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섭창구단일화 10년, 살아남은 노동조합들①] 금속노조 청우지회, “창구단일화가 노동자가 함께 사는 길 막는다”
[교섭창구단일화 10년, 살아남은 노동조합들①] 금속노조 청우지회, “창구단일화가 노동자가 함께 사는 길 막는다”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1.07.04 10:00
  • 수정 2021.07.0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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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할 기본권, ‘내 권리’ 책임감으로 10년 버텨
작년 말 교섭권 획득, 정당한 요구도 할 수 없는 현장 분위기 바꾸기가 항후 과제

올해 시행 10년을 맞은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제도는 법의 취지와는 정반대로 노동조합 활동을 억압하는 수단을 회사에게 선물했다. 노동조합의 ‘교섭할 권리’를 효과적으로 박탈한 것이다. 수많은 노동조합들이 교섭창구단일화제도 아래서 ‘깨져’ 왔다. 그러나 강한 놈이 사는 게 아니라 끈질긴 놈이 살아남는다. 격언처럼 전해져 오는 이 말을 몸소 증명해낸 노동조합이 있다. 교섭창구단일화 10년,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교섭권을 되찾은 노동조합들을 만났다.

[인터뷰] 노태현 금속노조 청우지회 지회장

6월 2일 국회 앞에서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 폐기 농성장에서 노태현 금속노조 경주지부 청우지회장을 만났다.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노태현 금속노조 청우지회 지회장을 만났다. 지난 6월 2일 국회 앞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 폐기 금속노조 전국순회 농성장에서였다. “사실 지회장으로서의 자질은 별로 없어요.” 노태현 지회장은 다소 수줍게 인터뷰의 운을 뗐다. 웃을 때 눈이 보이지 않고, 동그랗고 선한 얼굴을 가진 그는 보기보다 ‘끈질긴’ 사람이었다. 13년 전인 2008년 11월 18일 청우지회 설립부터,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로 교섭권이 뺏기는 상황, 그리고 10년 만에 교섭권을 다시 찾아오는 과정까지 그는 노동조합에 꿋꿋이 남아 있었다. 그로 하여금 무엇이 복수노조라는 상황에서도 노동조합을 하게 했을까.

 

들통 날까봐 잡지도 못한 그때

청우는 경주 외동공단에 자리한 자동차 머플러를 만드는 현대자동차 2차 하청업체다. 노태현 지회장이 청우에 입사한 건 2006년. 당시만 해도 노태현 지회장은 “노동조합의 ‘노’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2~3일에 한 번씩 철야 근무를 해도 몸을 갈아 넣는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돈을 더 많이 번다고 생각할 때였다. 젊기도 했고 “일하는 데 있어서 두려움이 없기도” 했다. 한 달에 600시간씩 일하는 게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의 파장이 청우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가장 먼저 절감됐다.

“철야 하고 야간 또 들어가고. 이런 식으로 일이 계속 있는데도 임금이나 여러 복지가 삭감됐죠. 한 번은 야간 근무를 하는데 당시 동료 중 한 명이 물을 먹고 탈이 났어요. 돈 들어간다고 상수도를 안 깔아줬거든요. 지하수를 먹다가 탈이 난 거예요. 그랬는데 응급구호도 안 하고요. 이런 게 누적되다가. 안되겠다. 노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노동조합에 대해서 문외한이었어요.”

다행히도 노조 결성 초기 주도자 중 한 명은 자동차 부품업체 다스에 친척이 있는 사람이었다. 금속노조 다스지회와 연이 닿아 2008년 9월부터 노동조합 결성을 비밀리에 준비했다. 들킬까 홍보도 쉽지 않았다. 잇따른 노동조건 악화에 떠나는 동료들에게 “우리가 노동조합 만드니까 기다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제가 입사할 때 직원이 220~230명 정도 됐어요. 그런데 임금이 삭감되고 복지가 없어지고 여러 가지 안 좋으니까 스스로 나가더라고요. 2008년도 5월부터 노동조합을 만들 생각이 있었고, 9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준비 과정에서 나가는 동료들한테 ‘노동조합 만들 거니까 기다려 달라’는 이야기를 못했어요. 들통 나면 안 되니까 떠나는 걸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서 인원이 그 당시에 100명대로 확 줄었어요. 이후에는 조금씩 외주화가 되더라고요. 지금은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더 많은 구조에요.”

