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민중 경선, 진보의제 모이는 장 될 것”
“노동자·민중 경선, 진보의제 모이는 장 될 것”
  • 정다솜 기자
  • 승인 2021.10.12 00:33
  • 수정 2021.12.21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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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노동의 중원과 청년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비전 제시해야”
[인터뷰]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동자·민중 경선’을 통해 현장 노동자들의 힘으로 대선 단일후보를 선출하자는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 150여 명의 제안이 지난달 29일 나왔다. (▶관련기사 :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 ‘대선 단일후보 선출 위한 노동자 경선’ 제안)

왜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노동자·민중 경선일까? 제안자 대표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은 “110만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주도하지 않는다면 각각의 이해관계가 대의보다 앞서는 진보진영의 분열을 극복하기 쉽지 않겠단 판단이 있었다”면서 “민주노총이 노동자·민중 경선을 주도하려면 결국 아래로부터 조합원들의 힘이 모여야 가능한데, 그 현실적인 방안이 경선”이라고 답했다.

한상균 전 위원장을 만나 노동자·민중 경선 제안의 구체적 배경, 현장의 반응, 실현 가능성 등에 대해 이야기를 더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7일 서울 종로구의 한 모임공간에서 진행했다.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 ⓒ 참여와혁신 송지훈 기자 jhsong@laborplus.co.kr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 ⓒ 참여와혁신 송지훈 기자 jhsong@laborplus.co.kr

“노동자·민중 경선, 
진보적 의제 모이는 경연의 장 될 수 있어”

- 지난달 29일 ‘노동자·민중 경선’을 통해 대선 단일후보를 선출하자는 제안을 했다. 제안 배경은?

현재 대선 정국은 보수양당이 점령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절박한 노동자⋅민중의 목소리를 대선 과정에 담아내는 역할은 진보진영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진영은 이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함께 힘을 모아 대응해도 단단한 양당체제를 깨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진보진영은 연대 전선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를 극복해야겠다는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있어서 노동자·민중 경선을 통해 현장의 힘으로 대선 단일후보를 선출해보자는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 왜 노동자·민중 경선이란 수단인가?

각 진보정당 내부에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진보진영과 함께 만들어갈 추동력이 부족하다면 제3의 힘이 필요하다. 제3의 힘으로써 110만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주도하지 않는다면 각각의 이해관계가 대의보다 앞서는 진보진영의 분열을 극복하기 쉽지 않겠단 판단이 있었다. 민주노총이 노동자·민중 경선을 주도하려면 결국 아래로부터 조합원들의 힘이 모여야 가능한데, 그 현실적인 방안이 경선이라고 봤다.

현 상황에서 경선이 아닌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제안해주길 바란다. 진보진영이 테이블에 앉아서 정치적 합의를 이루면 가장 좋겠지만, 우린 경선의 순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금같이 한국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는 상황에서 경선은 더 도발적이고, 더 급진적이고, 더 진보적인 의제들이 모이는 경연의 장이 될 수 있다.

대선 단일후보만 기계적으로 뽑는 경선이라면 별 의미가 없다. 경선을 통해 현장에서 정치토론이 일어나고, 지역별로 더 세분화된 의견도 모아내야 한다. 이 속에서 한동안 진보정치가 초심을 잃었던 시간을 복원하는 과정까지 담는다면 의미 있는 과정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노동자·민중 경선을 통해 선출된 단일후보가 곧 노동자·민중을 위한 후보라고 볼 수 있나? 민주노총 내에 더 많이 조직화된 진보정당이 유리한 거 아닌가?

민주노총 내 진보정당 진성당원 비율은 넉넉잡아도 전체 조합원의 10% 수준이라고 본다. 민주노총의 절대다수는 조직화되지 않은 조합원이기에 진보정당 조직화 비율로 경선의 유불리를 판단하는 것은 난센스다.

물론 진보정당 간 차이가 분명히 있고 각 당의 정체성이 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현장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조합원들은 진보정당들을 보수양당에 맞서야 할 하나의 진보세력으로 본다. 이런 눈높이에서 봤을 때, 민주노총 전체 조직이 대선 단일후보를 뽑는 과정은 특정 정당에 유불리가 크게 작동하지 않는 공평한 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애초 민주노총 중집은 지난달 15일 대선방침을 결정할 예정이었다. 노동자·민중 경선 제안은 왜 대선방침 결정이 미뤄진 이후에야 나온 건가?

