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노동’의 수레바퀴, “어렵지만 모여야 한다”
‘열정노동’의 수레바퀴, “어렵지만 모여야 한다”
  • 강한님 기자
  • 승인 2020.09.24 11:52
  • 수정 2020.09.24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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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 노동실태와 시사점’ 토론회
9월 23일 오후 2시 신촌 소셜팩토리에서 '패션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 노동실태와 시사점' 토론회가 열렸다.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옷이 담긴 비닐봉투를 양 손에 가득 들고 강남구 일대를 바삐 돌아다니는 이들이 있다. 패션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이하 패션어시)다. 이들은 증언을 통해 패션어시 노동의 열악한 환경을 고발하고, 청년유니온과 노동조합을 준비하기로 선언한 바 있다. 9월 23일 오후 2시 신촌 소셜팩토리에서는 청년유니온 패션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 지부 준비위원회 출범식’에 이어 패션어시 노동의 실태와 시사점을 진단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패션스타일리스트의 등장과 ‘어시’

패션스타일리스트는 익숙한 직업이지만, 패션어시는 생소할 수 있다. ‘한류’라고도 불리는 K팝이 유명세를 타면서 2000년대 연예 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뒤따라 뷰티·패션 산업이 팽창했고, 스타일링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패션스타일리스트다. 이들은 주로 방송 산업과 결합해 드라마, 영화, 홈쇼핑, 잡지, 광고/CF 등에 출연하는 연예인의 착장을 알맞게 고른다. 패션어시는 의상을 조합·수선하며 패션스타일리스트를 보조하는 업무를 한다. 일상에서 주로 수행하는 업무는 대행사를 오가며 의상을 픽업하고 또 반납하는 일이다.

청년유니온은 ‘2020년 패션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 노동실태조사 결과보고서’를 내고, 그동안의 설문조사와 심층인터뷰 결과를 최종 발표했다. 설문조사는 지난 6월 5일부터 6월 21일까지 실시됐으며, 252명의 패션어시 노동자가 응답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패션어시 노동자의 94.5%는 여성이며, 21세 이상 26세 미만이 60%로 가장 많았다. 또한 응답자 다수의 패션어시 직군 유입배경은 ‘어릴 때부터의 꿈’으로, 온라인 카페를 통하거나 관련 학과에 진학해 구직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통계청의 ‘2018년 전국 사업체 조사’를 보면, 관련 직군이 많이 분포돼 있는 강남구의 패션어시 종사자 수는 3,426명 정도다. 사업장이 영세한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이 중에서 10인 미만 사업장 종사자는 1,756명(서울), 924명(강남)으로 나타났다. 청년유니온은 500명 정도가 모여 있는 패션어시 노동자들의 온라인 단체 채팅방 참여 인원을 고려했을 때, 패션어시 노동자는 500명에서 1,000명 정도라고 추정했다.

토론회 발제를 맡은 문서희 청년유니온 기획팀장은 “기본적으로 스타일리스트들은 방송사 또는 연예기획사로부터 도급 계약으로 일을 수주한다. 스타일리스트는 그렇게 확보한 비용으로 어시스턴트를 개별채용한다”며 “일부 스타일리스트는 ‘일하면서 배운다’는 도제식 시스템에서 보조로 일하면서 돈을 벌기 때문에 저임금이 당연하다고 하지만, 실제 노동현장을 들여다보면 배우는 과정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어시스턴트의 역할이 보조로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저임금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4대보험 가입은커녕 근로계약서도 존재하지 않고, 부르면 나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일반적인 노동조합 형태로 이들을 조직하기는 쉽지 않다. 사업장의 규모가 매우 작고 이직이 잦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사업장의 틀이 아니라 전체 직종을 포괄해야 할 것”이라며 “우선 근로감독 및 지도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도 관련 인력의 처우를 정당하게 보장하고, 이를 위한 구조적 개선 노력이 절실하다”고 제언했다.

9월 23일 오후 2시 신촌 소셜팩토리에서 진행된  '패션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 노동실태와 시사점' 토론회에서 발언하는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도제식 시스템·불안정 노동
되풀이되는 열정착취

패션어시의 노동문제가 처음 드러난 시점은 지난 2017년 조사된 전국여성노동조합 서울지부의 ‘패션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 실태조사’를 통해서였다. 이 실태조사에는 패션어시 노동자 203명이 참여했다. 2017년 실태조사와 2020년 청년유니온의 자료를 비교해 보자. 2017년 실태조사 당시 응답자의 40.7%가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한다고 답변했다. 2020년의 경우 그 비율은 50.8%였다. 근로계약서 미작성 여부도 2017년 95.5%에서 2020년 96.4%로 오히려 증가했다. 

