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시간만 노동시간? 대학 강사가 퇴직금·처우개선비 요구하는 이유
강의시간만 노동시간? 대학 강사가 퇴직금·처우개선비 요구하는 이유
  • 임혜진 기자
  • 승인 2023.05.09 05:49
  • 수정 2023.05.09 0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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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교수노조 “처우개선사업비 지원 중단돼 강사 생계도 어려워져...
고등교육 정상화돼야 교육 질 향상, 강사 처우 개선에도 도움 된다”

[리포트] 대학 강사 노동시간은 강의시간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해 2월 대학 강사제도 전면 개혁 요구하는 비정규교수노조 결의대회 ⓒ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지난해 2월 대학 강사제도 전면 개혁 요구하는 비정규교수노조 결의대회 ⓒ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지난 1월 대학 강사의 강의시간만 소정근로시간으로 인정된다는 서울고등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에 따라 소송을 제기했던 강사 11명의 소정근로시간은 15시간 미만으로 산정돼 연차휴가수당, 주휴수당 지급 청구를 인정받지 못했다. 근로기준법은 소정근로시간이 주 15시간 이상인 노동자에게 해당 수당들을 지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학 강사들은 반발했다. 강의 준비, 학사행정 등 업무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2003년 서울지방법원 판결에서 최초로 반영된 바 있다. 대학 강사의 노동시간은 준비시간을 포함해 강의시간의 3배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 판결에 의해 주 15시간 미만 강의하는 강사도 노동법상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강의시간이 최소 5시간 이상이면 세 배수를 곱해 주 15시간을 충족하게 됐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례는 없지만, 지난 20년간 이 같은 법리를 적용한 하급심 판결은 여러 차례 나왔다.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위원장 박중렬, 이하 비정규교수노조)에 따르면 2020년부터 노조에서 공식적으로 퇴직금 지급 소송을 제기했고, 현재는 400여 명이 소송에 참여 중이다. 비정규교수노조는 “판사들의 판단에 따라 퇴직금, 연차휴가·주휴수당 등의 지급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며 “대법원 판결로 관련 기준을 확정하기 위해 소송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비정규교수노조는 지난 판례(강의시간의 3배를 노동시간으로 보는 것)를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강사 노동 특성을 고려해 모든 대학 강사들에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또 전임 교수 등과 다를 바 없이 방학 중에도 강의 준비, 연구 등을 수행하는 강사들을 위한 처우개선비도 지속적으로 확대 지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의보다 더 필요한 준비·평가시간
“학생 지도, 행정업무 등 강의 외 업무 많아”

지난해 4월 영국 부커상 국제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저주토끼》 저자 정보라 작가는 같은 달에 퇴직금 및 주휴·연차수당 등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연세대가 노동시간을 강의시간으로 한정해 주 15시간 미만 노동자로 간주하고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자, 정보라 작가가 이에 반발하며 소송에 나선 것이다.

정보라 작가는 2010년부터 약 11년간 연세대학교에서 러시아어·러시아문학·러시아문화 등을 강의했다. 그는 강의 계획, 시험 출제 및 감독, 평가, 성적 입력 등 강의 외 업무를 고려하면 실제 노동시간이 1년에 1,200시간,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40시간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퇴직금 지급 요건을 충족하기에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비정규교수노조도 학교가 대학 강사의 실제 노동시간을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론과 실기 등 교과목의 여러 특성, 과제물 부여와 피드백 정도, 시험문제의 종류와 평가 방식 등이 노동시간 산정에 고려돼야 한다고 했다. 또 신규 강의 개설, 강의 노트 또는 동영상 제작·제공, 토론식 수업, 수강생 규모와 외국인·장애인 학생 포함 등 여부에 따라 노동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대학 강사들을 주 15시간 미만 노동하는 초단시간노동자로 보고 각종 수당 등을 지급하지 않으려는 시도는 반노동적이자 차별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강의시간의 3배를 노동시간으로 보는 판례에 따라 주 5시간 이상 강의하는 강사들에게만 퇴직금이 지급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5시간 이상 또는 그 미만을 강의하는 강사들의 노동을 양과 질의 측면에서 명백하게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비정규교수노조는 “3시간 강의를 담당해도 6~9시간을 담당하는 강사 이상의 연구와 학생 지도를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 전공 분야에 따라 수반되는 노동 형태는 말 그대로 천차만별”이라며 “법원의 5시간 기준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제도와 정책을 보완해 모든 강사에게 그에 비례한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 기본 퇴직금을 정하고 강의시수에 비례하여 적립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비정규교수노조 결의대회 ⓒ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비정규교수노조 결의대회 ⓒ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방학 중 연구 등 업무 계속
“처우개선비 늘리고 강사 생계 지원해야”

2019년 8월부터 고등교육법 개정안(일명 ‘강사법’) 시행에 따라 강사도 교수·부교수·조교수 등과 같은 교원에 포함됐다. 고등교육법 제15조에 따르면 교원의 임무로 학생 교육·지도, 학문 연구 등이 있다.

