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일부 업종·직종 ‘주52시간’ 허문다
정부, 일부 업종·직종 ‘주52시간’ 허문다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3.11.14 00:37
  • 수정 2023.11.15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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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2시간제 때문에 어렵다’ 답한 사업주 14.5%에 그쳐
대통령실 “노사와 충분한 대화로 개선 방안 마련할 것”
노동계 “인력문제 해결 위한 근본 대책 나와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2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주52시간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사업주가 14.5%에 그친 것으로 고용노동부(장관 이정식) 조사결과 나타났다. 한 주 평균 노동시간은 40시간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주 최대 52시간제(법정근로시간 40시간+연장근로시간 12시간)가 산업 전반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다.

정부는 ‘전 사업장에 주52시간 이상 근무’를 허용하겠다던 지난 3월 계획에서 한발 물러선 ‘근로시간제도 개편’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노사가 필요로 하는 일부 업종·직종에 한해 주52시간 이상 근무를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최대 근무시간도 당초 주69시간보다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개편 방안은 제조업, 건설업, 운수·창고업과 설치·정비·생산직, 보건·의료직, 연구·공학기술직에 도입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연장근로시간 단위를 현행 1주일에서 월·분기(3개월)·반기(6개월)·연(12개월)까지 확대해 특정기간 노동시간을 늘리는 방식이다.

노동부는 노사가 원할 경우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선택하는 방안을 노사와 함께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구체적인 내용도 노사와 함께 마련해 갈 계획이다. 대통령실도 “(근로시간제도 개편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할 수 없다”며 “노동 현장 실태를 보다 면밀히 살펴보면서 노사 양측과 충분한 대화를 거쳐 많은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개선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노동부 조사로 주 최대 52시간제가 이미 상당 부분 정착됐고, 그 효과도 드러난 상황에서 불필요한 제도 개편을 시도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미 장시간 노동이 고착된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건강을 위협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야근 등으로 발생할 ‘공짜노동’에 대한 방안이 미흡하다는 문제제기도 잇따른다. 이날 사회적 대화 복귀를 선언한 한국노총은 정부의 설문조사를 두고 “국민 혈세만 낭비했다”고 지적했다. 설문조사 문항에 주52시간제를 허물기 위한 의도가 다분하며 이를 토대로 한 근로시간 개편 방안도 동의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민주노총은 “한국의 장시간 노동이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유연근무제 활용마저 규제라며 연장근로를 더욱 쉽게 늘릴 수 있는 방안을 요구하는 기업들의 민원을 정부가 수용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주52시간제 대체로 정착
장시간 노동 이유는 “고질적인 인력난”

노동부는 13일 ‘근로시간 제도개편 대국민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총 6,030명을 대상으로 지난 6월부터 8월까지 실시했다. 이날 발표된 조사결과는 ‘노사 정책 수요 조사’와 ‘국민 인식 조사’ 두 가지다. ‘노사 정책 수요 조사’는 최근 6개월간 노동시간 실태와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에 대한 노사 의견을 파악하려는 취지로 진행됐다. 상용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 노동자 3,839명과 사업주 976명을 대상으로 조사가 이뤄졌다. 근로시간 개편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에는 만19세 이상 국민 1,215명이 참여했다.

‘노사 정책 수요 조사’에 따르면 주 최대 52시간제는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정착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 주 평균 근로 일수와 시간에 대한 답변은 각각 5.0일(노동자 97.5%, 사업주 96.3%), 40시간(93.8%, 94.7%)이 월등히 높았다. ‘초과근로가 없다’는 응답은 노동자 52.7%, 사업주 57.9%로 모두 절반을 넘었다. 초과 근로시간이 발생할 경우 평균 시간은 주3.2시간이었다.

주 최대 52시간제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한 사업주는 14.5%(142명)에 그쳤다. 다만 업종별 차이는 있었다. 사업시설 관리 및 임대 서비스업(32.6%), 제조업(27.4%), 수도(24.4%) 등이 그나마 높은 축에 속했다.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한 사업주의 절반가량(54.8%)은 주52시간을 초과한 연장근로가 발생했다고 답했다. 주52시간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때로는 ‘외부의 긴급한 발주 등 예측하기 어려운 업무량 변동(73.6%)’, ‘휴가·이직 등으로 인한 일시적인 인력 부족(60.4%)’ 등이 꼽혔다. 대응 방법으로는 ‘포괄임금을 활용한 연장근로 운영(39.9%)’, ‘추가 인력 채용(36.6%)’, ‘수주 포기(30.6%)’ 순으로 답했다.

응답자의 절반가량은 주 최대 52시간제로 장시간 노동이 감소했다고 봤다. 노동자 48.5%, 사업주 44.8%, 국민 48.2% 등이다. 장시간 노동이 감소하지 않았다는 응답은 노동자 16.1%, 사업주 15.0%, 국민 23.0%였다. 장시간 노동이 발생하는 이유로 노사 모두 ‘고질적인 인력난 및 추가 인력 채용부담’과 ‘예측하기 어려운 수주, 납품 등에 따른 경영상의 불확실성 대응’을 주로 꼽았다.

