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의 노동자들①] 세계 최고 배 만드는 자부심도 무너뜨리는 현실
[조선소의 노동자들①] 세계 최고 배 만드는 자부심도 무너뜨리는 현실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1.10.12 00:00
  • 수정 2022.01.1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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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크는 찬다는데 사람은 빠져나가고
“될 수 있으면 나가고 싶다” 그럼에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

조선소의 노동자들① 떠나고 싶은 조선소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전경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파란 하늘과 그보다 더 파란 바다 사이에 주황색 크레인이 솟아 있다. 오후 5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도크 인근 서문에서는 회색 작업복을 입은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하나 둘 퇴근길에 오른다. 오른쪽 가슴에는 대우조선해양의 마크, 왼쪽 가슴에는 이름 모를 하청업체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다. 2016년 조선업 위기가 가시화 되고 5년이 지났지만, 십수 년간 잔업과 철야를 반복해온 조선소 노동자에게 정시퇴근은 낯설다.

한국 조선업이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의 일이다. 중국의 경제성장이 궤도에 오르면서 선박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랐고, 근대 조선업 역사상 최고 호황기를 누리던 시기였다. 조선소의 일이 다소 위험하지만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로 전국에 알려진 시점이기도 했다.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빅3라고 불리는 조선소 중 두 곳이 위치한 거제는 조선소의 도시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IMF를 모르던 거제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예전에는 ‘외주’라 불렸고, 지금은 ‘하청’이라고 불린다. “조선소의 배는 하청 노동자가 만든다”는 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한 기억밖에 없어요”

“보통 새벽 5시에서 6시에 일어나서 6시 30분이면 통근차를 타고 회사에 들어가요. 아침 먹고 출근 준비를 하죠. 통영에서 오시는 분들은 5시쯤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저 같은 경우는 거제에 살지만 살림을 살아야 하니까 5시 반 정도에 일어나죠. 새벽에는 아침이 안 들어가니까 회사에서 아침을 먹어요. 옷 갈아 입고하면 7시 반 넘거든요. 7시 40분 되면 현장에 들어가죠.”

50대 후반의 전혜은 씨는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명천에서 일한다. 경력 20년차 용접사다. 통영 출신이었던 그는 결혼을 하면서 남편이 사는 거제로 이주했다. 1990년 후반부터 가계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맞벌이를 시작했다. 새천년이 밝았다고 떠들썩했던 2000년 혜은 씨는 슬하의 외동딸을 막 초등학교에 보내고 조선소에 들어왔다. 서른다섯 적지 않은 나이였다.

조선소는 다른 직장보다 하루의 시작이 빠르다. 조선소 출근시간 8시는 일터에 도착해야 하는 시간이 아니다. 조선소에서는 통상적으로 8시 전에 모든 일할 준비를 마친다. 실제 도크에서 작업을 시작하는 시간이 8시다. 점심시간 1시간, 오전 오후로 10분씩 휴식시간 이외에는 강도 높은 업무가 이어진다. 퇴근 시간은 업무 종류에 따라 오후 5시 혹은 6시. 잔업이 있으면 8시 반, 9시 반까지 퇴근시간이 늦춰진다.

“바쁠 때는 한 달에 한 번, 두 번 쉬기도 힘들었어요. 거의 주말이 없어요. 토요일 일요일 잔업도 많고, 몸이 너무 피곤하면 연차 써서 주중에 하루 쉬든지요. 그렇게 십몇 년을 일했어요. 최근에야 일이 없으니까 해를 보고 퇴근하는데 예전에는 해를 보고 퇴근한 적이 거의 없었어요. 별보고 나와서 별보고 들어가고. 애도 자는 얼굴 보고 들어가고 나오고.”

수주 절벽. 조선업의 위기는 노동자에게 정시퇴근으로 나타났다. 대우조선해양의 하청업체 유림산업에서 일하는 이학수 씨는 “일한 만큼 돈도 된다는 소식”에 이끌려 2006년 서른의 나이에 거제로 나려왔다. 그는 도면에 맞게 철판을 자르고 가용접하는 취부사로 15년째 일하고 있다. 학수 씨는 최근의 조선업 위기를 겪으며 지난 호우시절을 되돌아보게 됐다. 지금과는 다르게 사람이 모자랄 정도로 일이 넘쳐났었지만, 그 때가 정말로 좋은 시절이었는지는 의문이 든다.

“조선소 일이 옛날에는 돈 많이 가져갔다. 뭐 개도 만 원짜리 물고 다녔다고 그러는데 실제 일하는 노동자의 임금은 높은 게 아니었어요. 토요일 일요일에도 일하면서 그 당시에 2~300만 원. 옛날에는 돈의 가치가 지금보다 높았으니까 많다고 하겠죠. 그런데 일하는 시간에 비하면 절대 많은 건 아니었어요. 2배, 3배로 일을 많이 해서 임금을 많이 가져갔을 뿐이지.”

