑감 맞선을 만난 지 40일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는 25살로, 지금 생각하면 빨리 결혼한 것 같지만 그 시절 결혼적령기를 넘기면 안 된다는 양쪽 부모님들의 작전이 아니었는지 싶다.

나는 장녀라는 이유로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엄하게 자랐지만, 시집가서는 속 깊은 맏며느리 소리를 들었다. 그 얘기는 반대로 붙임성이 없다는 표현이기도 했지만, 시부모님을 20년간 모시고 살면서 터득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시집도 친정과 마찬가지로 아들에 대한 사랑은 흘러넘친다. 시아버님은 손이 귀해서 몇 대를 독자로 내려온 가난한 집안의 작은 아들로 집안 살림이 어려웠다. 첫째 손 위 시누이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에 다니면서 시집의 살림 밑천을 만들었고, 둘째 손 위 시누이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잘나가는 은행에 취직해서 남편 대학교 학비와 용돈을 보탰다. 절절한 딸들의 희생을 얘기하시면서 아들을 꼭 낳아야 한다는 부담을 주셨다. 태어난 첫애가 딸이라 부담은 컸지만 독하게 마음을 먹었고, 둘째가 아들로 태어날 때까지 애를 낳을 수 없다는 단호한 생각을 했다. 고맙게도 아들이 태어나서 그동안의 맘고생을 털어냈다.

1999년 나는 생각지도 못한 가장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생계를 이어갈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40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내가 젊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육아로 일자리를 가질 수 없었다면, 아이들도 커서 일을 할 수 있는 적기임에도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여자들의 슬픈 현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외국계 대형마트에 입사하고 나는 여성노동자로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러나 현장은 녹록지 않았다. 젊은 남성 관리자들이 나이 많은 여성들에게 막말하고, 성희롱 발언을 하며 무시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남자 과장의 “나이 많은 여자 순으로 자르겠다”는 말에 분노가 폭발해서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매년 노동조건과 임금 조건을 향상시키는 투쟁으로 현장을 바꿔 나갔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만들어내는 투쟁도 만들어 냈다.

여성의 일자리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소중한 일자리다! 그동안 여성들은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으며 자식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러나 딸들은 집안의 살림 밑천이 되어 집안을 일으켰고, 결혼해서는 자식을 위해 일터로 나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 일터는 대부분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차별을 받고 살았지만, 우리 여성들은 질기게 버티며 살아냈다!

이제 우리는 당당한 여성노동자다! 여성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여성의 연대로 세상을 바꾸자! 소중한 우리의 딸들이 더 이상 차별을 받지 않고 성평등한 세상에서 살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나는 아직도 투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