더 많이 벌더라도 ‘주52시간 미만’ 선호
‘주52시간 깨면 건강 지키기 어려워’ 지적도

추가 소득을 위해 연장근로를 하겠다고 답한 노동자는 41.7%였다. 업종별로는 제조업(51.2%), 직종별로는 설치·정비·생산직(61.2%)과 연구·공학·기술직(50.4%)이 비교적 높았다. 다만 이 경우에도 선호하는 최대 근로시간은 ‘주52시간 미만’이 55.7%로 가장 많았으며, ‘주60시간 미만(25.5%)’이 뒤를 이었다.

연장근로관리 단위 확대에는 동의한다는 비율이 높았다. 노동자 41.4%, 사업주 38.2%, 국민 46.4% 등이다. 확대 단위에 대해선 노사 모두 ‘월 단위’ 선호 비율이 약 60% 수준으로 가장 높았고, ‘분기 단위’가 약 15%로 뒤를 이었다. 다만 노동계는 의도된 답변을 유도하는 설문 문항으로 왜곡된 통계가 도출됐다는 문제제기를 했다. 가령 “평소보다 바쁠 때 더 일하고 그렇지 않을 때 적게 일하여 연장 근로시간을 주 평균 12시간 이하로 하는 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동의한다’는 대답이 높게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게 한국노총의 주장이다.

근로시간 제도 개편 시 우선적으로 고려사항으론 ‘일한 만큼의 임금 보장’과 ‘확실하게 쉴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 순으로 많이 꼽혔다. 3순위는 다소 차이를 보였다. 노동자들은 ‘임금 감소 없는 근로시간 단축’을, 국민․사업주는 ‘노동자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할 근로시간제도 개편 시스템 마련’을 꼽았다.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 시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장할 방안은 ‘1주 최대 근로시간 한도 설정(노 55.5%, 사 56.7%)’, ‘11시간 연속 휴식(노 42.2%, 사 33.6%)‘ 순으로 비율이 높았다. 상한 근로시간은 노사 모두 75%가량이 ‘주60시간 이내’를 꼽았다. 노동부도 이를 반영한 대책을 세울 계획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근로기준법에 이미 주당 상한 근로시간이 주52시간으로 설정돼 있다.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위해서 주52시간 상한을 지키면 되는 일”이라며 “정부가 나서서 노동자와 국민들을 호도하지 말고 ‘소모적인 논쟁’을 유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연차를 모두(혹은 거의) 사용한다고 답한 노동자는 57.3%에 불과했다. 10명 중 4명은 직장에서 연차휴가를 온전히 사용하지 못한다고 답했다(‘보통’ 포함). 연차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노동자는 ‘인력 부족(43.7%)’, ‘연차 대신 금전 보상 선호(33.1%)’, ‘업무량 과다(27.1%)’, 회사 분위기 또는 동료에게 미안해서(24.0%) 순으로 답했다.

노동부 “설문조사 토대로 근로시간 개편 추진”
노동계 “법정노동시간 위반은 범죄행위”

이성희 노동부 차관은 이날 “주52시간제가 상당 부분 정착되고 있는 반면, 일부 업종·직종에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설문조사 결과를 전폭적으로 수용해 주52시간제를 유지하면서 일부 업종·직종에 한해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추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공짜야근’ 근절에 행정 역량을 집중하겠다”며 “공짜 야근 문제의 본질인 포괄임금을 이용한 임금체불을 뿌리 뽑겠다”고 했다.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지속적인 익명신고센터 운영 ▲맞춤형 근로감독 실시 ▲출퇴근 기록관리 프로그램 무료 제공 등을 제시했다.

이에 한국노총은 “특정 시기에 주52시간을 초과해서 일할 필요가 있다면 현행법상 탄력근로시간제나 선택근로시간제를 활용하면 된다”고 반발했다. 아울러 “법정노동시간은 주52시간도 아니라 주40시간”이라며 “이를 위반 시 2,000만 원, 2년 이하 징역에 처하는 범죄행위이다. 정부는 특정업종·직종 운운하며 범죄행위를 조장 말라”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포괄임금 근절 기획 감독에 대해서는 환영할 일”이라면서도 “그러나 정부는 현장 수용성을 언급하여 포괄임금 금지 법제화는 거부하고 있다. 결국 기업들이 거부하니 못하겠다는 것인데 진정성이 없다”고 밝혔다. 아울러 “설문조사 결과에도 나왔듯이, 정부가 찍은 업종·직종은 인력난 및 추가 인력 채용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며 “인력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 대책이 나와야 한다. 기존 인력을 장시간 노동으로 쥐어짜는 방식이 되어서는 악순환만 거듭될 뿐”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