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의 노동 있는 민주주의] 조합원은 자치 능력이 있을까
[박상훈의 노동 있는 민주주의] 조합원은 자치 능력이 있을까
  • 참여와혁신
  • 승인 2024.02.28 18:21
  • 수정 2024.02.28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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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노동조합 활동에 점점 회의적이 된다는 한 조합원으로부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신의 말대로 하면, 민주주의란 일종의 시민 자치 체제다. 그런데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보면 조합원에게 자치 능력이 있는 것일까 하고 자문하게 된다. 대화조차가 힘든 조합원도 많다. 노동조합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가능한가? 조합원 자치로 노조를 운영하는 게 가능할까?” 짧게 대답은 했지만,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로버트 달(Robert A. Dahl)이라는 정치학자가 있다. 20세기 최고의 민주주의 이론가로 평가받는 대학자이다. 1915년 태어나 2014년까지 거의 1백 년의 인생을 살면서 평생 민주주의를 연구했고, 정치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여러 저서를 남겼다.

민주주의란 ‘평범한 보통사람들(ordinary people)의 정치체제’라고, 그는 정의한다. 중요한 것은 이때 평범한 보통사람의 체제라는 표현의 의미가 ‘능력’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에서 자치(self-rule)의 원리가 ‘능력의 있고 없음’으로 이야기된다면, 다수 시민은 자신을 도와줄 후견자나 보호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란 그런 가디언십(guardianship)을 필요로 하지 않는 체제, 혹은 그런 가디언십이 있어서는 안 되는 체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가진 능력은 똑같지 않다. 일반 시민이 정치체제를 직접 운영하고 통치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민주주의에서라면 평범한 보통의 시민을 포함해 누구의 의견도 ‘정치적으로는’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능력과 무관하게 만인은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고 그들이 한 일을 평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에 민주주의는 기초를 두고 있다. ‘능력’이 아니라 ‘권리’가 핵심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주의도 능력과 성과를 당연히 필요로 한다. 하지만 핵심은 개인의 능력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귀족정이나 군주정 나아가서는 권위주의나 전체주의보다 체제의 능력이나 성취의 면에서 민주주의가 더 나은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귀족정이나 군주정은 모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통치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통치를 받는 체제를 가리킨다. 탁월한 혈통을 갖고, 탁월한 교육을 받은 자들이 체제의 운명을 결정하는 체제다. 권위주의나 전체주의 역시 국가 목표나 민족적 이상, 나아가 역사 발전의 법칙을 이해하고 있는 소수의 엘리트나 전위 집단이 체제 운영을 맡는다. 그렇다면 개인이나 집단의 능력에 의존하는 이들 체제가 민주주의 체제에 비해 더 우월한 성취를 보였을까?

그렇지 않다. 경제적으로 더 발전되고 사회문화적으로 더 풍요로운 성취를 이룬 쪽은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군사적으로도 처음에는 전체주의 국가에 밀렸지만 결국 두 차례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것은 민주주의 국가들이었다. 예술적인 성취나 새로운 기술 개발을 포함해 문명적 기준을 더 많이 만족시킨 쪽도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든 쪽도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조합원들의 참여를 늘려 노조를 운영하는 것이 피곤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사사로운 요구를 무책임하게 요구하는 일도 있을 것이고, 편협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민주주의가 언제나 최선인 것은 아니다. 1인이나 소수가 결정하는 것보다 확실히 번잡하고 늘 시끄럽다.

그래도 노조가 있는 게 낫고, 조합원 참여와 조직의 실력을 병행 발전시킬 방법을 찾는 게 좋다. 조합원들의 참여도 어떻게 해야 ‘무작정 참여’가 아니라 ‘책임 있는 참여’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활동이 자유롭고, 학생들의 자율적인 선택을 바탕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도 무책임한 조합원과 학생들 때문에 골머리가 썩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조 없는 경제, 학생 자치 없는 교육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노조가 있다고 회사 생활이 행복해지고 학생 자치가 허용된다고 학교가 더 평화로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더 좋은 노동조합, 더 좋은 학급자치를 위해 노력한 결과가 그들 나라를 민주주의의 선진국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아야 한다.

민주주의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고, 노동조합이 개인 삶의 구원자 역할을 할 수는 없지만, 좋은 정치체제나 좋은 노동조합을 발전시키려 노력하다 보면 인간 개개인의 차원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불합리한 상처나 갈등을 줄여 갈 수 있다. 힘들겠지만 그 길을 가야 한다. 자유로운 참여와 그에 따르는 책임을 어떻게 양립시킬 것인지, 조직마다 나름의 해법을 찾아가야 한다.

개인 의견의 자유와 조직적 결정의 권위를 병행 발전시킬 수 있는 조합원의 참여 문화를 발전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 이상사회가 아니라 이전보다 좀 더 개선된 변화를 조금씩 일궈가는 데 있다. 그런데 그게 가치가 있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희망을 품고 살 수 있다. 헛된 목표를 추구하지 않고, 변화 가능한 범위를 넓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조합원들이 조직을 이끌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나, 분명한 것은 그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선출하고 그들이 일을 잘하는지를 묻고 따질, 평등한 권리와 자유는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 시민들이 정부를 이끌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동의 없이는 그 어떤 통치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괜찮다. 해볼 만하다. 앞서 인류도 자치와 민주주의의 길에서 의미 있는 성취를 이뤘고, 우리도 그래야 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들은, ‘불완전한’ 보통의 사람들이 주권을 행사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가 아니라, 능력의 측면에서 ‘완전함’을 앞세운 사람들이 운영했던 비민주적 체제에서 일어났음을 우리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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