 

2년 만에 빛바랜 단체협약

2008년 청우지회 출범 당시 노동조합 가입대상 35명 중 31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2009년 9월에는 단체협약도 체결했다. 2010년 교섭에서는 회사에게 이듬해부터 금속 중앙교섭에 참여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2011년 교섭은 지지부진했다. 2011년 7월 회사는 청우지회와의 교섭을 지연하다가 복수노조법이 시행되자마자 창구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청우지회는 그렇게 2년 만에 교섭권을 잃었다.

“교섭하는 도중에 노동부에서 창구단일화 절차를 다시 밟으라고 했어요. 그래서 교섭하다가 넘어간 거죠. 협박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일이 다 있었어요. 관리자들한테 할당이 떨어진 거예요. 금속노조 탈퇴시키고 기업노조 가입시키라고요. 심지어는 조합원 아내한테 가서 ‘내가 취직시켜줬는데 이럴 수 있냐. 자르겠다’고 협박을 한 적도 있어요. 반대로는 선물을 하기도 하고. 할당된 인원한테 적극적으로 가입하게 했죠. 성공한 사람들은 회사 내에서 큰소리 치고 다니고. 성공 못한 사람은 회사 사장한테 욕먹고.”

현행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제도 아래서 조합원이 한 명이라도 적은 소수노조는 제대로 된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회사가 교섭할 노동조합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태현 지회장은 “창구단일화하는 건 문제가 없는데, 절차 과정 속에서 너무나 비리가 생긴다”고 말한다.

“우리가 교섭 요구를 하면 교섭창구단일화 절차를 들어가잖습니까? 그러면 청우지회에서 교섭을 요구했으니 교섭에 참가할 노동조합은 일주일 동안 신청을 하라고 해요. 조합원 수를 가지고 마지막 날 밤 12시까지 어떤 노동조합과 교섭을 할 거냐 판단을 하죠. 그런데 밤 12시까지니까 우리 인원수를 받아보고 회사가 작업을 하는 거예요. 민주노조가 15명이고 어용노조가 6명이다. 그러면 회사가 인원수를 맞춰줘요. 이의신청을 해도 지방노동위원회에 올라갈 때까지 한 달 정도 걸리는데 그동안 회사에서 서류조작을 다해요. 이전부터 노동조합에 가입한 것처럼 조작을 다 하는 거예요. 사실 지노위는 서류의 진위에 관한 판단을 안 해요. 최종적인 판단만 하니까요. 그래서 맨날 계속 그냥 탄압받고 교섭권 뺏기고 하는 거죠.”

 

공장 설비가 농장에

교섭권이 없는 노동조합은 임금을 포함한 전반적인 노동조건을 회사와 논의하지 못한다. “임금도 따로 올려줬어요. 노동조합 가입 못하게 따로 불러서요.” 31명에 이르렀던 조합원 수가 점차 줄어들어 6명에 지나지 않게 된 적도 있다.

“저 같은 경우는 진급에서 누락이 됐었죠. 제가 반장급 관리직를 맡았었는데 다른 사람한테 넘기고 승급 시키고요. 그렇다보니 지금도 계속 최저임금을 받아요. 제가 처음에 용접사로 들어갔는데 일반직이랑 똑같이 대우하고요. 그걸로 항의를 많이 했는데 저에 대해서는 아직도 바꾸지 못했어요. 다른 분은 풀어서 제대로 받게 했는데.”

노태현 지회장이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가장 황당했던 순간은 5년 전이다. 회사에서 다른 계열사 공장에 일부 설비를 이전시켰다. 청우지회 조합원이 많이 작업하던 설비였다. 그런데 설비 이전으로 물류비가 크게 늘어나자 다시 설비를 경주로 옮겨왔다. 하지만 설비는 공장이 아닌 인근 농장에 있었다.

