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억울해 미치겠다"는 호소에 귀기울이지 못했나
우리는 왜 "억울해 미치겠다"는 호소에 귀기울이지 못했나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0.05.14 09:00
  • 수정 2020.05.24 0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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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재학 PD를 잊지 않겠습니다’ 100일 추모문화제
"무늬만 프리랜서 필요없다, 방송 노동인권 보장하라"

방송국에는 ‘근로자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여러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프리랜서, 하청노동자, 용역노동자, 파견노동자 등. 이름은 다르지만 사용자가 책임을 피하기 유용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정규직으로 분류되는 이들 노동자 대부분은 취약한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이슬기 고 이재학PD 누나와 이대로 고 이재학PD 동생이 유가족 발언을 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이슬기 고 이재학PD 누나와 이대로 고 이재학PD 동생이 유가족 발언을 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쉽게 '해고' 당한 14년 차 프리랜서PD 이재학

CJB청주방송에서 14년 동안 '프리랜서'로 일하던 고 이재학PD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억울해 미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유명을 달리한 지 100일이 흘렀다. 고 이재학PD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한 100일 추모문화제가 13일 CJB청주방송 앞에서 열렸다. 

CJB청주방송에서 14년을 근속했던 고 이재학PD의 월급은 160만 원이었다. 주말과 야간 없이 일한 대가였다.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열악한 노동환경을 참아가며 일하긴 마찬가지였다. 고 이재학PD는 자신과 동료들의 보다 나은 노동을 바랐다. 기획제작국장에게 인건비 인상과 인원 충원을 요구했다. 2018년 4월, 방송국은 ‘해고’로 답했다. 담당하던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당했다. 그해 8월 부당해고라며 청주지방법원에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14년간 청주방송의 지휘·감독 하에서 업무를 수행해 왔지만, 2020년 1월 22일 고 이재학PD는 패소했다. 함께 일한 동료들이 근로자성을 입증하기 위해 증언할 계획이었으나 불발로 그쳤다. 이재학PD 생전 증언에 따르면, CJB청주방송의 증언 방해가 있었다. 사측은 이재학PD의 퇴사가 자발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고 이재학PD는 2월 4일 “억울해 미치겠다. 모두가 알지 않을까? 왜 그런데 부정하고 거짓말을 하나”라고 쓴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CJB 청주방송 故 이재학PD 대책위’가 결성됐다.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명예회복, 그리고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비정규직 갈아 만든 프로그램

진상조사위원회는 약 두 달간 회의와 조사를 진행하며 고 이재학PD에 관한 사건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전했다. 위원회는 18일 마지막 회의를 하고, 추후 조사보고서와 권고안, 이행요구안 등을 발표할 계획이다.

김혜진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은 “이재학PD가 유서에 남긴 대로, 이재학PD는 청주방송의 정규직 노동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부당하게 해고를 당했으며, 재판 과정에서 억울한 일들을 무수히 당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을 착취하는 CJB청주방송의 고용구조 개선 필요성도 언급했다. 김혜진 위원장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지만, 상시 지속업무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청주방송이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진상조사 과정에서 청주방송 구성원을 많이 만났다. 모두 다 자신의 일에 애정을 갖고 있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일을 더 잘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왜곡된 고용 구조는 자기 일에 애정과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안심하고 제대로 일할 기회를 빼앗고 있다”고 전했다.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는 CJB청주방송만의 문제가 아니다. 잘못된 관행, 열악한 노동환경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대구MBC 보도국에서 10년째 자막CG 업무를 맡고 있는 프리랜서 노동자 윤미영 대구MBC다온분회 분회장은 “매주 40만 830원씩 주급을 받고 있다. 프리랜서라 하여 세금 3.3%를 뗀 금액이다. 편성국 소속 선배는 22년 차에 41만 원을 받고 있다. 우리 임금은 경력과 관계없이 여전히 최저임금 수준에 머물러있다”며 방송국 비정규직 노동자의 어려움을 전했다.

이어서 “방송 언론계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불의를 참지 못하고 희생되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 사회적 약자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건 엄청난 용기와 희생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 용기 있는 고발자들이 계속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사회적 공감대와 시민들의 지지가 절실하다”며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에 관한 관심을 호소했다.

