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긴 했는데, 교섭은 안 되고…
만들긴 했는데, 교섭은 안 되고…
  • 박석모 기자
  • 승인 2008.12.0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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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불참·제도 미비…풀어야 할 숙제 산적
일각에선 “차라리 기업별로 돌아가자” 회의론도
[이슈 인 이슈] 심층진단 산별노조 ① 위기의 산별노조

산별노조
가야할 길, 쉽지 않은 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한 때는 그랬다. 노동조합 운동 한다는 사람치고 입에 ‘산별노조 건설’을 달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산별노조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2008년 현재 대한민국 노동조합은 산별이 대세다.

하지만 이 와중에 슬그머니 회의론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일부 조합원들은 “대체 산별노조가 해준 게 뭐 있냐”고 되묻고 있다. 돈은 돈대로 가져가면서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얘기까지 심심찮게 들린다. ‘본전 생각’ 난다는 얘기다.

원죄는 ‘산별 만능론’에 있다. 산별만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릴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준 활동가들이 제대로 된 산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왜’ ‘어떻게’는 거세되고 ‘언제’ ‘무엇을’만 남은 산별 논의는 밑천을 드러내고 있다.

튼튼한 동아줄인줄 알았던 산별이 알고 보니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산별노조가 ‘절대 진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유용하고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산별노조라는 동아줄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본인들 스스로가 직접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는 걸 잠시 잊은 때문이다.

2008년 산별노조가 어디에 서 있는지 진단해 봤다.

 

금속노조는 2008년 산별중앙교섭을 시작하면서 “올해는 반드시 완성차가 참여하는 산별중앙교섭을 성사시키겠다. 만약 완성차에서 중앙교섭에 나오지 않는다면 눈 올 때까지라도 투쟁하겠다”며 산별중앙교섭 성사를 목표로 내걸었다.

그로부터 7개월 가까이 흐른 11월 5일 금속노조는 금속산업사용자협의회와 ‘금속노사 산별중앙교섭 조인식’을 가졌다. 그러나 이날 조인식 자리에 완성차업체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11월 5일은 아직 눈이 내리기 전이었다.

산별교섭을 진행하고 있는 산별노조는 현재 민주노총 소속의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와 한국노총 소속의 금융노조 등 3개다. 많은 노동조합들이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들 3개 노조의 어깨는 무겁다. 다른 산별노조들에 비해서 산별교섭을 먼저 시작했고, 산별교섭의 상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 어려운 점은 애초부터 산별노조로 출발했던 독일 등 외국과는 달리 기업별노조에서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기업별노조 체계에 익숙해져 있는 조합원들과 사용자들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도 함께 풀어야 함을 의미한다.

보수를 표방하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2008년, 각 산별노조는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 참여와혁신 포토DB

산별노조 왜 했나?

완성차 노동조합들의 산별전환으로 금속노조가 ‘15만의 산별노조’로 거듭난 지도 2년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 산별노조에 어울리는 산별교섭은 정착되지 않았다. 산별교섭의 파트너인 사용자들, 특히 완성차를 중심으로 한 대기업들이 중앙교섭에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금속노조는 2007년의 ‘확약서’를 근거로 완성차업체들에게 중앙교섭 참가를 촉구했지만, 완성차업체들은 사용자단체 가입과 중앙교섭의 구조 및 의제 등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라며 불참 입장을 고수했다. 금속노조의 압박에도 완성차업체들은 완강하게 버텼다.

중앙교섭 참가 여부를 놓고 금속노조와 완성차업체들의 줄다리기가 길어지던 6월말, 민주노총은 ‘쇠고기 총파업’을 결정하고 이에 대한 찬반투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현대차지부 등 완성차지부 게시판에는 회사와 임단협 말도 못 꺼낸 상태에서 파업 찬반투표가 말이 되느냐는 불만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불만은 고스란히 산별노조에 대한 ‘회의’로 연결됐다. 산별중앙교섭에 발목이 잡혀 정작 회사와는 임단협을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각선교섭을 통해 중앙교섭 참가 여부에 대한 의견접근안이 마련된 후 현대차지부는 이에 대한 승인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부교섭에 돌입했다. 현대차는 2008년에 임금협상 외에도 주간연속2교대제 등 중요한 사안이 걸려 있었기에 더는 교섭을 미루기 힘든 상황이기도 했다.

현대차지부의 교섭에서도 주간연속2교대제 실시형태와 시기를 놓고 논란이 벌어져 일부 대의원들이 교섭위원들의 교섭장 진입을 막아서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과정을 거쳐 4월에 시작된 교섭은 9월이 지나서 타결됐다.