교원 신분의 강사는 주로 학기 중에 강의, 방학 중에 강의 계획 수립·성적 처리·연구 등을 수행한다. 같은 시기 개정·시행된 고등교육법 제14조2 제4항은 강사에게 방학 중에도 임금을 지급하고, 이 경우 임금수준 등 구체적인 사항은 임용계약으로 정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법적으로 강의 외 노동을 인정하고 임금까지 지급할 것을 명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강사법 개정에 따라 교육부는 2019년부터 3년간 한시적으로 ‘강사 처우개선 사업’을 실시하며 강사 처우개선비 명목의 방학 중 임금, 퇴직금을 국고로 지원해왔다. 방학 중 임금은 강사 대상으로 강의료 2주분(연간 최대 4주분), 퇴직금은 주 5시간 이상 강의한 재직기간이 1년이 되는 강사 대상으로 강의료 4주분을 산출해 지급했다. 처우개선비 소요액의 100%를 공립대학, 70%를 사립대학에 지원했다. 이 사업은 강사법 개정으로 인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한시적 사업으로 도입됐고 지난해 1년 연장됐다. 올해부터는 정부 예산 편성이 안 돼 사업이 폐지됐다. 학교에서 온전히 처우개선비를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다.

비정규교수노조는 강사 처우 개선 사업 예산 확대가 필요하다며 반발했다. 당장 자체 재원으로 처우개선비를 충당해야 하는 대학들이 재정 부담에 따라 강사 구조조정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처우개선비(방학 중 임금)로 강사의 강의료 2주분(연간 최대 4주분)만 지급된 것도 너무 적다는 비판이 나왔다. 비정규교수노조는 해당 2주분이 학기 준비를 위한 1주와 성적 처리를 위한 1주로 제한한 것으로, 강사의 나머지 방학 기간 중의 연구 활동을 교육부가 인정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고등교육법상 강사 업무의 연구가 명시된 것도 있지만, 실제로 강사들은 임용·재임용되려면 일정 정도의 연구 성과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전임 교원처럼 연구 활동을 지속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해, 권용두 비정규교수노조 사무처장은 “전임 교원만큼의 엄격한 요건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강사 임용 시에도 일부 연구 성과를 본다”면서 “강사에 따라 연구 성과는 전임 이상인 경우도 많다. 강사들이 연구에 들이는 시간이나 노력이 전임에 비해 부족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임과 강사의 임금 등 처우 수준이 심각할 정도로 크게 차이 나선 안 된다”고 말했다.

강사 처우 개선 중단되면 강의 질 저하
“학생과 교원을 위한 고등교육 정상화 정책 필요

비정규교수노조는 처우개선사업비를 두고 강사의 최저 생계를 보장하는 ‘민생’ 예산이라고 강조했다. 강사가 ‘교육·지도 및 연구’라는 교원의 임무를 다하려면 무엇보다 생활이 안정돼야 하는데, 처우개선비 미지급에 따라 강사의 방학 중 생계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질 좋은 강의를 들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생계 및 고용 불안 등에 따른 강사의 연구 능력 저하, 강사 구조조정에 따른 전임 교원들의 초과 강의 부담 등이 발생할 수 있고, 이는 곧 학생들의 교육환경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권용두 사무처장은 강사 처우 개선에 앞서 국가가 고등교육을 책임지는 자세가 우선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교육기본법에 유·초·중등교육과 함께 고등교육도 공공성이 있는 학교 교육에 포함된다고 적혀 있지만,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 지원이 적어 강사들의 처우도 더 불안하다는 것이다. ‘OECD 교육지표 2022’에 따르면 2019년 고등교육의 GDP 대비 정부재원 공교육비 비율은 0.6%로 OECD 평균보다 낮았다. 반면 초·중등교육의 경우 3.4%로 OECD 평균보다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3월 교육부가 내놓은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ISE, Regional Innovation System & Education) 사업은 “국가의 고등교육책임 방기”가 될 수 있다고 비정규교수노조는 우려했다. RISE는 지자체의 대학지원 권한 확대 및 관련 규제 완화를 통해 지자체 주도로 대학을 지원해 지역과 대학의 동반 성장을 추진하는 체계라고 교육부는 설명했다. 이에 대해 비정규교수노조는 GDP 대비 정부의 고등교육 예산이 적은 상황에서 대학을 관리하는 능력과 경험이 부족한 지자체에 관련 예산을 지원하면 고등교육의 질은 더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올해 비정규교수노조는 RISE 등 윤석열 정부의 고등교육정책에 대한 비판과 함께 고등교육 예산 확대 등을 통한 고등교육 정상화, 강사처우개선사업비 예산 복구 등을 요구해 나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