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박싱] 이주의 인물 : 이소선
[언박싱] 이주의 인물 : 이소선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0.09.05 10:31
  • 수정 2020.09.05 10: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힌트 : 9월 3일, 모란공원, 전태일열사, 전태일재단, 어머니

[언박싱] 이주의 인물 : 이소선

2009년 12월 23일 이소선 어머니 댁에서 <참여와혁신>과의 인터뷰 도중. ⓒ 참여와혁신DB

"엄마 꼭 크게, 나 잊어버리고 부탁하고 가게. 크게, 크게 대답해 주세요.”

그라는 거라. 그리고 피가 퍽 쏟아지고, 크게 대답하라 소리치면 피가 퍽 쏟아지고, 크게 대답하라 그라면 또 피가 퍽 쏟아지고……. 그라다 한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라져 있다가 태일이가 눈을 뜨며 마지막으로 뭐라 한지 아냐?

“엄마, 배가 고프다…….”

그게 태일이 마지막 말이었어. 그 말이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던지 나도 정신을 잃었어.

-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이소선 여든의 기억>(이소선 말하고 오도엽 씀, 후마니타스. 2008) 중에서

9월 첫째 주 언박싱 이주의 인물은 바로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 고(故) 이소선 어머니입니다. 2020년 9월 3일은 이소선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지 9년이 지난 날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예년과 같이 많은 사람이 마석 모란공원을 찾지는 못했지만 어머니를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의 마음은 그대로였습니다.

이소선 어머니는 천대받고 멸시받는 노동자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점을 늘 안타까워했습니다. “우리는 노동자다. 노동자가 하나가 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라는 이소선 어머니의 말은 우리를 아직도 부끄럽게 합니다. 이번 언박싱에서는 이소선 어머니의 지난 삶을 짧게 되돌아봤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딸

이소선 어머니는 일제의 수탈이 극심해지기 시작하던 1929년 11월 9일(음력) 경북 달성군 성서면 감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소선 어머니의 아버지 이성조 씨는 항일농민운동을 하다가 이소선 어머니가 세 살 되던 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후 이소선 어머니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소선 어머니는 15살 때 일제에 의해 방직공장으로 차출돼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숨어 지내다가 해방을 맞이합니다.

해방 이후 이소선 어머니는 대구에서 전상수 씨를 만나 결혼합니다. 이듬해인 1948년 8월 6일 장남 전태일을 낳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가난했고 현실은 잔인했습니다.

이소선 어머니의 가족은 몇 번이나 생계를 이유로 부산, 대구, 서울을 전전합니다. 그 와중에 가족이 생이별하는 수난도 겪지만, 이소선 어머니와 아들 전태일의 노력에 우여곡절을 거쳐 서울 쌍문동 공동묘지 옆 무허가 판자촌에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2009년 12월 23일 이소선 어머니 댁에서 <참여와혁신>과의 인터뷰 도중. ⓒ 참여와혁신DB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이소선 어머니 가족이 조금이나마 안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들 전태일이 그즈음 평화시장에 취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소선 어머니가 보기에 태일이는 공장일 말고도 다른 일에 분주해 보였습니다. 어느 날 아들 태일이는 이소선 어머니에게 ‘근로기준법’을 공부해보라고 권유받습니다.

“왜 내가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을 배워야 하노?”라고 하자 아들은 “어머니 지금 배워놓으면 언젠가는 꼭 필요 할 때가 있을 겁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소선 어머니는 근로기준법책을 늘 끼고 그것에 매달리는 아들의 행동에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들어 근로기준법 책을 감춘 적도 있었다.

- 전태일재단 홈페이지

어머니의 불길한 생각은 1970년 11월 13일 현실이 됐습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유지를 받아들인 이소선 어머니는 이때부터 평범한 어머니가 아닌 노동운동의 투사가 되었습니다. 이소선 어머니가 마흔두 살이 되던 해입니다.

