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조직 간 차별성 옅어지면서 ‘민주 대 어용’ 구도 실종
현장조직 간 차별성 옅어지면서 ‘민주 대 어용’ 구도 실종
  • 하승립 기자
  • 승인 2010.08.0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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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 원하는 조합원 성향 변화와 민주파 잇단 패착도 이유
[Close Up] 중간점검-이경훈 집행부를 말하다…② 이경훈 집행부의 탄생, 어떤 의미인가

ⓒ 참여와혁신 포토DB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했던가. 정말이지 판에 박은 듯 닮아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런 ‘데자뷰’를 만들어낸 것은 바로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선거 결과다. 52.56 대 46.98, 하지만 이번엔 승자가 이경훈이었다.”

지난해 9월 25일, 현대자동차지부 임원 선거를 실시간 속보로 전하던 <참여와혁신> 온라인판([15신] 너무나도 닮았지만, 전혀 다른 결과)의 리드문이다.

그랬다. 현대차 조합원이라면, 혹은 현대차노조 선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결선 투표에서 박빙의 승부를 펼치는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지난 선거에서는 결정적으로 승자와 패자가 그간의 결과와는 정반대였다.

이경훈 후보의 6전7기

한 번 복기해 보자. 5대 이영복 위원장 시절 수석부위원장을 지낸 이경훈 후보는 이영복 전 위원장이 회사를 퇴직한 후인 97년 7대 선거에 처음으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아직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이경훈 후보는 18.6%의 득표로 출마한 네 후보 중 가장 적은 표를 받았다. 그 때부터 6전7기가 시작된 것이다.

99년 8대 선거에 출마한 이경훈 후보는 1차 투표에서 34.57%를 얻어 4개팀 중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결선 투표에서 정갑득 후보와 맞서 51.24 대 47.62로 패했다. 2001년 2월 9대 선거는 양자대결로 펼쳐졌다. 결과는 54.1%를 얻은 이상욱 후보의 승리. 이경훈 후보는 45.2%를 얻었다.

이경훈 후보의 ‘악몽’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9대 보궐 집행부의 짧은 임기가 끝나고 2001년 9월 다시 치러진 10대 선거에서도 27.54%로 4팀 중 1위를 기록했지만 결선에서는 47.01%(이헌구 51.99%)로 고배를 마셨다.

다시 도전한 2003년 11대 선거에서는 35.06%를 얻어 5팀 중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결선에서는 또다시 47.9%로 51.1%를 얻은 이상욱 후보에 패했다. 6팀이 출마한 2005년 12대 선거에서도 역시나 1차에서는 30.01%로 1위. 결선에서도 ‘역시나’ 47.53%에 그쳐 당선자는 51.62%를 얻은 박유기 후보가 되었다. 

▲ 이경훈 후보 득표율 추이

매번 1차에서는 1위를 차지하고도 결선에 가면 간발의 차이로 패배하는 이 ‘공식’은 결국 현대차노조 선거의 패턴이 되어 버렸다.

이런 결과는 같은 노선이었던 1, 5대 이영복 위원장으로 인한 학습효과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1대 위원장이었던 이영복 후보는 2대 선거에서 큰 표차로 졌고, 이후 3~4대 선거에서는 결선까지 가서 패했다. 5대 선거 역시 결선에서 정갑득 후보와 맞섰는데, 이때는 1차 선거에 나섰던 다른 민주파 후보들이 얻은 표가 정갑득 후보에게 모이지 않으면서 이영복 후보가 당선됐다.

5대 이영복 위원장 시절 ‘양봉수 열사 분신 사건’이 터지면서 당시 현장조직이었던 한빛과 그 뒤를 잇는 노연투에 대해 ‘어용’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이후 선거에서 조합원들이 결선 투표에서는 ‘민주파’를 지지하는 행태를 보인 것이다.

양봉수 분신 사건은?

   95년 이영복 집행부 당시 부당해고 항의하며 분신

1995년 현대자동차 울산2공장은 당시 신차 마르샤 투입과 관련해 UPH(시간당 생산 대수)를 올리는 문제를 놓고 노사간 갈등이 빚어졌다. 당시 대의원이던 양봉수는 생산라인을 중단시켰고 회사는 양봉수를 해고시켰다.

양봉수는 부당해고라며 복직 투쟁을 벌였지만, 당시 이영복 위원장은 ‘해고자가 아니라 사규를 위반한 면직자’라며 양봉수의 조합원 신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회사 출입을 저지당한 양봉수는 5월 12일 오후 정문에서 경비들과 몸싸움을 벌이다 몸에 불을 붙여 분신했고, 한달이 지난 6월 13일 새벽 사망했다.

양봉수 분신 사건은 조합원들에게 이영복 위원장을 비롯한 현장조직 한빛이 어용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줬고, 이는 상당 기간 해소되지 않았다. 많은 현장 활동가들은 “양봉수 열사 사건이 조합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고 말한다.


조합원의 전략적 선택


▲ 역대 임원선거 결과

이후 두 차례의 선거를 ‘거르고’ 난 후 2009년 지부 3대 선거에 출마한 이경훈 후보는 ‘기어이’ 당선됐다. 이른바 ‘민주파 불패’의 신화가 깨지면서 이경훈 후보의 당선 이유를 분석하는 다양한 견해들이 나왔다.

