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의 노동자들②] ‘안정된 삶’ 찾아 떠난 이에게 필요한 건
[조선소의 노동자들②] ‘안정된 삶’ 찾아 떠난 이에게 필요한 건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1.10.12 00:01
  • 수정 2021.10.13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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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되고 위험한 조선소, 돌아갈 생각? “없습니다”
고향에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복잡한 속사정

조선소의 노동자들② 떠난 이가 돌아오려면

“청주에 하이닉스, 파주에 LG디스플레이 여기저기 현장에 가보면 진짜 삼성중공업 작업복이나 대우조선 작업복을 입고 다니는 분이 많아요. 거제에서 올라오신 분이 진짜 많다 싶었죠.” -김정현 씨

“맞아요. 먼저 온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형님 조선소 못 입지 마이소. 인식이 별로 안 좋습니다.’ 조선소 족장(발판)하고 건설 비계가 조금 다른데, 조선소 다닌 사람들이 비계 짠 것 보고 ‘짤 줄 모른다. 불량 많이 난다’는 말이 있어서 조선소 옷 입고 오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왔죠. 그래도 어마어마하게 입고 다니죠.” -김덕만 씨

위기 이후 조선소의 노동자들은 거제를 떠나 전국의 건설현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십수 년간 살아온 고향을 등지고 이들이 객지 생활을 자처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업 위기가 끝나간다는데 이들에게 다시 조선소로 돌아올 마음이 있을까.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김덕만 씨의 뒷모습. 덕만 씨는 현재 충남 대산석유화학공단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18년 경력 베테랑이
기억하는 조선소

통영 욕지도가 고향인 김덕만 씨는 2017년께 조선소를 떠났다. IMF 때 군대를 제대한 그는 벼룩시장 구인공고를 보고 1999년 거제 삼성중공업 하청업체에 입사했다. 공업 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학교에서 용접을 배웠지만 뭔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용접 대신 그는 배우기는 쉽지만 다소 위험한 발판공으로 조선소 경력을 시작했다. 조선소를 떠나기까지 그는 18년 동안 발판공으로 줄곧 지냈다.

덕만 씨는 성실했다. “일요일에 일하면 돈 더 받는다는 생각에 한 달에 월차 하루 쉬고 일했죠. 거의 쉬지도 않았습니다.” 개별적으로 임금협상을 할 때 삼성중공업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였다. 그 덕분인지 통영 신아조선에서 정규직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는 1999년부터 삼성중공업 하청에서 2~3년, 신아조선 정규직으로 4년, 다시 삼성중공업 하청에서 4~5년, SLS조선(옛 신아조선) 정규직으로 7년, 대우조선 하청에서 1년여, 삼성중공업 하청에서 2년 정도를 일했다. 위기 속 노동조건이 후퇴하던 2017년 덕만 씨는 청주의 반도체 공장 건설현장으로 떠났다.

이후 덕만 씨는 5년째 고향을 떠나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는 충남 대산석유화학공단 건설현장에서 일한다. 통영과 거제를 종횡무진 오갔던 18년 그의 조선소 생활에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조선소 경기 좋을 때 사람들이 억수로 많이 들어왔거든. 내가 30대 초반일 때, 20대 중반 애들이 들어오고. 그때 내가 반장 맡고 팀을 꾸려서 일했지. 손발이 맞아서 재밌다 해야 하나. 뭔 일 있으면 우리 팀 불렀지. ‘2도크 책임지고 진수 해줘라.’ 이런 거. (기자 : 요샛말로 에이스였네요.) 그렇지. 하하하. 에이스. 너희 팀이 좀 해줘라. 성과가 난다. 그게 아무것도 아닌데. 근데 공수시간표를 받아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들어도 잘 이해가 될까 모르겠는데.”

일에서 느끼는 기쁨을 찾기 어려워진 시대에 덕만 씨의 말은 꽤나 이상하게 들린다. 한 달에 하루밖에 못 쉬고 매일 밤늦게까지 일해도 일이 재밌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척척 호흡이 맞는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만 씨의 즐거운 기억은 동료들이 하나둘 조선소를 떠나면서 추억이 됐다.

“동료들 중에 두 명이랑 많이 친했어요. 제가 신아조선 가면서 한 친구가 반장을 했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이 사고가 났어요. 쉽게 말해서 죽지 않을 정도로 다치는 사고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그만두고 가버리더라고. 성격이 소심한 건 아닌데 여리고 착한 동생이었어. 또 한 친구는 자기가 물량팀 꾸려서 하다가. 예전에는 회사에서 물량팀 숙소를 잡아줬어. 그 친구가 숙소에서 목을 매가지고. 뒤에 들어보니까 한 번씩 훌라도 하고 그랬나 보더라고. 두 동생 중에 한 명은 일을 안 하고 한 명은 그렇게 갔지. 하여튼 그 친구들이랑 일할 때 참 재밌었는데.”

