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단지, 제조업의 터전
산업단지, 제조업의 터전
  • 이상동 기자
  • 승인 2015.03.1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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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단지 역사가 곧 제조업 발전사
조세 혜택 등 정부 지원 집중
[커버스토리]_ 산업단지와 제조업의 미래 (1)

제조업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이다. 그런 공장 중 다수가 ‘산업단지’ 안에 위치해 있다. 산업단지는 우리나라 곳곳에 산재해 있다. 전국의 대도시는 물론 시, 군 단위에서도 어렵지 않게 산업단지를 찾아볼 수 있다. 수많은 노동자와 지역주민들의 삶이 산업단지와 얽혀 있고 우리나라의 성장과정도 산업단지의 발달과 깊은 연관 관계를 갖는다.

<참여와혁신>은 산업단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나라 제조업의 현재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산업단지의 형성과 성장과정을 살펴본다.

 

ⓒ 한국산업단지공단

최초의 산업단지 트래포드 파크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것은 많은 장점을 갖는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교통입지를 고려하여 땅값이 싸며 공업용수를 얻기 좋은 위치에 대상지를 선정한다. 이후 공장부지 건설과 함께 제반 여건이 마련되면 기업이 입주하게 된다.

산업단지에 입주하는 기업은 각종 세제와 금융지원 등의 혜택도 얻을 수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초기 투자비용을 상당히 절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기업 활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점도 동일한 업종 간의 군집을 통해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등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공장의 계획적 집단 배치는 토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고 지방 균형발전에도 기여한다. 지방의 낙후지역에 산업단지를 조성할 경우 산업단지 노동자들의 출퇴근을 위한 교통 인프라는 물론이고, 인근에 주택단지가 건설되거나 그에 따른 경제시설과 상권이 형성되기도 한다.

세계 최초의 산업단지는 영국 맨체스터 시의 트래포드 파크(Trafford Park)다. 트래포드 파크는 우수한 운하, 항만, 철도시설을 보유해 급속히 개발됐고 세계대전 중에는 군수 물자를 위한 요충지가 됐다. 2차 대전 말기에는 약 7만 5천 명의 고용규모를 보일 정도로 성장했다가 쇠퇴기를 거쳐 다시 중흥기를 맞고 있다.

트래포드 파크 사례 이후 유럽 각국에 수많은 산업단지가 조성됐다. 산업단지를 조성함으로써 기업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와 국가 발전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산업단지 조성이 크게 장려돼 왔다.
 

ⓒ 한국산업단지공단

논, 밭, 야산을 공장으로 채우다

196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최빈국 중 하나였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으로 사회기반시설이 황폐화됐고 전체 노동인구의 25%가 실업상태였다.

당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을 수립, 시행한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기본 방향은 수출주도형 공업화 추진이었다. 먼저 1962년 울산공업지구가 지정되고 조성됐다. 울산공업지구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조성된 한국 최초의 산업단지였다.

이후 정부는 1964년 5월 한국수출산업공단을 설립하고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을 제정한다. 이를 토대로 ‘구로공단’이 조성된다. 구로공단의 정식 명칭은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다. 서울시 구로동의 산업단지 예정지역은 논과 밭 그리고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토지가격도 저렴했으며 주변에는 용수공급을 위한 하천이 인접해 있고 교통접근성도 양호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후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는 계속 확장되어 제2단지, 제3단지가 추가 지정됐고, 인천의 부평과 주안에 제4~6단지가 조성됐다.

수출주도형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산업단지 조성 이외에도 국가기간산업 육성을 위한 산업단지의 지정과 민간단지의 개발도 이어졌다. 포항의 제철공업과 구미공업단지가 각각 지정돼 조성됐고 부산·대구·인천·성남 등 주요 도시에서 민간위주의 공업단지 개발이 이뤄졌다.

1970년대는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으로 대규모 임해산업단지들이 조성됐다. 이는 국토균형발전을 위한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72~1981)에 따른 것으로 울산·포항·마산·창원·여수 등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개발됐다. 지역별 업종 배치를 통해 전문업종별 항만조건, 용수조건, 용지 등 물리적 조건을 기초로 하여 포항(철강), 여천(석유화학), 창원(기계), 거제(조선), 구미(전자), 온산(비철금속) 등이 산업단지로 지정되고 개발됐다.

1970년대의 대규모 공업단지 위주의 거점개발 방식은 지역 간 격차를 확대시켰다. 따라서 1980년대의 산업단지 개발은 산업의 공간적 배치와 지역 간 분산을 목표로 한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서울의 인구와 공업을 분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 반월 및 시화산업단지다. 또한 전자·자동차 분야 등 첨단 산업화를 지향하며 기존 중화학공업 역시 더욱 진전시켰다.

1980년대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농공단지의 개발이다. 기존의 농업구조에서는 농가가 소득을 늘리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저임금을 위해 저곡가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정부는 이를 보완하기 위한 방안으로 농공단지 개발을 제시했다.

우선 농촌지역의 풍부한 농산물원료와 유휴노동력을 이용한 농외소득 증대를 목표로 ‘농어촌소득원개발촉진법’을 제정한다. 이를 통해 농촌지역에 소규모 공업단지를 조성하여 중소기업체를 유치하고 입주업체에 저렴한 공장용지를 제공하는 한편, 조세 및 금융지원, 행정절차 간소화 등 종합적 지원을 하게 된다. 농공단지는 1984년 이후 집중 개발되어, 1980년대에만 총 217곳이 지정됐다.