이 결과를 ‘충격적’이라고 표현한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몇 가지 다층적인 노동의 사각지대 문제가 확인된다. 전근대적 일의 형태와 방식, 계약해지 시 소득상실을 전면적으로 부담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불안정한 노동이다. 또한 젠더 코드화된 패션어시 등과 같은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가절하 되어 이들 노동은 여전히 완전한 시민으로 처우 받지 못한다”며 “그림자가 드리워진 영역에서 패션어시 노동자들은 계층화되고, 젠더화되고, 때로는 불안정고용 형태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동원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드러난 패션산업의 노동문제의 실질적 해결을 위해 먼저 위법적 사업장을 처벌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패션어시 일터 현장에서 5인 미만 사업장이 아니라면 거의 대부분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그럼에도 반복되는 것은 노동행정에 일정한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소위 청년들의 열정페이의 착취 구조 속에서 여성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시장의 불평등한 노동을 정부가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며 “관련 대학에서부터 노동법 교육과 일터에서의 권리 교육을 시행하도록 유관 부서(노동부-교육부/교육청) 협의를 통해 진행할 필요도 있다. 정부와 업계 및 노동조합 관계자들이 모여 기준과 가이드라인을 모색하는 것도 검토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최태섭 문화평론가도 토론을 통해 “열정노동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대응이 어려운 이유는 발생하는 사례들의 상황이나 형태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고, 특히 도제식 직업교육의 논리가 강한 분야의 경우 교육관행이나 의례 같은 방식으로 열정노동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며 “(열정노동은) 사용자-노동자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 특히 자원이나 정보의 불균형 문제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특정한 분야에 대한 별도의 대응책을 만드는 것은 문제를 국지적으로만 해소할 수 있다. 노동이라는 행위의 법적 지위를 재규정하고, 최소노동조건의 적용을 보편화하는 것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업계 전반의 인식 재구성 필요하다"

문서희 청년유니온 기획팀장은 “(설문조사) 참여자들은 자신의 사용자인 실장에게서 사람으로 대우받는 게 아닌 ‘부속품’ 혹은 ‘부품’ 같이 느껴졌다고 했다”며 “의상을 대행사에서 가져오고 반납하는 단순 업무만 하루 종일 반복한다든지 턱없이 부족한 용돈 수준의 임금을 받으면서 장시간 노동을 하는 과정에서 주체성을 가진 노동자가 아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굴레에 빠졌다”고 전했다.

사람을 대할 때 자기 밑에서 일 해주는 직원들에 대한 감사함이 없고, 갈아 끼우는 부품처럼 느낀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퀵 일하러 온 게 아닌데 무작정 협찬만 돌린다거나. 현장만 무작정 돌린다거나. 착장은 자기가 다 하고 현장만 다 동생 보내고 그런 식으로. 그리고 기본적인 대우도 안 해주고 밥시간도 안 주고. 기계처럼 생각을 할 때.

되게 무시하잖아요. 한 번, 제가 샵을 갔어요. 옷을 드리러. 뭐였지? 드라마였는데, 그 언니 샵을 갔는데. 헤어하고 있길래 혼자 샵 피팅룸으로 갔어요. 그러고 그냥 쳐다보고 있었어요. 저 맨 뒤에서. 근데 헤어 해주시던 분이 절 보고 뭐야 ‘누구야~ 옷 왔다.’ 이러는 거예요. 그니까 저를 옷이라고 표현을 한 거죠. 그게 너무 기분이 나쁜 거예요.

위 사례는 청년유니온의 ‘2020년 패션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 노동실태조사 결과보고서’ 심층인터뷰 일부다. 진재연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국장은 “꿈을 찾아 방송현장에 발을 디딘 젊은이들이 일회용품 취급당하다 버려지는 일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노동착취, 열정착취를 정당화하는 구조는 차별적이고 위계적인 문화를 먹고 커져왔다”며 “위계와 서열을 중시하는 문화,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문화, 부조리한 행태를 거부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원래 그런 것은 없다”고 꼬집었다.

진 사무국장은“(소비자들도) ‘우리가 소비하는 산업이 부당노동을 방치하고 있다’는 인식을 먼저 가져야 한다”며 “더 많은 직군,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괄하기 위한 다양한 기획과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