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조세 체계를 둘러싼 사활을 건 투쟁
[기고] 조세 체계를 둘러싼 사활을 건 투쟁
  • 참여와혁신
  • 승인 2024.01.15 15:18
  • 수정 2024.01.15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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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세은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역사는 보통 세 시기로 구분된다. 자본주의 성립 이후 1930년대 대공황 발생 전까지의 자유방임형 자본주의, 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 말까지 케인스 복지 국가형 자본주의,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세 시기 자본주의의 특징은 그 명칭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러한 특징은 조세 체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처음 자유방임형 시기의 자본주의에서 조세의 역할은 미미했다. 20세기 초 무렵에는 현재 존재하는 조세들이 이미 대부분 도입돼 있었지만,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정도가 약했기 때문에 세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던 조세 체계는 1차 세계대전, 대공황, 2차 세계대전 등을 거치면서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됐다. 전쟁을 치르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재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 집단은 소득과 자산이 넉넉한 중산층과 고소득층에게 더욱 많은 세 부담을 지우는 재원 마련 전략을 선택했다. 이때부터 누진적 소득세, 법인세의 역할이 커지게 됐다.

예를 들어 미국 소득세는 1913년만 해도 두 개의 과표 구간, 최고세율 7%인 단순한 구조에 불과했으나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후인 1918년에는 다수의 과표 구간, 최고세율 77%라는 누진적 소득세로 본격 전환했다. 이는 중산층과 고소득층에게 과거보다 더욱 큰 부담을 안기는 세제개편이었다. 소득세 최고세율은 1944년 94% 수준까지 올랐다. 법인세도 비슷한 경로를 보였다. 미국의 법인세는 1909년에 도입됐다. 도입 당시 일정 규모 이상의 이윤을 벌어들인 법인에만 1%의 단일한 세율을 적용했던 법인세제가 이후 세율이 오르고 구간도 여러 개로 나누어지는 등 누진도가 강화됐다. 1942년에는 6개 구간, 최고세율 40%로 과세했다.

이러한 누진적인 소득세와 법인세 중심의 조세 체계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유지됐다. 전후 복구 및 복지제도 확대를 위해서는 대규모의 재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실시한 누진적 세제 개혁이 이후 복지국가 실현에 기여한 셈이다. 이 사례를 보면 이번 코로나19 위기 시기에 우리나라도 증세를 통해 위기에 강력하게 대응하고 위기 이후 복지 확대로 연결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든다.

그러나 1970년대 내내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 동반) 현상 지속에 따라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를 지배해 온 케인스주의가 퇴조하게 됐다. 영국에서는 대처와 미국에서는 레이건이 집권함에 따라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적 형태로 전환하게 됐다. 이들이 실시했던 정책들은 민영화, 감세, 규제 완화, 세계화 등이었는데 감세 정책이 시스템 전환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레이건은 1981년, 1986년 두 번에 걸쳐 세법을 개혁했다. 핵심적 내용은 대규모 감세였다. 1981년에 소득세 최고세율을 69.13%에서 50%로 낮췄고 1986년에 28%로 낮췄다. 그런데 1986년에는 최저세율을 11%에서 15%로 올리기도 했다. 미국 역사상 최고세율을 낮추고 최저세율을 올린 역진적 개편은 처음 있었던 사건이었다. 이러한 세제 개혁은 래퍼 곡선(Laffer Curve), 즉 세율이 증가하면 처음에는 세수가 증가하지만 어떤 최적점을 넘는 순간 줄어든다는 주장에 기댄 것이다. 하나의 주장에 불과한 래퍼 곡선에 기대어 1986년 세법은 ‘넓은 세원, 낮은 세율(broadening the tax base and lowering rates)’ 원칙에 따라 설계됐다.

이러한 세제 개편이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사에즈와 저크만(Saez&Zucman)은 2019년에 발표한 《그들은 왜 나보다 덜 내는가(The Triumph of Injustice)》 책을 통해 미국의 세제가 대부분의 구간에서는 비례세에 가까워졌고 최상위구간에서는 역진적인 상태가 됐다고 보고했다. 억만장자들의 세율이 더욱 낮은 것은 그들의 소득 대부분이 소득세 과세 대상에서 제외됐고 부자들에게 법적으로 수많은 유형의 면세 혜택을 주기 때문이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인해 조세 정의는 완전히 훼손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흐름은 전세계적으로 비슷했으며 우리나라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조세 제도가 이렇게 역진적으로 변하면 재분배가 약화할 뿐 아니라 소득 분배 자체도 악화한다. 양극화 자체가 심화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약한 조세 제도 아래에서는 동일한 소득을 벌더라도 본인이 더 많은 부분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에 감세 규모가 큰 고소득, 고자산가들이 유리한 지위를 이용해 적극 수익 창출에 나서기 때문이다. 피케티가 《21세기 자본론》에서 회사 고위 임원의 임금은 그들 스스로가 결정하는데 최고 소득세율이 하락하면 임금을 올릴 유인이 강하게 작동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바로 그 사례다.

이같이 조세 체계는 단순한 재분배 수단이 아니다. 생산, 소비, 분배 등 자본주의 전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계급 혹은 계층 간 첨예한 이해관계에 개입하는 핵심 제도다. 가령 증세를 통해 충분한 재원을 마련해 국가가 간병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GDP에서 간병 서비스가 차지하는 생산과 소비는 증가하게 되고 저소득층도 부담 없이 이를 현물로써 누릴 수 있다. 과세를 통해 토지 불로소득을 엄격하게 환수해 공공임대주택 공급에 사용한다면 분배를 개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토지 투기 유인을 억제해 토지가 투기가 아닌 유용한 생산 및 소비 활동에 사용될 인센티브를 강화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복지 증세, 토지 불로소득 환수 과세 등이 사회 전체에 바람직해도 이를 생각하며 기쁘게 조세를 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더구나 상대적으로 많은 세금을 내야 할 고소득, 고자산 계층은 자신들이 가진 영향력을 발휘하며 이에 격렬하게 저항한다. 증세에 저항하고 감세를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맞서야 할 대다수 국민도 세금을 조금만 줄여준다고 하면 무턱대고 좋아한다. 아니 언론이 그렇게 조장한다. 조세 정의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