‘조선소 키드’가
기억하는 조선소

올해 서른한 살의 김정현 씨는 거제에서 나고 자랐다. 정현 씨의 아버지는 삼성중공업 하청업체에서 30년 이상 일했다. 어머니는 삼성중공업 앞에서 식당을 운영한다. 거제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그러하듯 정현씨도 ‘평범한’ 조선소의 가정에서 자랐다. “중학교 때 공부에 뜻이 없는 친구들 있잖아요? 거제에서는 조선소가 있으니까 애들이 나중에 조선소 가지 뭐.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만큼 조선소밖에 일할 곳이 없기도 하고요.” 정현 씨는 2012년 군대를 전역한 후 삼성중공업 하청업체에 들어가 2018년까지 일했다. 그에게 조선소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솔직히 말씀드려서요. 여기에서 좋았던 기억이라고 하면 생각이 나지 않아요. 알다시피 조선소 직종 자체가 3D직종이고, 내가 조심을 하더라고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현장이기 때문에 항상 긴장을 했었던 것 같아요. 힘들고 덥고 그런 기억이 많네요. 그중에서 좋았던 건 좋은 사람들 만난 거? 좋은 자리가 있을 때 연락도 오고 하니까요.”

정현 씨는 조선업 위기가 심화되면서 물량팀이 막 잘려나갈 때 거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당시 하청업체 물량팀 팀장으로 일하던 정현 씨는 어느 날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삼성중공업이 인원을 줄이라고 했다고 저희 팀에 이야기했죠. 그런데 누구 내보내고 이런 게 약간 떠넘기기 식이었어요. 저는 사람 줄이면 일 못한다고 하니까 다음날부터 나오지 말라. 그렇게 된 거죠.”

김정현 씨의 손. 정현 씨는 현재 부산 녹산공단의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김정현 씨의 손. 정현 씨는 현재 부산 녹산공단의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급작스러운 해고 통보는 회사와의 소송전으로 이어졌다. 정현 씨는 회사와 맺은 근로계약서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고, 지난 1년간 주휴수당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피켓시위 등으로 문제를 제기하자 회사는 명예훼손 소송으로 맞섰다. 이러저러한 소송이 4개로 불어났고 1년여 동안 이어졌다. 소송을 마친 후 정현 씨는 ‘지긋지긋함’을 느끼며 삼천포 발전소 건설현장으로 떠났다. 현재는 부산 녹산공단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조선업 위기는 정현 씨 가족에게도 위기를 안겼다. 정현 씨의 아버지는 하청업체에서 몇 개 반을 관리하는 ‘직장’이었다. 조선업 위기가 오고 어느 날 정현 씨 아버지의 작업복 왼쪽 가슴에 수놓인 ‘직장’이라는 직책이 매직으로 까맣게 덧칠해져 있었다.

“어느 순간 아버지가 명찰 앞에 직책을 펜으로 지우셨더라고요. 원래는 ‘직장’ 하고 아버지 이름이었는데. 왜 그런 거지? 처음에는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어머니가 말씀해주기로는 회사에 구조조정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대상자가 됐대요. 동생이 저랑 10살 차이나는 늦둥이인데 대학학자금을 받으려면 한 회사에서 7년을 더 근무해야 해요. 동생이 대학 갈 시기를 앞두고 있어서 아버지가 자존심을 버린 거죠. 박차고 나오면 끝나는데 직책을 지우고 일반 작업자도 돌아간 거죠. 그때는 다 그랬던 것 같아요. 직영으로 일하는 제 친구도 희망퇴직 했거든요. 그때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로 배가 없다고 했어요. 원래 배가 삼성중공업 도크장을 꽉 채우고 있었는데 배가 없었다고.”

조선소를 떠나면서 얻은
돈과 안전

조선소로 돌아올 생각이 있는가? 덕만 씨와 정현 씨에게 물었다. 정현 씨는 짤막하게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기러기 아빠 덕만 씨는 이렇게 말했다. “집에서 통근버스 타고 조선소 다니면 좋죠. 그런데 나이가 들고. 조선소에서 주는 그 돈 가지고는 살림이 안 되는 거죠. 묵고 살아야 하니까. 뭐 있겠습니까? 집 떠나서 힘든 부분은 감수를 하죠. 가장으로서 돈벌이 해줘야 가정도 돌아가고.”

두 사람이 조선소에 돌아오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일치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돈과 안전이었다. 건설현장에서 받는 처우를 들었을 때 정현 씨는 거짓말일 거라고 의심했다.