1990년대는 지역 간 균형발전 기조를 유지하며 연구·개발·생산·물류·복지 등 다양한 서비스 기능을 갖춘 복합단지 개발이 중점적으로 이뤄졌다. 광주첨단단지가 지정되고 부산·대전·대구·전주·강릉·오창에 지방과학산업단지가 지정돼 개발되기 시작했다.

IT 및 첨단지식기반 산업이 핵심산업으로 등장한 2000년대는 지구온난화와 환경문제 등이 이슈가 된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개발을 목적으로 녹색성장과 친환경적 산업단지 개발을 목표로 하게 된다. 또한 다양한 기능을 포괄하는 복합단지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며 첨단의료복합단지, 외국인투자지역, 경제자유구역 등 다양한 산업단지 개발이 증가한다. 그리고 1960년대와 70년대 대규모로 조성된 주요 국가 산업단지가 오래돼 노후화됨에 따라 산업단지 재정비와 구조고도화를 위한 클러스터형 산업단지 육성정책도 추진되고 있다.
 

ⓒ 한국산업단지공단

제조업-산업단지 동반 발전

우리나라 제조업의 발달은 산업단지의 성장과 그 궤를 같이 한다. 1950년대 산업구조에서 제조업 비중은 11.6%밖에 되지 않았다. 정부는 특정 지역에 집중 투자하여 공단을 조성하고 경공업 제품 수출에 집중했다. 기술력은 부족했지만 노동집약적이며 낮은 임금을 바탕으로 한 국제 경쟁력을 가진 섬유·의류·신발·가발 등의 경공업 제품을 주로 생산했다. 경공업 제품의 제조·수출은 이후 산업단지 활성화와 제조업 성장의 기반이 됐다.

1961년 전체 수출량 대비 섬유류 수출 비중은 10.8%에서 1969년엔 4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또한, 공산품 수출 비중은 1962년 27%에서 1969년 79%로 급증하였다. 1973년 말 기준 섬유산업은 국내 생산의 26%, 고용의 35%, 수출의 38%를 차지하며 국가 성장의 바탕이 됐다.

그러나 경공업 위주의 수출 전략은 일부 경공업 제품에 대한 보호주의 및 후발 개발도상국과의 경쟁으로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다. 그에 따라 정부의 수출 계획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분야로 넘어가게 된다.

울산공업지구 조성 이후 화학비료·정유·화학섬유·시멘트 등 일부 중화학공업 분야의 생산기반이 구축되고 있었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 철강·비철금속·석유화학 등 기초 소재 산업의 생산기반이 마련됐다.

이에 따라 저부가가치의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중화학공업으로의 산업구조 재편이 추진됐다. 전자·기계·조선·석유화학·철강·비철금속 제조를 위한 산업단지가 집중적으로 조성되고 울산, 포항 등 동남권 임해지역과 서남해안권 지역의 기존 중화학공업단지가 확대·신설됐다. 구미단지의 확장, 창원기계공업단지의 신설 또한 이뤄졌다.

이러한 산업구조 재편은 제조업 내 공업별 유형 변화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경공업 비중은 1961년 73.7%에서 1981년 47.1%로 급격히 감소한 반면, 중공업 비중은 같은 기간에 26.3%에서 52.9%로 증가했다. 그 결과 198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은 더욱 발전했고, 전자·자동차 분야 등의 첨단 산업화를 지향하면서 산업구조는 더욱 고도화됐다. 

이 같은 제조업의 양적 팽창, 기술적 성장은 산업단지 육성을 위한 정부의 지원과도 연관 지어 파악할 수 있다.

정부는 1962년 1월 ‘도시계획법’ 제정을 통해 도시계획 범위 내에서 ‘공업용지의 조성’을 추진할 수 있게 했다. 그 외 도시계획시설과 기반시설 관련법 등도 순차적으로 제정하고, 국토의 자연조건을 종합적으로 이용해 개발·보전하며 산업입지와 생활환경의 적정화를 도모하기 위한 법제를 제정함으로써 산업단지 조성의 기반을 마련한다. 또한 입주기업체들에 특례를 주어 관세 혜택을 부여하기도 했다. 1970년의 ‘지방공업 개발법’을 통해 지방의 공업개발 장려지구를 지정하고 신규 사업자에게는 조세 혜택도 주어졌다.

정부는 수출을 위한 산업단지를 계획적으로 조성했고 그에 따른 이익은 제조업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사회기간산업 육성을 위한 중화학공업단지 개발도 결국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위한 밑바탕이 되었다.

혜택은 기업을 유치하는 데에만 그치지는 않았다. 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위하여 개발 지구 안의 기업이 설비를 신설·증설한 경우에도 혜택이 주어졌다. 이렇게 산업단지에 입주한 기업들에 대한 지원이 동시에 이루어진 결과, 제조업 발달은 산업단지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됐다.

우리나라 제조업의 성장에서 산업단지의 역할을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산업단지와 제조업은 상호 의존하며 발전해 왔다. 산업단지는 제조업 발전의 터전이 됐고, 제조업이 발전할수록 산업단지 역시 더욱 확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