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페미니스트로 살기] “나는 살아남은 건설노조의 페미니스트다”
[어떻게든 페미니스트로 살기] “나는 살아남은 건설노조의 페미니스트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21.03.11 15:18
  • 수정 2021.03.11 15: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주노총 세계 여성의 날 릴레이 기고④ 김미정 건설노조 경기중서부건설지부 부지부장
김미정 건설노조
경기중서부건설지부 부지부장

‘성평등 세상이 가능할까!’ 요즘 이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나이 52세. 건설노조 20년, 건설노조 여성부지부장, 결혼 9년차, 이제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여덟 살 딸아이의 엄마.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집에 계신 부모님 찾아뵙는 것도, 안부 전화를 드리는 것도 소홀한, 나이 들어 낳은 딸이 5개월도 안 되었을 때부터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기고 노조 일에는 누구보다도 열성이었던 사람이 나다.

처음 건설노조에서 활동할 즈음엔 ‘여자가 무슨 건설노조를 하느냐’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말을 듣지 않게 된 것 같다. 그만큼 건설노조에서 커리어가 쌓이고 노조 일에는 막힘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직이 거의 되지 않았던 시기의 초기 조직가로서 조직과 투쟁, 교육, 선전, 총무, 기획, 정책 모든 일을 해야 했다. 일요일도 없이 일하는 건설 현장은 황무지와 같아서 조직하는 일은 항상 흥미로웠고 불의를 보면 전의를 불태우며 종횡무진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 20년차 활동가가 되었고 조직도 많이 성장했다. 전문업체와의 단체협약으로 건설현장에 노동시간이 정해지고 임금인상도 매년 할 수 있게 되었다. 노동조합의 상근직도 일요일은 쉬는 게 당연해졌고 토요일이 휴일이 된 지도 몇 년이 흘렀다.

나는 이따금 ‘건설노조 생존 여성 활동가’라고 나를 소개한다. 그만큼 건설현장과 노조는 여성이 공존하기에 어려움이 많은 곳이다.

초기 건설노조에는 여성이 많지 않았다. 조직 활동을 하는 경우도 드물었고, 채용되어 일해도 근속연수가 짧고 이직률도 높았다. 현장 또한 여성이 드물게 일을 했지만 거의 보조적인 역할이었고 차별과 성희롱은 일상적이었다. 건설 현장과 건설노조는 그야말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건설노조 활동을 하면서 토목건축 노조에 여성들이 조직되기 시작한 것은 5~6년 전이다. 그 힘든 건설 현장에서 기능을 습득한 여성들이 일하면서 현장과 노조에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수면 위로 올렸다. 좀 더 정확히는 몇 년 전 미투가 터져 나오던 시기와 건설노조의 여성 조직화가 맞물리면서 상승작용이 있었다고 해야 맞을 거다.

일상적인 성희롱을 겪으면서도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했던 지난시기의 여성노동자들과는 다른 건설 현장 여성노동자의 모습이 만들어지고 있다. 아줌마, 언니, 이모, 누님, 어이 등의 이름 없는 노동자에서 ○ 목수님, ○○○ 씨 등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한발 한발 걸음을 떼고 있고 이것이 젊은 청년 여성노동자들이 현장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그리고 건설 현장이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을 만들어 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갈 길은 아직도 멀다. 정말 성평등이 가능할까를 계속 곱씹게 된다. 여성사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몇 년 전부터 조직은 조금씩 변해서 여성위원회가 신설되고 여성사업이 일상적으로 집행되는 조직이 되었지만, 오히려 여성사업을 시작하기 이전에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벽을 지금은 느낀다.

성평등을 말할 때,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말할 때, 성폭력 방지를 말할 때, 여성들의 권리를 말할 때 느껴지는 불편함과 이질감이 그것이다. 아마도 내가 이전에 명예남성이어서 그랬나 보다. 나도 모르게 그들과 동일시하고 여성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한 켠에 접어두고 살아왔던 시절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몰랐나 보다.

이제 내가 잊고 지냈던, 망각하고 살고 싶었던 내 자리를 다시금 깨닫는다. 내가 여성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내 앞에 펼쳐진 장애물과 장벽을 하나씩 넘으며 가야 한다. 성평등 세상이 언제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의 딸과 동시대를 사는 여성들과 함께 살아갈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향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