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0일 일했는데 퇴직금 적립일은 83일?
2,600일 일했는데 퇴직금 적립일은 83일?
  • 박완순 기자
  • 승인 2020.04.07 17:05
  • 수정 2020.04.07 1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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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개기 발주’로 퇴직금 적립 못하는 플랜트건설노동자
정부, 오는 5월부터 퇴직공제 적용공사 기준 완화

[리포트]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건설노동자 퇴직금, 실질화가 필요하다 ②

만 9년을 일했다. 그는 2006년 10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플랜트 현장에서 일했다. 자신의 고용보험 가입 일수를 확인해봤다. 고용보험에 일용근로내역이라고 찍힌 날은 2천 6백여 일 정도다. 나머지 6백여 일은 일을 하지 못했거나 고용보험 적용이 되지 않은 곳에서 일했거나 이다. 그렇다면 그의 퇴직금은 얼마일까?

퇴직금 적립원금 38만 2천 원이다. 적립일은 83일이다. 분명 고용보험 가입 일수는, 그러니까 그가 일했다고 증명을 받은 일수는 2천 6백여 일에 달하는데, 사용자가 퇴직공제부금을 납입해야 하는 일수는 83일이라는 것이다. ‘2,600과 83은 너무 많은 차이가 아닐까’라고 의문을 던질 수 있다. 뭔가 석연치 않은 퇴직금의 주인공은 최관식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플랜트건설노조 사무처장이다. 최관식 사무처장에게 그의 이야기와 그의 동료 플랜트건설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불법이 아닌 쪼개기 발주,
플랜트건설노동자 대부분 퇴직금 적립 못해

앞선 기사에서 살펴봤던 건설노동자 퇴직공제부금제도는 모든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를 위한 제도는 아니다. 건설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약칭 건설근로자법)에 따르면 공사예정금액 기준 ▲공공공사는 3억 원 이상 ▲민간공사는 100억 원 이상의 공사에 일하는 건설노동자만이 퇴직공제부금 당연 가입 대상자이다. 그 기준을 넘는 사업장에게 퇴직공제부금 적립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이다.

최관식 사무처장의 잃어버린 2천 5백여 일은 100억 원 이상이라는 기준을 넘지 못하는 건설 현장에서 일한 대가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가 서류상 100억 원 이상의 공사에서 일한 일수가 83일이다.(플랜트건설의 경우 대부분이 민간공사이기 때문에 민간공사 기준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그가 동료들과 만든 석유화학단지의 공장들은 몇백억 원짜리 공사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쪼개기 발주’ 때문이다. 최관식 사무처장은 쪼개기 발주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말했다.

“민간공사 발주처나 원청들이 공사를 공정별로 쪼개요. 예를 들면 전체 공사 100억 원짜리를 공정별로 10억, 20억 나눠요. 물, 석유, 기체 저장용기인 탱크 만드는 공정 따로, 배관 공사 따로요. 플랜트건설은 그렇게 따로 따로 만드는 게 가능해서 쪼개기 발주가 쉽죠.”

“그래서 같은 현장에서 일하고 같은 업체임에도 공사계약이 나눠지고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100억 원짜리 공사를 하지만 퇴직공제부금 적용이 되지 않는 거죠.”

“문제는 쪼개기 발주는 불법이 아니에요. 그냥 법망을 피한 편법이죠. 그러다보니 퇴직공제부금이 적립되지 않아요.”

최관식 사무처장은 작년 여수석유산단 LG화학 하수처리장 플랜트 공사 사례를 들기도 했다. 전체 공사금액이 4백여 억 원인데, 종합건설업체를 거치지 않고 30여 개 전문건설업체에 공정별로 쪼개 발주했다. 7~8개월의 공사 기간 동안 5백여 명의 플랜트건설노동자는 퇴직금을 1원도 적립하지 못했다. 최관식 사무처장은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플랜트건설노동자 대부분이 비일비재 겪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노후 걱정하는 플랜트건설노동자
건설근로자법 개정 희망될까?