조선업과 거제가 눈부시게 잘 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혜은 씨와 학수 씨가 기억하는 그 시절 개인적인 추억은 너무나도 빈약했다. “돈 벌어오는 기계” 그 당시 자신들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혜은 씨는 하나뿐인 딸에게 미안한 감정이 앞선다. “애한테는 정말 미안하죠. 딸 애 초등학교 보내놓고 뒷바라지 못해준 것도 있고 함께 한 시간이 없었죠.” 학수 씨도 “일한 기억 밖에 없다”고 말한다. “가족과 추억은 사실 별로 없어요. 동료들과 회식자리는 자주 가졌지만 그렇다고 일을 빼먹지는 못했거든요.”

불황 속 무너진
조선소 하청 노동자의 삶

노동조건은 마치 모래성과 같다. 불황은 파도처럼 견고해 보였던 모래성을 무너뜨린다. 혜은 씨는 “우리도 모르게 누렸던 것들이 위기가 오니까 전부 복지였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모든 게 없어진 거죠”라고 말한다.

조선업의 위기는 1차적으로 노동자에게 많이 일할수록 많이 버는 기회를 없애버렸다. 이는 직영이든 하청이든 조선소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동일하다. 그러나 불황에서 고용형태의 차이, 노동조합의 조직력 차이는 결정적이다. 하청 노동자에게 조선업의 위기는 삶이 팍팍해졌다고 표현할 정도가 아니었다. 일과 삶의 균형은 꿈도 꿀 수 없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환경에서도 하청 노동자들이 돈 벌어오는 기계를 자처한 이유는 월급봉투의 두께만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조선업 위기에서 하청 노동자들은 예전과 같이 가정을 영위할 수 없다는 사실과 마주했다.

조선소 하청업체 노동자는 본공과 물량팀으로 나뉜다. 본공은 상용직으로 채용되고 일한 시간에 비례해 월급을 받는다. 반면 물량팀은 단기계약을 맺고 일하는 시간에 관계없이 작업한 물량만큼 돈을 받는다. 물량의 단가는 납기일 등 일의 시급성에 따라 오르내려 본공보다 상대적으로 월마다 가져가는 수입이 높다. 대신 본공은 상용직이기에 물량팀보다 고용이 안정적이다. 퇴직금이나 상여금, 성과급, 자녀학자금 등 복지의 대상이다.

단기계약으로 일을 하던 물량팀은 조선업 위기가 닥치자 소리 소문 없이 가장 먼저 잘려나갔다. 깊은 불황의 수렁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본공도 예외일 수 없었다. 마이너스 영업이익을 기록하는 와중에 성과급은 기대조차 어려웠다. 성과급 550%는 최저임금 인상과 더불어 기본시급에 녹아들었다. 숙련도에 따른 고기량자와 저기량차의 임금 차이는 최저시급선에서 하향평준화 됐다. 학수 씨는 “상여급을 녹여서 최저시급을 위로 맞춰놔서 최저시급을 올려도 위반이 아니게 됐어요. 현실적으로 지금 조선소의 90%가 최저시급자예요. 기량이 20년 된 사람이나 바로 입사한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이김춘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조직사업부장은 이러한 사태를 “본공 중심 생산구조가 무너졌다”고 표현한다. 본공들이 조선소에서 남아 일할 이유가 대거 사라진 것이다.

“한국 조선업이 하청 중심의 생산구조이면서도 세계적으로 품질을 유지할 수 있던 비결 중 하나는 본공이에요. 본공들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긴 하지만 업체가 폐업해도 고용이 승계되면서 근속이 10년, 20년, 30년 보장 될 수 있었어요. 이 업체에서 일하다 저 업체로 소속이 변경되긴 해도 대우조선에서 20년, 삼성중공업에서 20년 할 수 있었죠. 본공들이 근속을 유지하게끔 하는 유인책이 성과급, 상여금, 학자금이 있었는데 2016년부터 그게 무너진 거예요.”

없어지는 본공
불안해져가는 삶

조선소의 본공과 물량팀의 차이는 하나 더 있다. 본공은 일감을 찾아 “목포에서 울산까지” 떠도는 물량팀과 달리 한 지역에서 정착하여 생활한다. 조선업 위기에 가장 먼저 잘려나갔던 물량팀 노동자들은 육상 플랜트,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 발전소 정비 현장 등 전국으로 일감을 찾아나갔다.

