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종연횡과 이합집산, 그 어지러운 역사
합종연횡과 이합집산, 그 어지러운 역사
  • 하승립 기자
  • 승인 2010.08.0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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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민실협 시작으로 수많은 현장조직 명멸
정체성보다 집행권 장악 목표만 좇는 것은 문제
[Close Up] 중간점검-이경훈 집행부를 말하다…③ 현장조직을 보면 노조 운동이 보인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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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비슷비슷해 보이고 하도 많아 헷갈리기까지 하는 이 명칭들은 모두 현대자동차 내부에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했던 현장조직들의 이름이다. 각 조직들이 명멸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정확히 몇 개의 현장조직이 활동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현장조직 활동가들에게 물으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10여 개 정도 될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물론 매년 그 10여 개 속에 포함되는 현장조직들의 이름은 상당히 달라지지만 말이다.
 
흔히 현장조직이라 하면 노동조합이라는 대중조직 내의 정파조직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 현장조직은 노동조합 집행권을 장악해 자신들의 정치노선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장조직들이 과연 정파조직이냐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할 수 있다. 집행권 장악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면서 정치노선의 동질성과는 관계없는 이합집산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현장조직도 마찬가지다. 전국적 정파조직과 연계되어 활동하는 조직도 있고, 독자적으로 현대자동차 내부에서 활동하는 조직도 있지만 전국 정파조직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정체성이 모호한 경우가 많다.

이름 외우기도 벅찬 현장조직들

현재 현대자동차 현장조직 중 규모나 영향력 등을 감안할 때 이른바 메이저 조직이라 부를만한 것은 모두 다섯 개다.

우선 전국적 정파 분류의 큰 틀 속에 포함될 수 있는 세 조직이 있다. 국민파의 범주에 들어가는 민주현장(민주현장투쟁위원회), 중앙파 성향의 민노회(민주노동자회), 현장파 경향성의 민투위(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가 이들 조직이다. 민주현장은 정갑득 금속노조 전 위원장, 민노회는 박유기 금속노조 현 위원장, 민투위는 이상욱 9, 11대 위원장 및 지부 1대 지부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한빛(한빛노동자회)-노연투(노동자연대투쟁위원회)-현장연대(현대자동차 현장연대)로 이어지는 보수파 혹은 실리파의 대표조직이랄 수 있는 현장혁신연대(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현장혁신연대)가 있다. 대표 인물은 최근 세 차례 선거에 출마한 홍성봉 씨다. 실리파의 다른 한 축은 전현노(전진하는 현장노동자회)다. 현장연대에서 분화해 규모는 작지만 현 이경훈 지부장을 중심으로 집행부를 구성하고 있다.

현대차노조에는 현장조직 의장단회의가 있는데 이 회의의 구성원은 앞서 언급한 다섯 조직에 평의회(현장노동자평의회)가 포함된다. 평의회는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좌파 블록으로서의 선명성을 바탕으로 각종 사안에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의장단회의에 포함되는 이들 조직 외에 하부영 전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을 중심으로 제2민주노조운동을 주창하는 혁신네트워크, 그리고 좌파 블록의 현장투, 청노회 등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의장단회의에 참여하는 현장조직들을 정치노선에 따라 분류하자면 왼쪽부터 평의회-민투위-민노회-민주현장-현장혁신연대/전현노로 표시할 수 있다.

ⓒ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민실협-민실노-한빛, 현장조직의 기원

현대자동차에 현장조직이 생긴 것은 88년의 일이다. 87년 민주노조 설립 준비를 하면서 임시 집행부에서 위원장을 맡았던 이상범을 중심으로 한 그룹들이 정작 그해 9월 1대 선거에서 이영복 그룹에 패배하면서 88년 9월 민실협(민주노동자실천협의회)을 발족시킨다. 하부영, 전한수, 하인규 등이 중심이 된 민실협은 89년 2대 선거에서 이상범을 위원장에 당선시킨다.

이어서 등장한 것이 민실노(민주노조실천노동자회)다. 김강희, 정갑득 등이 주축이 된 민실노는 ‘학출’들이 조직에 관여했고 민실협에 대해 너무 유연하다고 비판하면서 강성 이미지를 구축하고 2대 선거에 김강희가 위원장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1대 위원장이 된 이영복은 집행부를 중심으로 한빛(한빛노동자회)을 결성하고 이후 6대 선거까지 여섯 차례 연속 출마한다.

이후 민실협이 이상범 중심 조직이 되면서 하부영, 홍영출 등이 민실협을 나와 노사랑(노동조합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하고, 이상범, 김재근, 김회영 등은 92년 현노신(현대자동차노동자신문)을 창간한다.