“먼저 조선소를 떠난 분한테 연락이 왔어요. 조건을 들었는데 너무 많이 차이 나는 거예요. 조선소에서 제가 일급으로 12만 원을 받았는데, 조선소에서는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해야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거기는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근무해도 18만 원을 준대요. 잔업을 하면 27만 원을 주고요. 같이 근무하는 친구랑 갔는데 거짓말이 아닌 거예요. 조선소는 오전 오후로 고작 10분 쉬면서 시간 준수하라고 막 쪼아요. 이쪽에 오니까 너무 편한 거예요. 일도 편한 데다가 쉬는 시간도 보장되고 돈도 많이 줘요. 어느 누가 돌아갑니까?”

덕만 씨가 현재 당진에서 지내는 방의 월세는 30만 원이지만 생활비를 제하더라도 조선소보다 곱절은 벌어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제가 세금 떼고 거의 500 후반은 벌거든요? 많이 벌면 700만 원대. 조선소 어찌 가겠습니까? 아는 친구가 족장 쪽에 소장을 하고 있어서 전화가 몇 번씩 왔었어요. ‘덕만아 반장 구하는데 온나.’ ‘얼마 주는데?’ 하니까 ‘370’ 이러더라고요. ‘400 맞춰주나?’ 하니까 못 맞춰준다 하더라고. 일도 편하지. 조선소 일이 힘드니까 돈을 여기보다 훨씬 많이 준다면 생각해 볼 수는 있지. 그런데 여기서 600~700씩 버니까 조선소는 1,000만 원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줄끼냐 말이지.”

노동자 6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25명을 다치게 한 2017년 5월 1일 삼성중공업 크레인 참사 당시 정현 씨는 야드에서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중이었다. “어릴 때도 그랬고 제가 근무할 때도 그랬고 ‘조선소는 하루에 한 명씩 죽는다.’ ‘불구되는 사람 진짜 많다.’ 그런 소문이 진짜 많았어요.” 그런 정현 씨가 건설 현장을 갔을 때 느낀 감정은 “너무 ‘지나치게’ 안전을 신경 쓴다”는 것이었다.

“하루에 안전 관리 하는 사람들이 안전수칙 위반하는 사람 사진을 10장 안 찍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미친 듯이 쪼아요. 처음에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생각해보니까 이 정도로 안하면 사람들이 안 지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여기는 엄청 심하게 관리하니까 사고가 안 나요. 오히려 제가 ‘이거 지금 하면 안 되겠다’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떠난 이가 돌아오려면

조선소의 도시 거제와 통영. 고향의 바깥에서 먹고 살 길을 찾는 두 사람의 심정은 복잡하다. 정현 씨는 조선업의 위기 속에서 ‘거제 사람’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사람들의 기대 섞인 열망을 기억한다. “솔직히 왜 왔는지 모르겠어요.” 2021년 9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삼성중공업을 방문해서 발표한 ‘K-조선 재도약 전략’은 너무 늦은 조치였다.

정현 씨는 “조선소에 저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남들도 그렇다고 할 거예요”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다른 한 쪽에는 정반대의 마음도 있어 안타깝다. “제 고향은 거제이고, 조선업이 잘 돼야 거제도 잘되니까. 그래야 어머니 장사도 잘 될 거고. 잘 됐으면 좋겠어요. 참 안타깝기도 하고요. 그런 것 같아요.”

덕만 씨는 18년 조선소 생활에서 두 번째 좋았던 기억으로 신아조선 정규직 시절 노동조합이 있었을 때를 꼽았다. 노동조합이 있어서 무엇이 좋았던 것일까. 덕만 씨는 노동조합이 자신이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줬다고 말한다.

“노동조합 없이 협력업체에서 일하다 보면 우리가 일하는 기계인가? 한 번씩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 총각 때 조선소 막 입사하고 들어갔을 때 한 번은 거제에서 통영까지 통근버스 타고 오는 길에 ‘내가 뭐하고 있지?’ 이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오늘 뭐하고 싶노’ 혼자 묻다가 갑자기 노래를 하고 싶더라고. 그래서 혼자 오락실 노래방 가서 한 시간 동안 노래 부른 적 있거든. 그러니까 그런 게 있었어.”

‘내 자식이 만약 조선소에서 일한다면’이라는 질문에 덕만 씨는 “정규직으로 가야지”라고 말했다. 덕만 씨가 말한 ‘정규직’은 단순히 고용형태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안정적으로 삶을 꾸려 갈 수 있다는 확실한 증표에 가까웠다. 조선소의 노동자들이 조선소로 돌아오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정규직 가야지. 하하하. 그런 마음이거든. 내 자식이 정규직을 못 가서 협력업체에 들어간다면 2년 이상 일했으면 정규직으로 취직시켜 주거나 그렇게 됐으면 좋겠죠. 아마 그러면 조선소에 사람이 갈걸요? 돈이 좀 작더라도 정규직이 된다는 게 있으면. 그런 부분을 사업주가 만들어주지는 않을 것 같고 누가 만들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