교섭이 타결된 후에도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방안과 관련된 현대차 조합원들의 불만은 2008년 임단협 과정에서의 불만과 겹치면서, “이럴 거면 산별노조 왜 했나? 차라리 산별노조 탈퇴하고 기업별노조로 돌아가자”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교섭엔 참가, 대화는 소극적

보건의료노조는 산별중앙교섭-현장교섭의 2단계 교섭구조를 가지고 있다. 보건의료 노사는 교섭을 거쳐 지난 9월 12일 중앙교섭 잠정합의에 이르렀다. 이후 각 지부별로 현장교섭을 진행했다. 현장교섭은 대부분 신속하게 마무리됐으나, 일부 사업장의 경우 현장교섭이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11월 13일로 예정돼 있던 산별협약 조인식은 보건의료산업사용자협의회의 파기로 무산됐다. 사용자협의회는 지부교섭(현장교섭)이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어 조인식 연기를 통보했다. 그리고 산별교섭이 중앙교섭과 지부교섭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런 폐해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보건의료산업에서는 금속산업과는 달리 사용자단체 참가 여부는 문제가 아니다. 교섭을 위임하더라도 모든 사용자들은 사용자협의회에 참가하고 있다. 그렇다고 사용자협의회가 산별교섭에 적극적인 것은 아니다. 올해 산별교섭도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중앙노동위원회 조정으로까지 이어졌다.

올해 보건의료 노사의 산별교섭에서는 필수유지업무제도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불과 3년 전에 직권중재를 경험했던 보건의료노조는 필수유지업무 노사자율교섭을 주장했다. 보건의료 노사가 여기에 합의하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을 거쳐야 했다.

이 외에도 미국산 쇠고기 병원급식 반대, 의료민영화정책 폐기, 병원인력 확충, 의료기관평가제도 개선 등 보건의료산업이 풀어야 할 문제가 쟁점으로 등장했고, 사용자단체 법인화, 산별효력확장제도, 산별최저임금 도입, 산별연대임금 확보 등도 주요한 쟁점이 됐다.

어느 것 하나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어서 올해 보건의료노사의 산별교섭은 더욱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말도 꺼내기 전 몰매부터 쏟아져

금융노조는 아직 산별교섭을 마치지 못했다. 지난 5월에 시작된 교섭은 아직까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외부 환경도 금융 노사의 자율적인 교섭에 장해물이 되고 있다. 금융 노사가 교섭을 하고 있던 도중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터졌다. 위기는 금방 전 세계로 확산됐고, 한국에서도 금융부문에서부터 위기가 나타났다.

정부에서는 은행 등 금융권에 대한 재정지원을 이야기하면서 역으로 금융권의 자구책 마련을 종용했다. 금융기관 종사자들의 고액연봉에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각 은행들은 임원의 연봉을 삭감하고, 임금인상을 자제한다는 등의 자구책을 내놓았다.

금융노조로서는 임금협상에 대해 말도 꺼내기 전에 매부터 맞은 꼴이 됐다. 실제로 은행장들은 금융노조와의 임금협상을 앞두고 임금동결을 선언해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현재 금융 노사는 단협 사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의견접근을 이뤘지만 임금에 대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타결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올해 금융노조의 임단협에서는 임금 외에도 쟁점이 즐비하다. 이미 작년에 합의한 대로 올해부터 사용자단체를 구성해 교섭에 참여하기로 한 ‘사측’은 사용자단체 구성의 전제조건으로 현재 1년으로 돼 있는 단체협약의 유효기간을 2년으로 연장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금융노조는 이를 수용할 수 없다며 맞섰지만, 결국 단협 유효기간을 2년으로 연장하고 내년부터 사용자단체를 구성해 교섭에 임하는 것으로 잠정합의에 이르렀다.

또 근무시간과 관련해서도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사용자들이 은행 영업시간을 오전 9시로 1시간 당기자고 요구한 데 대해 금융노조는 초과근로시간 단축을 위해 강제퇴근 등의 조치를 먼저 마련하라고 받아쳤다. 결국 논란 끝에 내년 2월 1일부터 은행 영업시간을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로 조정한다는 데에 합의했다.

산별 노사관계,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들 산별노조는 건설과정에서 이미 적잖은 아픔을 겪었다. 이들은 98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이미 획득했던 권리를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 그런 어려움이 없었다면 이들이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것은 훨씬 더 늦어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 앞에는 아팠던 건설과정보다 몇 배 더 힘든 과제가 남아 있다. 산별 노사관계를 정착시키는 것은 산별노조를 건설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다. 산별노조 건설과정에서는 자기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관건이다.

반면 산별 노사관계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교섭파트너인 사용자들을 설득해 자리에 앉혀야 한다. 또 정책과 제도가 산별 노사관계에 부합하게 만들려면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정부를 설득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산별 노사관계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문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산별 노사관계 정착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지금까지 산별교섭이 진행됐던 과정을 살펴보면 금방 드러난다. 15만의 산별노조인 금속노조는 사용자들의 불참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산별교섭의 파행을 경험해야 했다. 보건의료노조가 산별노조를 설립하고 나서 산별교섭을 성사시키기까지는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금융노조는 각 지부 대표자들을 ‘지부장’이 아닌 ‘위원장’으로 부를 만큼 산별노조의 위상을 강화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이들 외에도 공공서비스노조, 운수노조 등은 이미 산별노조를 설립해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아직 본격적인 산별교섭을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서도 산별노사관계를 정착시키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을 찾아볼 수 있다.

산별노조로 전환하려는 흐름이 대세로 자리 잡은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 걸맞게 산별노사관계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더욱 많은 땀이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