“우리가 일하는 라인을 잡았어요. 그러니까 제품이랑 설비랑 맡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화성으로 차에 실어 보냈어요. 그런데 2차 벤더 단가가 워낙 싸니까 물류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거예요. 물류비 때문에 다시 경주로 가져다 둔 거죠. 미련한 짓이죠. 그런데 그걸 어디다 가져다 뒀느냐. 우리 모르게 어느 농장을 빌려서 설비를 가져다 뒀더라고요. 농지에는 공장은커녕 건물도 못 짓게 하잖아요? 문제제기하러 동사무소에 갔더니 마을 어르신이 먼저 이야기하고 있더라고요. 얼마 안 있다가 불법 건축물로 판명 나고 철거하고 보상 해주고.”

 

13년 전 노태현 지회장의 모습. 2008년 11월 18일 청우지회 설립보고 대회 현장이다. ⓒ 금속노조

회사보다 조합원하고 싸우는 게
더 힘들었어요

노동조합을 한다는 이유로 회사 생활은 돈도 안 됐고 고됐다. 그렇다고 노동조합 활동이 수월한 건 아니었다. 그보다 어려우면 어렵지 쉽지 않았다. 악조건 속에서도 노동조합이 조합원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도 정작 조합원이 이를 거부하는 경우도 많았다. 노동조합이라는 우산이 조합원에게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것이다.

직장인 개인의 입장에서 ‘더 나은 회사 생활’을 위해서 회사의 말을 듣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고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노태현 지회장에게는 그보다 아픈 게 없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수밖에 없는 복수노조 사업장의 소수노조는 내부의 갈등도 일어나기가 너무나 쉬웠다.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조합원인데도 불구하고 회사의 이야기를 듣고 탈퇴한다고 협박도 있었고. 그렇게 힘들게 싸웠는데 ‘그래서 한 게 뭐있냐’ 이런 소리도 듣고요. 회사나 다른 노동조합 조합원들한테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안 그러는데 우리 노동조합 조합원에게 들었을 때 너무 상처를 많이 입어요. 아프다고 해서 산재를 받을 수 있게 만들어두니까 조합원이 일방적으로 전화해서 취소시킨 적도 있고요. 한 번은 2공장이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때인데, 관리자로 가는 조합원한테 회사가 출퇴근을 자비로 해결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회사에 이야기해서 출퇴근 버스나 유류비 지원을 받게 했는데 일방적으로 자기가 자차 타고 다니기로 합의를 한 거예요. 그런 마음의 상처가 많죠. 일 만들어두면 파토 나고 일 만들어두면 파토 나고. 저는 사실 회사랑 싸우는 거보다 조합원이랑 싸우는 게 더 힘들었어요.”

그럼에도 노태현 지회장이 노동조합을 끝까지 지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도 청우를 벗어나서 다른 회사에 갈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그는 간단히 ‘책임감’ 때문에 눌러앉게 됐다고 했지만, 그가 말하는 책임감은 사뭇 깊었다. 노동조합의 문을 처음 열었던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책임감도 있었지만, ‘노동조합을 할 수 있다’는 ‘나의 권리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다.

“사실 갈등도 되게 많았어요. 지금은 탈퇴했는데 당시 지회장이 회사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조합원 보호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제가 너무 힘들기도 하고, 아는 형님한테 소개도 들어와서 나가려고 했었죠. 간담회에서 ‘그냥 탈퇴하느니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잘해보자고 조합에 가입하라고 해놓고 왜 혼자 도망을 가냐’고 하더라고요. 그 소리 들으니까 못 가겠더라고요. 그렇게 눌러앉게 됐죠.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니까 회사랑 싸우는 게 아니라 조합원이랑 싸우고 있더라고요.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10년 동안 떠나지 않은 데에는 책임감도 있었는데 굴복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권리를 굴복하는 그 순간에 너무 비참해지더라고요. 저도 외면하고, 조합원도 외면할 때도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싸웠죠. 그 속에서 위로도 주고 위로도 받고. 그러다보니 10년이 흘러갔어요. 하하하.”