플랜트건설노동자가 겪는 비일비재한 일 때문에 플랜트건설노동자들은 노후를 걱정한다. 용접 등 플랜트건설노동자가 소지한 기술과 기능에 따라 임금이 다르지만, 최관식 사무처장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월 320만 원 정도 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임금 수준이다. 하지만 플랜트건설노동자의 노동 강도를 생각한다면 상대적 저임금일 수 있다. 최관식 사무처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플랜트건설노동은 입에 단내가 날 정도의 일이다. 게다가 무거운 철을 다루고 화기를 다루기 때문에 안전사고의 위험에 늘 노출이 돼 있다.

최관식 사무처장은 플랜트건설노동자의 삶에 대해서 좀 더 상세히 전달해줬다.

“60세가 넘으면 회사에서 잘 안 받아요. 그래서 퇴직은 그 언저리에서 하죠.”

“노후 준비는 거의 없죠. 개인적으로 적금이나 연금이나 하겠지만, 회사 다니면서 일반적으로 받는 퇴직금도 없고. 월 평균 320만 원이라지만 다 알듯이 자식들 키우고, 가족 부양하고 하면 딱히 노후 대책이라는 게 없죠.”

건설근로자법 개정에 따라 다가오는 5월부터, 정확히 말하면 5월에 발주한 공사부터 퇴직공제 가입 대상공사가 확대된다. 공사예정금액 기준을 공공공사의 경우 3억 원 이상에서 1억 원 이상으로, 민간공사의 경우 100억 원 이상에서 50억 원 이상으로 기준을 낮춰 적용 공사 범위가 확대되는 것이다. 정부는 건설근로자법 개정으로 퇴직공제 적용공사 비율 변화 예측도 했다. 전체 공사로 봤을 때 현재 74.7%에서 82%까지 퇴직공제 적용공사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공공공사는 95.2%에서 99%로 대부분의 공사가 퇴적공제 적용 공사에 해당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민간공사는 67.7%에서 76.2%로 적용 범위가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은 퇴직공제 적용공사 비율을 확대할 수 있는 이번 건설근로자법 개정을 반겼다. 건설산업연맹은 국토부와 노정 교섭 요구안으로 ▲쪼개기 발주 금지 ▲총공사금액(쪼개기 하지 않은 공사예정금액)으로 기준 설정 ▲퇴직공제 적용공사 범위 확대를 위한 기준 금액 낮추기 등을 요구했었고, 기준 금액 낮추기가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송주현 건설산업연맹 정책실장은 “민간공사 50억 원으로 기준으로 개정 시행령이 적용된다면 플랜트건설노동자의 대부분이 퇴직공제부금제도에 적용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쪼개기 발주한 공사의 공사예정금액이 대부분 50여억 원 대에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건설노동자의 설긴 사회안전망에 대한 고민을 계속 숙제로 가지고 있다. 지난 3월 9일 발표한 ‘제4차 건설근로자 고용개선 기본계획’에는 오는 5월부터 효력이 발생하는 개정법령 뿐만 아니라 “퇴직공제금의 사회안전망 기능 강화를 위해 오는 2022년을 목표로 퇴직공제 가입 대상공사를 공공공사의 경우 모든 공사, 민간공사의 경우 20억 이상 민간공사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다만 원청이 50억 원 이하로 쪼개기 발주를 할 경우 문제는 다시 발생한다. 쪼개기 발주가 불법이 아닌 이상 설긴 사회안전망 사이로 빠져 나가는 건설노동자들이 다시 나타난다. 따라서 건설산업연맹의 ▲쪼개기 발주 금지 ▲총공사금액(쪼개기 하지 않은 공사예정금액)으로 기준 설정 등의 카드도 여전히 유효하다.

최관식 사무처장도 쪼개기 발주로 인해 퇴직공제부금 제도에 적용 받지 못하는 건설노동자들이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전했다.

“쪼개기 발주를 하든 뭘 하든, 총공사금액을 기준으로 하라는 거죠. 누구는 받고 누구는 받지 못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