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의 노동 있는 민주주의] 노동이 민주주의와 만날 때
[박상훈의 노동 있는 민주주의] 노동이 민주주의와 만날 때
  • 참여와혁신
  • 승인 2024.01.08 16:25
  • 수정 2024.01.1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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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필자는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학위과정을 마치고 박사 논문을 써야 했을 때, 두 주제를 놓고 고민했다. 하나는 ‘노동’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정당’의 문제였다. 현대 민주주의는 노동과 정당의 두 바퀴로 움직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도교수의 조언으로 후자의 정당 문제를 주제로 정해 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당시로써는 뜨거운 문제였던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왜 지역으로 갈등하는 정당 정치를 갖게 되었나?”는 질문을 다뤘다. 그때 다루지 못한 노동과 민주주의의 문제는 필자에게 늘 아쉬움으로 남았다.

다행히도 학위를 받은 뒤 여러 노동조합의 초청으로 민주주의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돌아보니 매년 10회 정도는 조합원을 상대로 꾸준하게 강의를 했던 것 같다. 필자가 가까이 지내는 인간관계의 한 축도 자연스럽게 전·현직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채우게 되었다. 이번에 연재를 시작하게 된 칼럼의 전체 주제를 ‘노동과 민주주의의 만남’으로 정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간의 강의와 인간관계를 통해 서로 나누게 된 다양한 고민과 대화 덕분이 아닌가 한다.

인간의 역사 전체를 두고 볼 때, 민주주의는 크게 두 유형이 있다. 하나는 대략 2,500년 전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일부가 실천했던 민주주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아테네 민주주의가 있다. 정치학자들은 이를 ‘고대 민주주의’라 부른다. 다른 하나는 17세기 중엽 영국에서부터 시작된 시민혁명의 긴 역사를 거쳐 형성된 민주주의인데, 정치학자들은 이를 ‘현대 민주주의’라 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오늘날 지구상의 100개 이상 국가들에서 실시되고 있다.

고대 민주주의(dēmokratía)는 200년 정도 유지되었다 무너졌다. 그 뒤 1,500년도 더 지나 영어로 ‘democracy’라는 용어가 만들어졌을 때까지, 인류는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잊고 살았다. 이처럼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 민주주의는 시간적 거리만 먼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아주 다른 민주주의였다. 이름만 같은 민주주의였을 뿐, 사실상 완전히 다른 정치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도나 체제 운영의 원리는 물론, 가치와 규범 모두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고대 민주주의자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 민주주의를 보게 된다면, 거의 틀림없이 이게 무슨 민주주의냐고 소리쳤을 것이다. 그러면서 시민들이 직접 입법도 하고, 행정관이나 평의회 의원도 하고, 배심원이 되어 판결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자신들이야말로 ‘질 높은 시민권’ 행사의 기회를 향유했다고 자랑스러워할지 모른다. 반면 현대 민주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출신지·성별·재산 소유 여부에 따라 전체 인구 가운데 대략 6분의 1 정도만 시민이 될 수 있었던 고대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여성이라서 시민이 아니고, 출신지를 문제 삼아 기본권을 박탈하거나, 가난하다고 참정권을 주지 않는다면, 오늘날 이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집회나 결사의 자유와 관련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략 9일에 한 번씩 시민총회를 열어 법과 정책을 결정했던 고대 민주주의자 입장에서, 정당이나 노동조합을 만들어 집단적 요구를 조직하거나, 총회장 밖에서 시위를 벌이는 일은 곧 반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익과 열정이 있는 곳마다 결사체를 조직하고, 요구를 표출하고, 대표를 선출하고, 교섭을 하고, 조정을 거쳐 공익에 가까운 결정을 이끌어 가는 체제를 민주주의라 한다. 노동자들이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만들 수 없다거나, 복수의 정당이 아니라 하나의 정당만 정부가 될 수 있다면, 누구도 이를 민주주의라 말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공무의 담임을 시민들로 하여금 번갈아 맡게 한 고대 민주주의자의 관점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직업 공무원이나 직업 정치인의 존재 역시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종류의 엘리트들에 의한 통치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 고대 민주주의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현대 민주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남성·가부장·중산층 시민들이 공무를 전담할 수 있도록 생산의 역할은 노예(노동자)가, 재생산의 역할은 여성이 전담해야 하는 체제를 민주주의로 받아들일 의향은 없을 것이다. 노예가 있어야 하는 민주주의, 여성과 노동자의 시민권은 허용할 수 없는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기준에서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운동도 정치도 민주주의도 그 시대의 조건에 맞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고대 민주주의를 찬미하거나, 반대로 대의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정보소통기술의 발전을 활용한다면 새로운 직접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많다. ‘직접이냐 간접이냐’ 혹은 ‘대표 없이 시민이 직접 정부를 운영할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중심 문제는 아니다. 고대 민주주의가 더 큰 시민총회장을 만들 기술이 없어서 여성과 노예의 참여를 불허한 것이 아니듯, 여론조사 기법이나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잘 되고 못 되고 하는 문제도 아니다.

고대 민주주의는 그렇게 운영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 나름의 한계가 있었다. 현대 민주주의가 오늘날처럼 발전하게 된 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린 시절 개울에서 물장구치는 것이 좋았다고 해서 어른이 되어 개울가를 찾아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수영을 배우는 것이 나은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성숙한 민주주의의 전망이 노조도 정당도 대의제도 없는 과거와 같은 직접 민주주의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현대 민주주의를 그 가치와 규범, 원리에 맞게 더 잘 실천할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수백, 수천 배 더 가치 있다.

박상훈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한국 지역 정당 체제의 합리적 기초에 관한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정치적 말의 힘》, 《청와대 정부》, 《민주주의의 시간》, 《정치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정당의 발견》, 《만들어진 현실》, 《정치의 발견》, 《혐오하는 민주주의》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소명으로서의 정치》, 《경제 이론으로 본 민주주의》(공역),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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