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되는 건 닥치는대로 한다
돈 되는 건 닥치는대로 한다
  • 성지은 기자
  • 승인 2004.12.10 00:00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방이 죽어간다_반월·시화 공단
늘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는 공장들

“설비를 갖추고 사람을 고용해 가동할 만한 힘이 없습니다. 새 설비는 꿈도 못 꾸죠. 우리는 기술 인력만 몇 명 데리고 외국 건설현장에 나가고 있어요. 2층이요? 거기는 식품공장 컨베이어 만들어요. 3층은 자동차 에어컨 만드는 데고요. 저 밖의 공장은 자동차 프레스 공장으로 쓰지요.”

반월·시화공단의 업체들이 잡화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한 건물, 한 공장 안에서 전혀 다른 업종의 사람들이 얼굴을 맞대며 일하고, 몇 명 안 되는 사람들로
보따리 장사를 꾸리는 업체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 안에서 정신 없이 하루하루 일하는 사람들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부도신고 하고 여기 나가는 길밖에 없다”며 “그래도 망해 나가는 것보다 낫다”고 한숨 쉰다.

다세대 사무실, 나눠 쓰는 공장

반월공단 내에 있는 한 공장의 정문 앞에 ‘M정밀’이라는 명패가 붙어있다. 3층 건물 하나에 컨테이너 박스로 된 50여 평 규모의 공장 2개가 있는 공간에 총 네 개의 업체가 있다. 원래 선박에 쓰이는 부품을 납품하던 M정밀이 업종을 해외 건설업으로 변경하면서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공장이 없어진 다른 업체들에 세를 준 것이다.

이 업체의 경영이사는 “나도 우리가 하고 있는 정확한 업종을 딱히 말해주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항상 유동적으로 일하는 거지요. 가끔 대기업에서 인력이 필요하다고 할 때는 인력은행 역할도 하고, 예전에 거래하던 업체에서 일거리가 들어오면 공장을 쓰기도 하고, 사우디에 배관 공사가 생기면 기술업자들 몇 데리고 가서 그 일을 합니다.”

이렇게 한지붕 세 가족, 네 가족이 되는 곳, 그리고 한 업체에서 여러 가지를 하고 있는 업체를 만나는 것은 반월공단과 시화공단 내에서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일본에 컨베이어를 전문으로 수출하는 한 기업은 올해 제2공장을 신설하면서 생산을 늘렸다. 이 곳은 1년 전부터 자동차의 비상등을 만드는 회사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또 2공장 설립 후 1공장에서는 컨베이어를 생산하는 대신 ‘각종 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공장장은 “이것저것 하려니 아주 정신이 없다”며 한 쪽은 자동차 비상등 업체, 한 쪽은 컨베이어 공장의 서로 다른 로고가 새겨진 명함을 건넸다.

그는 1공장에서는 어떤 것을 생산하느냐는 질문에 무척 난감해하며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라고 대답했다.

이 곳의 공장들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실어 나른 지 20여 년이 됐다는 55세의 화물차 기사는 “여기? 나는 피눈물이 날 지경”이라고 대상 없는 욕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렵다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제조업체들은 그저 먹고 살기에 급급해 자신도 모르는 새 ‘주요 업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잡화상이 되어가고 물품을 싣고 떠나는 화물차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중국 가는 기업은 배부른 것

시화공단 입구에서 10여 년간 부동산을 해오고 있는 부동산업자는 경기가 나빠졌다고 빈 공장이 턱없이 늘어나거나 사람들이 모두 망해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여기서 장사가 안돼서 중국으로 간다고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돈이 있는 곳 얘기”라며 “중국에 나갈 돈이 있어야 나가지, 기껏해야 500평에서 1000평 정도 되는 공장이 당장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그럴 돈이 어디 있어? 방송에서 괜히 떠들어대는 거지”라며 혀를 찼다.

산업단지공단에서 조사한 시화·반월의 2004년 9월 공장 가동률은 각각 79.5%, 76.2%로 전년 동월 대비 각각 9%, 1% 상승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느끼고 있는 체감 경기는 이러한 가동률과는 사뭇 다르다.

6시경 회사를 나오던 한 지게차 수리 업체의 수리공은 오늘은 잔업이 없냐는 물음에 “그거 몇 푼이나 된다고 잔업을 합니까”라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하지만 질문이 재차 이어지자 곧 “사장도 돈이 없고 몇 시간 하지도 않는 잔업 때문에 눈치 보기 싫어서 안한 지 꽤 됐다”고 털어놨다.

한국노총 시흥지부 황인철 사무처장은 “시화공단의 노동자는 영세한, 늘 문을 닫을 ‘준비’가 되어있는 업체에서 일을 한다”며, “그곳에서 짤리고 돈을 못 받는 것을 그러려니 받아넘기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또 잔업을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계가 어려워지는 곳이라고 덧붙였다.


불황 속의 인력난, 일 할 사람이 없다

잔업이며 특근을 모두 해도 늘 물량을 맞추기 어려운 곳도 있다. 한국도로공사의 하청업체로 기초 공사의 철근 용접을 하는 한 업체는 특별한 호황도 없지만 다른 업체들처럼 물량의 기복이 심한 곳은 아니라고 한다.

이 곳은 20여 명의 직원 중 공장장을 포함해 7명을 제외한 모든 직원이 중국 노동자다.

처음 말을 건네자 “저 한국사람 아니에요”라는 농담을 던진 공장장은 “여기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은 모두 3~4년 이상씩 이 곳에서 일하면서 가족들을 부양해 온 사람들”이라며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억척으로 일을 잘 하는지 1주일을 제대로 못 버티는 한국 사람을 쓰는 것 보다 훨씬 낫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일한 기간이 3~4년이 넘은 사람들은 불법 체류자가 대부분이다.

이들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문 닫아야죠”라는 짧은 말을 건넨 그는 “여기서 일할 사람은 한국에 이제 없다”고 잘라 말했다.

짙은 어둠이 깔린 적막한 시화공단에는 작은 컨테이너 박스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깜박이는 매점의 불빛과 여기저기서 쉬지 않고 들려오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이 어둠을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