일부에서는 파업과 투쟁을 전면에 내세운 전투적 조합주의의 몰락이라고 해석한다. 조합원들이 더 이상 투쟁하는 노동조합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이경훈 지부장 당선을 그만큼 큰 사건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민주노조 운동의 상징성을 지닌 대규모 노조 중 이미 현대중공업과 KT노조가 자신들만의 행보를 보이면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있지만, 이들 노조는 민주노총 권역 밖에 있다. 하지만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의 핵심 노조이기도 하고, 노동조합 운동에서의 영향력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친 확대해석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많다. ‘투쟁 피로도’ 문제는 이미 5~6년 전부터 제기되었다. 그런데 지부 1, 2대 선거에서 메이저 현장조직 중 가장 강성이고 왼쪽에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는 민투위가 연속으로 당선된 바 있다. 6대 정갑득 위원장과 7대 김광식 위원장이 민투위의 이름으로 연속 당선됐지만 당시 민투위는 이름만 같을 뿐 조직 노선이 다른 조직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한 현장조직이 연임에 성공한 것은 지부 1, 2대가 처음이다. 따라서 조합원들이 강성 노선을 싫어한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간 현대차노조 위원장과 지부장들이 당선될 때마다 인터뷰를 해왔지만 그때마다 항상 나오는 얘기가 “조합원들이 활동가 머리 위에 있다”는 말이었다.

결국 조합원들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인가를 판단했다고 볼 수 있다. 강성 집행부가 회사와의 교섭에서 성과를 더 낼 수 있다고 볼 때는 강성 집행부를 선택하고, 온건 집행부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는 또 그런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보수화 경향 심화도 원인 중 하나

물론 보수의 외연이 확대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3대 지부장 선거에서 보수파는 두 팀이 출마했다. 12대 선거 이후 2선으로 물러난 이경훈 후보의 뒤를 이어 지부 1, 2대 선거에 출마했던 홍성봉 후보가 이번에도 출마한 가운데 이경훈 후보는 기존의 현장연대를 탈퇴해 전현노라는 새로운 조직으로 출마한 것이다. 그런데도 1차 투표 결과 이경훈 후보가 1만2774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고, 홍성봉 후보는 1만924표로 2위와 박빙의 차로 3위였다.

이에 대해 후보로 나섰던 홍성봉 씨는 “당시 이경훈 당선의 일등공신은 홍성봉이라는 말이 있었다”면서 “3차례 출마로 중간층이 만들어졌고 고정적으로 1만2천표 정도를 받았는데, 이것이 결선투표에서 이경훈 후보쪽으로 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합원의 보수화 경향은 인사노무 부서에서도 인정했다. 한 관계자는 “조합원들의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아무래도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다”면서 “요즘은 지부에서 집회를 해도 동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잘 안 모이고, 또 귀찮고 어렵고 힘든 일은 대의원들이 알아서 하라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닮아가는 현장조직들

이경훈 지부장의 탄생이 가능하게 했던 결정적 이유 중 하나로는 현장조직 간의 차별성이 많이 옅여졌다는 점이 꼽힌다. 이영복 위원장 이후로 민주 대 어용이라는 구도가 확실한 채로 선거가 치러져 왔지만 현장조직 간의 합종연횡이 자주 이뤄지고 서로에게 조금씩 영향을 주면서 닮아 갔다는 주장이다. 한 활동가는 “선거 시기에 나오는 홍보물을 보면 후보 이름을 가려놓으면 어느 것이 어느 후보 진영의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흔히 ‘조합원의 이해와 요구’라고 표현되는 ‘조합원이 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모든 현장조직이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11대 선거를 앞두고 실노회와 노연투의 선거연합 논의였다. 비록 연합 논의가 깨지기는 했지만 그간 민주파 내부에서만 진행되던 연합 논의가 어용으로 치부되던 노연투와도 가능해질 정도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어용이라는 표현이 쓰이기는 하지만 현대차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이제는 실리파, 보수파와 같은 표현이 일반적일 정도로 현장조직간 구분은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민주파, 잇따른 집행부 사퇴로 신뢰 떨어져

또다른 이유 중 하나는 민주파의 잇따른 패착이라고 할 수 있다. 7대 집행부는 정리해고를 수용하면서 불신임투쟁에 휩쓸렸고, 8대 집행부는 광고비 사건으로 불리는 재정비리로 사퇴했다. 또 11대 집행부 시절에는 전임 집행부 임원이 포함된 취업비리 사건이 터졌고, 12대 집행부는 창립기념 선물 비리 사건으로 사퇴했다. 이어 지부 2대 집행부는 주간연속2교대제와 물량이관 등과 관련해 집행부를 배출한 현장조직과 집행부 사이의 갈등으로 임단협 도중 사퇴했다.

이렇게 연이어 문제가 불거지면서 조합원들이 민주파에 대한 실망감을 가졌다는 점도 이경훈 집행부 출범의 한 이유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