 

10년 만에 찾은 교섭권
기쁨보다는 부담이 앞서

“조합원이 6명이었어요. 워낙에 노노갈등이라든지 여러 문제가 생기면서 조직 확대를 못하겠더라고요. 저도 그 당시에 마음이 상하기도 했고요. 경주지부에서 와서 조직화해야 한다고 설득했어요. 그래서 10명 정도 가입을 시켰죠. 그러고 나서 교섭창구단일화를 한 번 더 했는데, 그때도 회사가 우리 인원보고 대거 가입시켜서 졌어요.”

매번 지기만 했던 청우지회는 작년 12월 진행한 교섭창구단일화 절차에서 교섭대표노동조합으로 인정받았다. 10년 만의 쾌거였다. 조합원 3명 차이였다. 기업별 노동조합에 가입해있던 원청 파견 직원의 마음을 돌렸던 것이 결정적인 변수가 됐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노동조합에 가입하겠다는 것이었다.

“3명이 원청에 파견 가 있었어요. 회사에서 압력을 넣어서 가입을 못하게 했는데, 이번에는 그분들이 불이익이 와도 가입하겠다고 해서 저희들이 최종적으로 이겼죠.”

노태현 지회장에게 10년 만의 승리는 기쁨이기보다는 부담이었다. 버티기는 어떻게 버텼는데 “어떻게 바로잡아 나갈 것인지”가 고민이었다. 열악해진 노동조건과 더불어 ‘미래차 전환’도 고민이었다. 청우가 생산하고 있는 머플러는 전기차 시대에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자기 권리에 둔감해진’ 현장의 분위기를 어떻게 전환시킬지가 앞으로의 고민이다.

“부담이 많이 됐어요. 고용도 불안하고 여러 상황들이 많이 안 좋은데, 이를 어떻게 헤쳐 나갈까. 그동안 만들어둔 단협은 관인도 없고 회사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돼있더라고요. 이거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 고민이 컸어요. 사람들이 관성화 돼있다고 해야 하나요?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요구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당연한 권리인데도 불구하고 본인들이 다 감수하려고 하고요. 그리고 마후라(머플러)가 소멸되는 시점에서 전환돼야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일자리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까. 지금도 고민하고 답답해요. 회사는 돈 없다고 가만히 있고 일이 줄어드는 건 자꾸 눈에 보이고. 우리가 경영을 하면 투자도 하고 그랬을 텐데. 쉽지 않은 싸움인 거 같아요.”

 

금속노조가 6월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교섭창구단일화 폐기'를 촉구하는 선전전을 벌였다. ⓒ 금속노조
금속노조가 6월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교섭창구단일화 폐기’를 촉구하는 선전전을 벌였다. ⓒ 금속노조

노동조합 제역할 못하게 하는
교섭창구단일화는 폐기가 답

노태현 지회장은 약 2년 전부터 지인들과 함께 스터디를 꾸려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다. 여러 입문서를 보는데 1년, 자본론 1권을 보는데 1년이 걸렸다. 경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서도 품안에는 자본론 2권이 있었다. “재미없어요. 하하하. 너무 지루하고 너무 힘들어요.”

적지 않은 나이에 그가 공부를 시작한 건 명확한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여럿이 함께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대안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 그는 공부한다. 노태현 지회장은 “조금 손해 보더라도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지 혼자 사는 길을 찾으면 무조건 망한다”라는 경험칙으로 함축해 설명했다. 이 지점에서 교섭창구단일화 제도는 노동자들이 ‘함께 사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제도다.

“노동조합으로 제 역할을 못하게 만들어놔요. 노동조합으로서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 이런 거를 아예 주장을 못하게끔 만들어둔 게 교섭창구단일화제도라고 봐요. 그래서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