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노조 릴레이기고] ① 대학원생들은 왜 국회 앞 농성을 하게 됐나
[대학원생노조 릴레이기고] ① 대학원생들은 왜 국회 앞 농성을 하게 됐나
  • 참여와혁신
  • 승인 2020.10.12 16:12
  • 수정 2020.10.12 16: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필자_ 신정욱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지부장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지부장 신정욱, 이하 대학원생노조)가 지난 10월 6일부터 국회 앞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대학원생이 국회 앞 농성을 해야 할 정도로 절박한 사정이 있는지 궁금해 합니다.

대학원생들이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2019년 12월 발생한 경북대실험실 폭발 사고였습니다. 학업 및 노동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임에도 피해 학생은 산재보험을 적용받지 못했습니다. 수억 원에 달하는 치료비를 대학도 사회보장제도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피해 학생과 가족들은 외줄을 타는 심정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피해사례들을 모아보니 공통적인 사항이 있었습니다. 피해 학생들 상당수가 조교, 학생연구원 등 학업과 노동을 병행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노동을 할수록 대학 또는 교수와의 종속성이 강해졌지만, 문제 발생 시 대응할 수 있는 방어수단은 전혀 없었습니다.

대학원생노조는 실험실 사고로부터 안전한 대학, 권력형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대학을 만드는 핵심 대안이 바로 학생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대학원생의 노동기본권 보장을 비롯한 각종 대학공공성 확보를 위한 예산 근거를 만들기 위해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 역시 제정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정기국회가 끝날 때까지 법안 쟁취를 위해 농성을 지속하겠다는 대학원생노조, 그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릴레이 기고를 통해 듣습니다. 기고는 10월간 총 다섯 번 연재될 예정입니다.

신정욱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지부장 ⓒ 대학원생노조

대학원생 ‘농성’은 직접 바꾸겠다는 주체성의 발현

2020년 10월 6일 대학원생노조는 국회 앞 농성에 돌입했다. 대학과 정부가 경북대 피해학생을 외면하는 모습이 우리를 더욱 더 절박하고 독하게 만들었다. 요구의 핵심은 결국 대학원생조교, 학생연구원, 학회 간사, 대학 강사들의 온전한 노동기본권 보장이다. 실험실 안전 강화, 권력형 성폭력 근절 등의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기도 하다. 결국 모든 사업장에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고 모든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 권리 보호를 받지 못한 사각지대 노동자를 구제하라는 요구로 모두 수렴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대학원생을 향한 다양한 시선이 존재한다. 한 때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대학원생 관련 밈을 보면, “한순간 잘못된 선택으로 고생하는 불쌍한 사람들”로 묘사되는가 하면, 일각에서는 그나마 먹고 살 만하니까 대학원까지 진학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해된다. 이런 단편적인 시선은 다소 과장된 것이지만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대학원생들의 다양한 삶을 포괄할 수 있는 설명이란 ‘학업을 지속하기 위한 대가를 치른다’ 정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대가란 곧 돈이다. 학자금 대출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 대학원생 대다수는 학업과 함께 여러 노동을 병행해야만 한다. 이것이 직업으로서의 대학원생인 조교·학생연구원·학회 간사가 있는 이유다.

“학생은 학업을 목적으로 노동하지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하지 않는다”며 일하는 대학원생의 노동자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웃기는 소리다. 도대체 학업을 목적으로 노동한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 노동력 제공의 대가를 등록금 납부 용도로 쓰기 때문이란 건지, 배움을 갈구하기 위해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건지. 전자라면 임금 곧 화폐의 교환가치에 대한 몰이해이고 후자라면 중세시대나 어울릴법한 구시대적 반노동 발상이라 비꼬고 싶다. 심지어 학생이 ‘등록금 납부’로 주어진 자격임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우리 역시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하는 남들과 다를 바 없는 노동자다.

학생과 노동자의 이분법에 반대한다

내가 학부생이었을 때 학과 조교 선배들의 나이는 대략 30대 중반이었다. 각종 행정 업무에 시달리며 업무에 관한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으면서도 조교 선배들은 근로기준법 적용은커녕 ‘노동’를 대가로 ‘근로장학금’을 수령하는 장학생 취급을 받았다. 학생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우리 사회에서 학생과 노동자의 이분법은 아주 견고하다. 많은 사람들이 학생은 예비노동자일 수는 있어도 노동자일 순 없다고 생각한다. 학생의 나이가 많아도 그렇다. 학생을 영원히 미성숙한 존재로 남기려고 하는 것. 배움이란 포장지를 씌워 저임금으로 싸게 부려먹는 것. 이것이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면 무엇일까.

대학 소속 학생연구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지정된 실험실에서 정해진 시간 출퇴근하며 고용종속관계 속에서 업무지시를 받으며 매월 정기적인 임금을 받고 생활한다. 조금만 살펴보아도 너무도 명징한 노동자성 판단의 지표들은 ‘학생다움’이라는 이데올로기 앞에 다 뭉그러진다. 대학과 일부 교수들은 학업과 노동을 내용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웃기는 건 일반 직장에서도 배움과 노동의 경계를 설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모든 노동자는 숙련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것 역시 일상노동 속에서 축적되는 것 아닌가? 역으로 묻고 싶다. 직장인의 노동은 어디까지가 배움이고 어디까지가 노동인가?

대학 연구실은 이미 거대 공장이다

오늘날 대학 연구소, 정부출연연구소, 민간연구소는 모두 연구과제기반시스템(Project based system) 위에서 운영된다. 국가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정부연구개발과제를 기관에 발주한다. 프로젝트를 얼마나 많이 가져오는지가 연구자의 실력처럼 여겨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대학 연구실은 매해 약 5조 원의 국가R&D과제를 수주하는 공룡 기관이다. 그런데 대학에서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연구원들 대다수가 바로 대학원생이다.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최종 결재하는 것은 교수이지만 과제의 상당 부분은 대학원생이 직접 진행한다. 저임금-장시간으로 대학원생을 부려먹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대학이 가진 진짜 연구경쟁력이다. 실상은 교육기관이 아닌 공장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묻고 싶다. “대학은 이미 거대 기업이고 교수는 중소기업 사장인데 우리가 노동자가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2019년 12월 임계점에 달한 착취 구조에 정점을 찍은 사건이 발생했다. 경북대 화학관에서 실험실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2명의 학생이 중증 화상을 입은 것이다. 학업-노동의 과정에서 교수가 지시한 일을 하다 발생한 사고였음에도 경북대와 정부 부처의 후속 조치는 한심하기만 하다. 경북대는 치료비 지급 약속을 번복하는 등 교육기관으로서의 책임을 방기하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과기부는 매년 1건 이상의 실험실 중대재해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실비보험 수준의 ‘연구자보험’ 보장한도만 조금 상향하는 등 언발에 오줌누기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 사고는 대학과 정부의 책임방기로 인해 발생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애초부터 대학 실험실 현장에 산업안전보건법을 적용하고, 학생연구원들에게 산재보험을 적용하였으면 되었을 일이다. 학생들에게 노동자 지위를 보장하지 않아 생겨난 일이다. 그러기에 대학과 정부가 경북대 사고 피해자 구제를 책임지고 산재보험법 개정을 해야만 한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건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이젠 직접 행동해 바꿀 것이다. 국회 투쟁을 결의하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연대의 손길을 느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과 함께 싸운다는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원칙대로 꿋꿋이 버티며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