180번의 구류처분, 3번의 옥살이

2011년 9월 7일 오전 대학로에서 열린 고 이소선 어머니 영결식에 참석한 추모객들이 고인을 기리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 참여와혁신DB

이소선 어머니는 1970년 11월 27일 청계피복노조를 건설해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어나갑니다. 평화시장 사업주와 정부의 탄압과 방해를 뚫고 점심을 굶으며 일하는 노동자에게 점심을 주는 후생식당을 운영했습니다. 또 배움에 목마르지만 여력이 없는 노동자를 위해 야학을 운영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노동교실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역대 정권은 이소선 어머니와 청계피복노조를 눈엣가시로 보았습니다. 1977년 박정희 정권은 청계피복노조를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박정희 정권은 1977년 7월 22일 법정모독죄로 이소선 어머니를 구속하고 노동교실을 일방적으로 폐쇄합니다. 이소선 어머니는 징역 1년을 선고받습니다.

1980년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서울의 봄이 오면서 이소선 어머니의 염원도 이뤄지는 듯했으나 전두환 정권은 이를 무참히 짓밟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피로 물들인 전두환 정권은 1980년 5월 17일 확대비상계엄령을 통해 이소선 어머니를 수배합니다. 같은 해 10월 이소선 어머니는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돼 2개월 만에 석방됩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전두환 정권은 1981년 1월 6일 청계피복노조에 해산명령을 내리고 2개월도 안 돼 이소선 어머니를 다시 잡아들입니다. 이소선 어머니는 이때 구속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습니다.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 모든 노동자의 동지

  2012년 2월 20일 김진숙 씨가 이소선 어머니의 영전에 술을 올리고 있다. 김진숙 씨는 이날 “저희들은 어머니 바라신대로 살아서 내려왔습니다. 어머니가 그토록 타고 싶어 하셨던 희망버스, 이제는 쌍용차로 재능으로 콜트콜텍으로 달려서 더 이상 노동자들이 죽지 않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노동자가 잘 사는 세상을 향해서 달리겠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라고 짧은 추도사를 남겼다. ⓒ 참여와혁신DB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자의 투쟁 현장 곁을 언제나 지켰습니다. 180번의 구류처분과 3번의 옥살이는 ‘범법’이 아니라 노동자를 향한 사랑의 증표였습니다. 원풍모방, 동일방직, YH부터 구로동맹파업, 전노협 결성 등 모든 노동운동 현장에는 이소선 어머니가 함께 있었습니다. 2011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에도 이소선 어머니는 한진중공업 김진숙 씨의 고공농성을 지지하기 위해 희망버스에 오르려 했습니다.

또한,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자의 목숨을 맞바꾼 항거가 있을 때마다 그 곳에서 함께 했습니다.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의 창립회장이었고,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도 이소선 어머니가 지켜줬습니다.

“배웠다는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열사님은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그게 말이냐? 어느 부모에게 자식이 열사겠냐. 그냥 아들이야. 태일이는 열사도 투사도 아닌, 사람을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야. 그라고 분신자살했다고 한다. 어디 자살이냐. 항거지. 분신항거라고 해야 해. … 태일이를 열사니 투사니 하지 말고 그냥 동지라고 불러줬으면 해. 전태일 동지. 그게 맞지 않냐. 태일이는 지금도 노동자 여러분들과 함께 있는 동지라고, 제발 그렇게 불러 달라고 좀 써라.”

-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이소선 여든의 기억>(이소선 말하고 오도엽 씀, 후마니타스. 2008) 중에서

이소선 어머니는 '열사'나 '투사' 같은 거창한 표현을 멀리했습니다. 그보다 어머니의 마음같이 '동지'라는 부드럽고 정겨운 말을 좋아했습니다.

지금의 노동자들도 이소선 어머니를 ‘동지’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지현 전국여성노조 위원장은 “평생을 아들의 뜻을 품고 운동가로 사셨던 이소선 어머니, 그 열정과 따듯함, 작은 차이를 딛고 하나로 되고자 하는 말씀이 새삼 다시 다가옵니다. 추모의 마음을 드립니다”라고 온라인 추모관에 글을 남겼습니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노동자 하나 되라는 어머님의 뜻을 잊지 않고 입법노동자로서 노동존중, 그 뜻을 새기겠습니다”라고 남겼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항거한 지 50년, 그 뜻을 이어받은 이소선 어머니가 세상을 뜬 지 9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이 모자는 위인이 아닌 언제까지나 노동자의 가장 든든한 ‘동지’로 남아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소선 어머니.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