하지만 이미 지역에 삶을 뿌리내린 본공들은 쉽사리 그런 선택을 내리지 못한다. 본공들은 조선소에서 잔업과 특근으로 보냈던 시간을 이제는 부업을 하면서 보낸다. “제 주변에도 많아요. 조선소에서 일만 해가지고는 감당이 안 되니까 퇴근해서 배달 라이더나 학원차 운전, 대리운전하는 분도 있어요.” 학수 씨는 말한다. 혜은 씨도 사정은 마찬가지지만 조선소의 도시 거제에서 여성으로서 마땅한 부업을 찾기 어렵다며 “이 임금으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한다”고 털어놨다.

물량팀이 아닌 본공으로 일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나마 좀 더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를 택했다는 의미다. 혜은 씨는 물량팀과 본공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다.

“직장이라는 게 안정적이어야 하잖아요? 가령 명절 때 쉬어도 유급으로 돈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물량들은 안 나와요. 그러니까 일이 있으면 있는 대로 회사에서 나오라고 하면 가서 일하는 거예요. 물량팀이 가져가는 현금은 더 많아요. 돈내기식이라고 하잖아요? 자기가 한 만큼 가져가고. 지금 상여금을 안 받지만 상여금이나 성과급, 학자금 같은 혜택은 안주고. 우리는 그런 불안정한 생활을 안 하려고 상용직으로 있는 거예요. 회사에서 물량팀 부려먹기 좋겠죠. 책임 안 져도 되니까.”

혜은 씨는 지난해 하청업체 명천과 ‘정리해고 투쟁’을 벌였다. 하청업체 본공들에게 정리해고는 없는 말이었다. 업체가 폐업을 해도 본공들은 다른 업체로 고용이 승계돼 왔기 때문이다. 혜은 씨도 용접사로 20여 년 일하는 와중에도 작업복 왼쪽 가슴의 회사 이름은 숱하게 바뀌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고용승계가 거부됐고 물량팀으로 일하든지 혹은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명천에서 최초로 정리해고 구조조정을 했죠. 실제 조선소에서 정리해고라는 게 없어요. 왜냐면 힘든 일 내가 하기 싫으면 떠나고. 그러니까 내가 힘들어서 때려 치우고 나가고,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그랬는데. 그렇게 사람을 억지로 내보내려고 한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구조조정을 하면서 사람들 내보내기 위해서 공식적으로 한 거죠.”

현재 조선소 하청업체에서 본공 일자리는 구하기 어렵다. 학수 씨는 “지금 대우조선도 본공을 자꾸 없애고 물량팀을 늘리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어요. 폐업을 하더라도 물량팀으로 가면 받아주고 본공으로 가면 안 받아주고요.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거(물량팀)라도 가야하는 입장이에요”라고 전했다. 조선업 위기는 하청 노동자들이 그나마 안정적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없앴다.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자부심마저 무너뜨리는 현실

학수 씨와 혜은 씨는 거제에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가정을 일구고 청춘을 바친 “제2의 고향” 거제에 대한 애정이 그들의 말 속에서 묻어났다. 그러나 조선소를 생각하면 피어올랐던 애정이 금세 식는다. 학수 씨는 “조금만 나가면 바닷가가 있고 공기도 깨끗하고 생활도 여러 면에서 괜찮아요. 조선업 구조만 아니면 정말 살기 좋은 동네가 아닌가 싶어요”라고 말한다. 혜은 씨도 거제가 자꾸만 싫어진다. “이미 노후에는 거제에서 보내긴 보내야 되겠죠. 떠나기가 참 힘든데 지금 생활이 너무 열악하니까 싫어지는 거죠. 자꾸. 그래서 견디고 있는 거예요.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

조선소의 노동자들은 조선소에서 일하면서 가족을 만들고 자식을 키우고 한 가정을 일궈냈다. 가장으로서의 자부심과 세계 최고 조선소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돈 벌어오는 기계’로 하여금 사람으로 버틸 수 있게 했을 테다. 조선업 위기가 무너뜨린 것은 돈이 아니라 노동자의 자부심일지도 모른다.

혜은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임금을 받아서 내 가정에 애도 키우고 대학도 보내고 집도 사고. 내가 열심히 산 것에는 보람을 느끼죠. 그런데 이제 내 자신을 위해서 뭔가 좀 모으고 싶은데 이렇게 되다 보니 노후도 준비가 안 돼있죠. 좀 일찍 알았다면 조선소를 빨리 떠나볼 건데. 조선소를 그만둬도 거제에서는 다른 걸 할 게 없으니까 다른 지역으로 갈 수밖에 없죠. …. 가야죠. 다른 일 찾아서.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서 가고 싶어요. 거짓말 안 하고. 내가 여지까지 가정을 이끌어 오고, 세계 최고 배를 만들면서 일한 것에 자부심이 있고 그래요. 그런데 그것마저 다 무너뜨리는 현실이라고 봐요. 실제로 왜 이렇게 내가 어리석게 살았는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리해고 통보받고 내가 진짜 너무 한 곳만 바라보고 어리석게 살았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허무하다. 다 무너져 내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