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의 노동 있는 민주주의] 노조와 정당이라는 양 날개
[박상훈의 노동 있는 민주주의] 노조와 정당이라는 양 날개
  • 참여와혁신
  • 승인 2024.03.27 11:30
  • 수정 2024.03.2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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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어떻게 하면 ‘함께 일하며 협력하는 삶’의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노동 배제적인 풍토에서 벗어나, ‘노조와 기업이 경제 운영의 공동 협력자가 됐을 때의 유익함’을 향유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정치가는 정치가답고 기업가는 기업가답고 공무원은 공무원답고 교수는 교수답게, 자신이 소명으로 삼은 일에 헌신할 수 있을까. 이는 노동운동뿐 아니라 진보, 보수를 떠나 모든 정치가가 책임 있게 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노동은 인간 공동체의 토대이자 기초이다. 땀 흘려 일하고 서로 눈을 맞춰가며 협력하는 것의 보람이 단단하게 자리 잡지 않으면 어떤 인간 공동체도 행복할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협동하는 삶의 가치를 가르치지 못하는 우리의 교육 현실은 그래서 걱정이다. 청소년기에 경험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일에 대한 헌신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노동의 즐거움이다.

알고 지내는 철도 기관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더운 여름날 동료 한 사람이 급하게 차량 정비를 하느라 땀범벅이었다. 때마침 아이 손을 잡고 그 옆을 지나던 젊은 엄마가 아이를 멈춰 세우더니 “너,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라고 하더란다. 그 정비사는 고용이 안정된 공기업 소속에다 결코 소득이 낮은 직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로 범주화된다는 것이 어떤 낙인의 대상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뼈아픈 사례가 아닌가 한다.

학교 교육의 현실에서건 학교 밖의 사회 현실 속에서건, 시민권의 한 내용이 돼야 할 노동의 가치가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개선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노동자들 스스로 결사의 힘을 키우고 이를 선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는 정당들이 책임 있는 역할을 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이를 가능케 하는 원천이고, 앞선 나라들의 경험 또한 이를 실증해주고 있다. 노조와 정당은 민주정치를 균형 있게 이끄는 두 바퀴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만들고 발전시켜야 할까. 강한 군사력을 갖고, 타국의 위협으로부터 덜 취약하고,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 높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강대국이 돼야 할 것이다. 잘 알다시피 보수파들은 이런 지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세계가 국가 간 체계로 이루어져 있는 한 국력의 중요성을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진보파도 외교나 안보, 군사 분야를 다룰 수 있는 역량을 쌓아야 하고, 그 일을 감당할 인재도 키워야 할 것이다.

다양한 일자리와 병원·박물관·공연장이 많고, 의학 기술이나 범죄 수사 능력이 뛰어난 나라를 원할 수도 있다. 세계적인 기업이 많아지고, 물질적인 필요가 잘 충족되는 나라를 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경제 발전의 수준이 높은 사회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 역시 보수파가 중시하는 가치들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진보, 보수를 떠나 누구든 경제를 잘 관리하는 데 있어서 유능함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처럼 나라가 부강해지고 풍요로워지는 것 모두가 중요한 목표이고 지향이겠지만, 민주주의는 그와는 다른 가치를 중시한다.

어느 나라나 민주주의라고 할 때, 공유하는 가치나 규범이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에는 그런 '가치 합의'가 적시돼 있다. 대체로 그 내용은 생명, 자유, 평등, 행복 추구로 수렴된다. 행복의 추구에서 재난과 질병, 범죄로부터의 안전은 핵심 가치다. 그런 점에서 좀 더 자유롭고 건강하고 평등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기본 규범이자 가치라 할 수 있다. 군사 강국보다는 시민이 자유로운 사회, 경제 부국보다는 공정하고 평등한 공동체, 갈등과 적대로 고통을 주고받기보다는 얼굴 붉히지 않고 이견을 말하고 협상과 조정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다원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의 전망이 커져야 민주주의다.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는 나라는 120개 정도 된다. 이들 가운데 빈곤 인구의 비율이 낮고 계층 간 불평등 정도도 낮은 나라는 어디일까. 투표율은 높고 인권 및 자유화 지표도 좋으며 소수자 및 이주민에 대한 권리 부여 정도가 높고 여성 장관 비율도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불법 약물 복용, 10대 임신, 10대 자살, 저체중아 출산율, 정신 질환 발병률, 영양실조나 비만 인구의 비율이 낮은 나라는 어디일까. 후천적으로 계층 상승이 가능한 사회적 유동성이 높은 나라, 즉 기회의 평등 수준이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강력 범죄율과 재소자 비율이 낮은 나라는 어디일까. 요컨대 어떤 유형의 민주주의가 돼야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수 있을까.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노사관계가 좋을수록 그렇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당 정치가 좋을수록 그렇다는 것이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노동조합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성장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용자가 노조를 기업 운영의 동반자로 여기는 변화는 거의 없었다. 노동조합이 시민들로부터 더 인정받고 존중받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노동운동이 지역사회나 시민사회와 분리돼 있다는 것이 오히려 현실에 가까운 진단일지 모르겠다.

정당 정치는 거꾸로 퇴행 중이다. 지금 우리 정당 정치는 진보와 보수 사이의 싸움이 아니다. 노동의 가치를 둘러싸고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와 평등의 문제를 두고 갈등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있는 것은 맹목적인 권력 투쟁이다. 정당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신망을 얻은 사람이 후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존경받을만한 이들이 정치를 하는 것도 아니다. ‘정의가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정의’가 되는 세상이 됐고, 팬덤만 있으면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정치가 되었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정치가 아니다.

정당이 자신들만을 위한 집단이 되면 파당(派黨, faction)이라고 부른다. 정당이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 되면 도당(徒黨, clique)이라고 부른다. 친윤, 친명 같은 파당이나 도당들의 정치를 통해서는 좀 더 평등하고 자유롭고 안전하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방법은 있을 수가 없다. 정당이 정당 같아야 노동의 가치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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