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가전 방문점검원, ‘표준계약서’로 업계 ‘룰’ 만든다
생활가전 방문점검원, ‘표준계약서’로 업계 ‘룰’ 만든다
  • 정다솜 기자
  • 승인 2022.07.26 17:23
  • 수정 2022.07.26 1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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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가전통신노조 ‘가전제품 방문점검원 증언대회’ 열어
기울어진 위임계약으로 벌어지는 부당한 노동실태 지적
올 하반기 ‘최소한의 보호 장치’ 표준계약서 쟁취 투쟁 예고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dsjeong@laborplus.co.kr
26일, 가전통신노조가 ‘가전제품 방문점검원 증언대회’를 열었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dsjeong@laborplus.co.kr

생활가전 렌털업계 방문점검원들이 표준계약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특수고용직인 이들은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는 근로계약이 아닌, ‘계약 자유의 원칙’이 적용되는 민법상 위임계약을 회사와 맺고 일한다. 회사가 내미는 계약서에 사인할 수밖에 없는 계약상 상대적 약자인 이들에게 ‘최소한의 보호 장치’인 표준계약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가전통신서비스노동조합(위원장 이현철, 이하 가전통신노조)은 26일 ‘가전제품 방문점검원 증언대회’를 열고 이같이 밝혔다.

쉬운 계약해지+짧은 계약갱신
일상적인 고용불안

생활가전 렌털업체들은 계약 특성상 노동자와 짧게 계약하고, 쉽게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일상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이성대 가전통신노조 코웨이 코디코닥지부 부지부장은 “최근 강원도 A지국장은 조합원이 SNS 대화방에서 자신에게 반발하는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200여 개의 계정을 뺀 일이 있었다. 노조가 투쟁해서 계정을 복구하고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았다”며 “이는 위임계약서가 매달 갱신돼 회사가 관리자들에게 매달 계정 이관을 무기로 코디들을 통제할 권한을 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두일 가전통신노조 SK매직MC지부 부지부장은 “MC(SK매직 방문점검원)들은 회사로부터 ‘강제해촉 서류’ 한 장을 받으면 계약이 종료된다”며 “나도 강제해촉 당한 적이 있지만 다행히 사전에 준비했던 내용 증명 덕분에 일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만약 이렇게 대처하지 못했다면 바로 해고당했을 것”이라고 했다. 

계약을 해지당하는 이유와 절차도 노동자들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이성대 부지부장은 “위임계약서에는 70여 가지 금지조항이 있는데 현실에 맞지 않는 내용이 있다. 예를 들어 판매인의 고객정보 확인 행위 금지조항이 있는데 고객정보를 확인하지 않고는 점검장소로 이동할 수 없다”면서 “또 업무해약 조항마다 경중을 가려야 하는데도 징계 시 조항마다 다른 비중을 두는 게 맞는지 징계 당사자에게도 알려주지 않아 알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비대면 전략 강화로
고용불안 커져 

이들은 일정 수준 이상 소득을 보장을 받지 못하는 어려움도 호소했다. 이는 비대면 시대에 발맞춰 생활가전 렌털업체들이 자가관리형 제품 판매로 전략을 빠르게 전환하면서 노동자들이 더 크게 체감하는 우려이기도 하다.

가전통신노조가 지난해 4월 코디코닥 1,118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자가점검 정수기 등 기술개발로 인해 응답자의 84.3%(매우 그렇다 45.4%+그런 편이다 38.9%)가 고용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수당되물림 등
부당한 제도에도 무력

업무에 필요한 비용 지출도 부담이다. 김정원 금속노조 LG케어솔루션지회 지회장은 “200 계정을 기준으로 평균 180만 원의 수수료를 받지만 거기에서 차량유지비, 유류비, 식대, 헛걸음 등 비용을 합치면 우리에게 남는 금액은 130만 원 정도 될 것”이라며 “요즘처럼 기름값이 고공행진하는 시기에는 일할수록 손해인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성대 부지부장은 수당되물림 제도를 지적했다. 이는 고객이 렌털 계약 후 1년 이내에 반환하거나, 렌털료를 5회 연체하면 코디코닥이 이미 받은 영업 수수료를 회사가 빼가는 제도다. 이성대 부지부장은 “고객의 사정을 코디가 통제할 수 없는데 고객의 사유를 코디가 연대해 책임지라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했다. 

류혜선 SK매직MC지부 사무국장은 책임이행 보증금 문제를 비판했다. 류혜선 사무국장은 “입사 후 회사가 책임이행 보증금 명목으로 매달 10만 원씩 10개월간 떼간다”면서 “그런데 최근 전산에서 공제내역을 확인해 보니 120만 원이 공제됐다. 동료 중 누구는 100만 원, 누구는 110만 원이었다. 이 돈으로 회사가 뭘 하고 있는지 최소한 공개해야 한다. 더구나 이 보증금이 있어서 우리는 퇴사해도 되물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고객이 제품을 반환하는데 왜 MC가 돈을 토해야 하나”라고 말했다.

일하다 아프거나 다치면 대부분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김정원 지회장은 “LG는 살균케어 서비스를 하기 때문에 살균기를 무조건 지참해야 한다. 정수기 살균기만 3kg이다. A9이라는 무선 청소기, 전동드릴 등을 합치면 10kg”이라며 “무거운 점검도구와 반복되는 작업 동작 때문에 대부분 매니저들은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다가 퇴사하지만 이를 산재로 인정받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 가전통신노조
가전통신노조는 지난 7월 2일  ‘가전방문점검원 표준계약서 쟁취 투쟁 선포대회’를 열었다. ⓒ 가전통신노조

왜 표준계약서인가?

가전통신노조는 계약상 약자라서 벌어지는 방문점검원들의 노동실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표준계약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현익 서비스연맹 법률원 변호사는 “표준계약서가 제정된다면 방문서비스 노동자들에게 최소한 ‘이 정도는 보장해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표준이 생기는 것”이라며 “이를 통해 수많은 방문서비스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보호장치를 획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전통신노조는 방문점검원들을 위한 표준계약서에 △일방통보 계약해지 금지 △위임계약 연 단위 자동갱신 △인사·징계위원회 노조 참여 △관리계정 갑질 봉쇄 △정기 건강검진 등이 보장돼야 한다고 했다. 

이런 내용이 담긴 표준계약서를 만들기 위해 가전통신노조는 올 하반기 투쟁을 계획하고 있다. 이들은 오는 8월 안에 표준계약서 초안을 마련해 국회의원, 고용노동부를 비롯한 관련 정부 담당자 등과 국회 토론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또 방문점검원들의 처우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8월 10일부터 방문점검원 표준계약서 제정에 동의하는 10만 서명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물론 표준계약서는 이행 강제성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가전통신노조는 이런 여론화 과정 등을 거쳐 만들어진 표준계약서가 단체교섭에서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되고, 장기적으론 방문점검원을 보호하는 법 제정의 단초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표준계약서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도 중요하다. 

강병찬 가전통신노조 정책실장은 “방문점검원에게 표준계약서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흐름을 만드는 투쟁을 바탕으로 표준계약서가 만들어질 것”이라며 “따라서 표준계약서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표준계약서에 준하는 단체협약을 현장에서 만들어가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강병찬 정책실장은 “표준계약서는 사회적 합의에서 나온 정부의 안이기 때문에 기업들이 단체교섭에서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이런 표준계약서라도 있어야 단체교섭에서 노조가 근거로 제시할 수 있고, 장기적 과제인 법 제정까지 이끌어가는 흐름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