선지현 비정규직없는충북만들기운동본부 공동대표는 방송국이 노동의 가치를 지킬 수 없는 곳이라 비판해다. “얼마 전 방송통신위원회가 공개한 자료를 보니 이재학PD가 2011년부터 2017년까지 맡은 프로그램 평균 개수가 9.5개였다. 이걸 본 한 팀장급 PD가 말이 안 되는 기록이었다고 했다더라. 연출과 조연출을 막론하고 프로그램을 2개 이상 맡는 경우도 드물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받은 돈은 회당 40만 원. 묻고 싶다. 왜 그토록 열심히 일했나. 왜 노동의 존엄조차 세울 수 없는 이 방송국에 자신의 열정을 갈아 넣었나. 이재학PD의 억울함이 분노가 되어 돌아온다. 정규직보다 2~3배가 넘게 일했다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일을 했음에도 이재학PD는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윤미영 대구MBC비정규직다온분회 분회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윤미영 대구MBC비정규직다온분회 분회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스스로 만든 방송국이라는 '성역'

방송국 비정규직 문제는 무엇보다 방송국 내부 책임이 가장 크다. 왜곡된 근로계약 행태를 고수하는 건 물론이며,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가 불거지면 보도를 자제한다. 일종의 '제 식구 감싸기'다. 그나마 사건이 드러나는 것도 일부 신문사, 인터넷 언론의 보도 덕분이다.

오정훈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이제야 겨우 방송작가지부와 대구MBC다온분회 등 비정규직 조직을 만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30년 언론노조 역사에 비정규직 조직을 3년밖에 못 했다는 것에 자괴감이 크다. 여기 온 동지 여러분이 우리를 밀어주고, 추동해주고, 격려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언론의 신뢰를 회복하고 조합원들과 비정규직에게 힘이 되는 언론노조가 될 것"을 선언하며 2019년 2월 전국언론노동조합 10대 위원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 

내부 문제에 침묵하는 방송국과 언론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선지현 공동대표는 “오늘 추모사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 번 우리 이재학 노동자의 기사를 담은 글들을 찾아보게 됐다. 그런 내용의 기사를 담고 있는 것은 ‘충북인뉴스’와 ‘미디어오늘’이 전부였다. 나는 그 두 언론이 이재학 노동자의 삶과 방송계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담는 송곳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에 따르면, 이재학PD가 사망한 다음 날인 2월 5일부터 11일까지 충청지역의 언론사 중 사건을 제대로 보도한 곳은 없었다. MBC충북에서 짧게 3차례 보도한 게 전부였다. 이 중 2번의 기사는 방송사를 익명 처리해서 보도했고, CJB청주방송에서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이름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오정훈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이 '무늬만 프리랜서 이제 그만!' 피켓을 든 채 추모사를 듣고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오정훈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이 '무늬만 프리랜서 이제 그만!' 피켓을 든 채 추모사를 듣고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이재학PD가 남긴 과제

고 이재학PD는 생전에 ‘미디어오늘’ 손가영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방송계갑질119) 변호사님하고 계약할 때, 이런 경우 중도에 포기하거나 합의를 보는 경우가 많잖아요, 사측하고. 근데 저는 판례를 남기겠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썼어요, 변호사님하고. 제가 합의가 들어오건 뭐건 일단 판례를 남기겠다. 그러면 당장 저희 회사가 조심하겠고, 남아있는 후배들에게 조심하겠고. 판례를 남기면 전국에는 어떻게든 알려지게 될 거 아니에요. 쉬운 말로 14년 동안 못 썼던 계약서 한 번이라도 쓰겠죠. 나머지 프리랜서들, 전국 민방에 있는 프리랜서들이."

“억울해 미치겠다”고 호소한 고 이재학PD의 죽음은 방송, 언론, 그리고 우리 사회가 풀어야할 과제를 제시했다. 현재는 왜곡된 관행 속에 차별받고 있는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 규모가 얼마인지조차 파악이 안 되고 있는 실정이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