한빛은 6대 선거까지 이영복을 중심으로 움직이다가 이영복의 퇴사 이후 이경훈을 대표 얼굴로 한 노연투(노동자연대투쟁위원회)로 전화했다. 노연투는 7대부터 12대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이경훈을 위원장 후보로 내세웠지만 모두 실패했고, 2006년 홍성봉을 새로운 얼굴로 해서 현장연대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현장연대는 지부 3대 선거를 앞두고 민혁투 일부와 합쳐 현장혁신연대로 바뀌었다. 이 때 이경훈을 중심으로 한 그룹들은 현장연대를 나와 전현노를 결성했고 3대 지부장 선거에서 당선됐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선거 때마다 달라지는 현장조직들

91년 3대 선거부터 민주파는 뭉치기 시작했다. 91년 명지대생 강경대의 사망으로 촉발된 노태우 정권에 대한 항거 과정에서 대규모 구속, 수배 등 공안정국이 형성되면서 3대 선거에는 현연투(현대자동차연대투쟁위원회), 4대에는 범민련(범민주투쟁연합회) 등이 후보를 내 당선시켰다.

5대 선거에서 다시 한빛 이영복 후보가 당선된 후 6대 선거를 맞아 민주파는 민투위(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결집한다. 당시 민투위에서 정갑득 위원장과 이영희 부위원장, 현노신에서 주용관 수석부위원장, 이성근 부위원장을, 노사랑에서 하부영 사무국장을 내는 선거연합으로 당선됐다.

따라서 현재 존재하는 현장조직 중 가장 오래된 것은 95년 출범한 민투위다. 하지만 당시 민투위는 지금의 민투위에 비해 훨씬 정치적 스펙트럼이 넓었다. 7대 김광식 위원장 시절, 6대 집행부를 구성했던 정갑득 등이 민주노총 초대 권영길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그룹들이 주창했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을 내세우며 민투위를 나와 실노회(현대자동차 실천하는 노동자회)를 결성했다.

실노회는 이후 국민파 그룹을 대표하다가 8대 정갑득 위원장 시절 터진 광고비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의 갈등,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회적 조합주의를 지향하는 실노회와는 달리 반제, 자주, 반미에 중점을 둔 그룹들이 2001년 자주회(현장활동 혁신을 위한 자주노동자회)를 결성하면서 갈라섰다. 국민파 전국 조직인 전국회의 소속의 두 현장조직으로 존재하던 실노회와 자주회는 2007년 민주현장으로 다시 뭉쳤다.

민노회는 2005년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7대 김광식 위원장이 민투위 소속으로 당선된 이후 현장조직인 민투위와 집행부가 된 김광식 위원장 사이에 상집 인선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졌고, 결국 7대 집행부를 중심으로 민투위를 탈퇴하고 미래회(미래를 여는 노동자회)를 결성한다. 미래회는 현지사(현장을 지키는 사람들), 현노신과 통합해 민노투(평등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노동자투쟁연대)를 발족시키고 10대 위원장 선거에서 당선됐다. 민노투에 합류했던 구 미래회 그룹과 현대정공 출신 중심의 동지회(현대자동차 민주노동자동지회)가 합쳐진 것이 민노회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현장조직과 집행부 관계도 갈등 요인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 현장조직들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이합집산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합집산은 선거와 연관돼 있다. 집행권 장악을 위해 뭉쳤다가 흩어지고, 다시 다른 조직과 합쳐지기를 반복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각 현장조직들이 대외적으로 표명했던, 혹은 기존에 가져왔던 노선들이 희석되기도 한다. 11대 선거를 앞두고 실노회와 노연투가 선거연합 논의를 하면서 그간 ‘어용’의 테두리에 갇혀 있던 노연투의 이미지가 달라졌다. 물론 다른 민주파 현장조직들은 실노회를 맹비난했지만 ‘어디도 노연투와 연합하려 했다더라’ 등의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기도 했다. 이런 과정이 3대 지부장 선거에서 이경훈 지부장의 당선이 가능하도록 한 밑바탕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장조직과 집행부 간의 갈등도 여러 현장조직들이 생겨난 원인 중 하나다. 7대 집행부 당시 당선자를 낸 민투위와 집행부 사이에 갈등이 생겨 결국 당선자를 배출한 조직에서 불신임 운동을 벌였다. 지부 2대 윤해모 집행부 역시 소속 조직인 민투위와의 대립으로 집행부가 사퇴하기도 했다. 즉 현장조직에서는 집행부를 조직에서 파견된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조직의 방침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고, 집행부는 대중조직의 책임자들이기 때문에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려 하면서 갈등이 빚어진 것이다.

결국 현장조직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수많은 조직들이 합쳐졌다가 나눠지고, 또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은 반복될 것이다.

▲ 현대자동자지부 내 주요 현장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