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의 노동 있는 민주주의] 선명한 투쟁 vs 지혜로운 투쟁
[박상훈의 노동 있는 민주주의] 선명한 투쟁 vs 지혜로운 투쟁
  • 참여와혁신
  • 승인 2024.01.31 08:33
  • 수정 2024.01.3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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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잘 아는 노조 활동가로부터 고민을 들은 적이 있다. “선명 투쟁과 협상・타협 사이에서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면 회색분자로 매도당할 때가 있다. 그런데 선명함을 고수하고 돌아서면 공허할 때가 많다. 그때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하는 복잡한 마음이 든다.” 이런 딜레마는 노동운동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 삶의 본질에서도 비롯되는 바 크다. 따라서 그 고민의 진지함 자체가 우리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

선명 투쟁은 크게 다섯 유형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선명한 투쟁 이외에 ‘달리 행동할 수 없을 때의 선명 투쟁’이다. 이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단호하게 선명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고 하지만, 합리적 요구를 달리 표출할 수 없는 불합리한 상황은 여전히 많다. 그런 상황에서의 선명 투쟁이라면, 고민 없이 선명해야 한다.

둘째는 좀 더 나은 타협과 협상 위치를 확보하고자 하는, ‘수단으로서의 선명 투쟁’이다. 다만 목적(협상과 타협)과 수단(비타협적 선명 투쟁)이 불일치하기에, 투쟁과 협상 사이의 그 좁은 길을 지혜롭게 이끌어야 하고, 무엇보다 조합원과 지도부 사이에 충분한 신뢰가 있어야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셋째는 ‘자신이 옳기 위한 선명 투쟁’이다. 대개는 선명 투쟁을 앞세워 지도부나 다른 정파를 공격할 때 흔히 나타나는 유형이다. 이런 선명 투쟁은 조합원을 위한 것도 아니고, 결실 있는 협상을 위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선명성을 과시하거나 타인에게 선명성을 강박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정파가 더 큰 영향력을 얻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명 투쟁은 상처를 남긴다.

넷째는 급진파의 요구나 주장에 굴복해 준비도, 확신도 없이 ‘이끌려서 하는 선명 투쟁’이다. 비판받기 싫고 공격받기 싫어서 하는 경우라서 일종의 ‘강요된 선명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선명 투쟁은 자칫 해결하기 어려운 막다른 골목으로 조합원들을 이끌 수 있다.

다섯째는 ‘진심으로 모든 것을 걸고 끝까지 하는 선명 투쟁’이다. 대개는 체제 변혁이나 혁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진심으로 타협과 협상은 의미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도덕적으로 고결하고 말과 행동에 있어서 진정성을 중시하는 유형이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필자는 선명함이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더 정의롭다고 보지 않는다. 인간 삶의 복잡함을 선명함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상을 진지하게 마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이해한다. 따라서 선명함과 신념의 힘은 자신의 내면을 이끄는 원리로 삼되, 그것만으로 현실을 움직여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균형 있는 고려가 필요하다. 신념의 선명함 못지않게 현명함과 지혜로움 또한 가치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겠다거나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며, 늘 화내는 표정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일견 신념의 힘을 중시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내면은 공허하고 허망할 때가 많다. 자신을 오래 지켜내지 못한 채, 결국 노동운동을 비난하며 떠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그들은 만사의 이유를 자기 자신이 아닌 것에서 찾는 데 익숙한 사람일지 모른다.

우리는 신념의 힘과 현실적 제약 사이에서 일하는 존재들이다. 회색분자나 타협파로 비난받고 오해될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채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없는 것을 안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진짜 변화를 만들기 위해, 진짜 노력을 할 수 있다. 소리 지르고 남 탓하는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일 아침 좀 더 일찍 나가서 좀 더 설득력 있는 방안을 준비하고자 노력할 수 있다.

현실을 용인할 수 없다며 선명함을 주장하는 사람이 자신의 정의감을 과시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실제 필요한 준비와 노력은 잘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한 번에 완전한 해결은 어렵다. 하지만 꾸준하기만 하면 개선할 수 없는 것도 없다. 꾸준한 노력을 북돋는 기반이 된다면, 약간의 개선이나 타협조차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들은 화내고 떠나는 대신 자신의 과업을 계속하는 사람들이다.

급진주의자보다 점진주의자가 급진적 변화를 성취할 기회를 누린다고 본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가치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혁명의 방법으로 운영될 수 없지만, 혁명보다 더 깊고 넓은 변화의 가능성을 조금씩 열어갈 수 있는, 인간적인 정치체제다. 지난 민주주의의 역사가 그것을 실증한다.

독일의 정치지도자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는 분단된 독일에서 동방정책을 이끈 사민당 총리였다. 1974년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1989년 이루어진 독일 통일의 외교적 초석을 놓은 사람이다. 빌리 브란트는 자신의 정치관을 ‘이상과 현실’이라는 말을 통해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생각은 이상적으로 실천은 현실적으로’라고 했다면 아무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은 현실적으로, 그러나 행동은 이상적으로!”

태도를 결정하기 전에 우리는 현실의 조건을 잘 고려해서 실제 변화가 가능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결정하고 나면 그 뒤 실천은 맹렬하고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 진짜 신념의 힘을 가진 활동가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급진적으로 보이게 하느라 신념의 힘을 허비한다. 그런 사람은 말로만 왈왈댈 뿐, 진짜 문제 앞에서는 뒷걸음질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민주주의자는 타협적인 사람이 아니라 타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이야말로 신념의 힘을 가진 ‘현실적 이상주의자’이고 동시에 현실에서 좌절하지 않는 ‘이상적 현실주의자’다.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은 이런 종류의 실천론이다. 선명한 사람보다 현명한 사람이 존중받는 노동운동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사람만이 선명 투쟁을 할 때를 제대로 알 뿐 아니라, 제대로 선명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