고민은 훨씬 전부터 있었다. 노동자·민중 경선을 제안한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들은 특정 정당 소속이 아닌 일군의 절박한 사람들이다. 대선을 앞두고 이대로 가서는 민주노총의 정치 세력화도, 진보정당이 집권세력에 다가가는 문제도 점점 멀어질 것이란 불안이 컸기에 사전에 여러 논의가 있었다.

그런데 지난달 중집 전, 경찰이 민주노총 사무실을 급습해 양경수 위원장을 강제 연행한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 분노를 추스르고 민주노총이 양경수 위원장 구속 대응에 주력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대선과 노동자·민중 경선을 앞세워 이야기하기엔 상황적 한계가 있어서 제안이 늦어진 것이다.

“연대·연합 정치에 대한 
각 진보정당 입장 나올 것이라 믿어”

- 민주노총이 노동자·민중 경선이라는 대선방침을 결정하면 진보정당들이 참여할 거라고 보나?

진보정당들이 참여하도록 해야 하는 문제다. 5개 진보정당(노동당·녹색당·사회변혁노동자당·정의당·진보당)은 지난달 7일 민주노총과 단일후보로 대선을 돌파하겠단 선언적 기자회견을 했다. 이후 각 진보정당은 나름대로의 테이블에서 대선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까진 각 진보정당이 구체적 실행 계획까지 내놓지 못하고 있지만 곧 진보세력 연대·연합 정치에 대한 입장이 나올 것이라 믿는다.

5개 진보정당이 내세우는 주요 의제가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불평등 한국사회에서 배제되고 가장 힘들게 살아가는 계급을 우린 노동자·민중 계급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들의 삶을 위한 진보정당의 역할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진보정당의 역할을 공동 대응하는 문제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현재 물음표가 나온 거 아닌가? 그 물음표에 대한 돌파구 중 하나로 노동자·민중 경선을 제안한 것이다. 이에 대한 입장을 각 진보정당이 내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선언한 기자회견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 노동자·민중 경선 룰의 공정성은 어떻게 담보할 수 있나?

민주노총은 그간 전국을 커버하는 직선제를 훌륭하게 해내왔다. 경선 시스템에 대한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 우린 그럴 실력이 있고, 사회적 시스템도 가능한 시대에 와 있다.

- 경선 규모가 민주노총 조직보다 더 클 텐데?

그렇다. 이번 경선을 노동자 경선이 아닌 노동자·민중 경선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노동자·민중 경선에 동의하는 시민사회단체, 진보단체, 민주노총 조합원 외 진보정당 당원이 모두 함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들은 전자투표라는 방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자투표라는 수단 자체에 유불리가 있을 수는 있겠다. 그런 논의를 해야 할 단계에선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노동자·민중 경선의 공정성을 포함해 내년 3월 대선, 이어지는 6월 지방선거를 어떻게 대응할지까지도 상당히 밀도 있는 정치협상들이 필요한 상황이다.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 ⓒ 참여와혁신 송지훈 기자 jhsong@laborplus.co.kr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 ⓒ 참여와혁신 송지훈 기자 jhsong@laborplus.co.kr

“노동자·민중 경선,
중단됐던 현장 정치토론의 촉매제”

- 노동자·민중 경선 제안 이후 현장 반응은 어떤가?

현장에선 생소하게 생각한다. 민주노총이 이런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제안하거나 주도한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런 걸 왜 제안하십니까?’부터 ‘그게 가능합니까?’까지 조합원들의 많은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민주노총엔 민주노동당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전체 조합원의 35% 이상 될 거라고 예상한다. 이들은 민주노총이 태동부터 노동자 정치 세력화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이것이 민주노동당이라는 역사를 거쳐 또 분열의 역사를 지나 현재에 와 있다는 것을, 여전히 우리는 그 목표를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는 역사성을 모르고 있다. 이 점을 현장에서 많이 느끼고 있다.

이 외에도 과연 우리가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위한 실력이 있느냐는 실력론도 제기된다. 지금 우리의 준비가 부족하고, 대안이 없고, 비전이 없어서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많이 듣는다. 현장에서는 진보정당 간 차이를 진보정치의 분명한 비전으로 좁혀내지 않는다면 진보정치와 조합원 간 간격은 더 멀어질 것이라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민중 경선, 더 나아가 노동자 대통령 시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정치토론의 장이 열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자·민중 경선은 그간 중단됐던 현장 정치토론의 촉매제가 되고 있다. 더 많은 조합원이 다시 한번 진보정치를 나의 문제로 받아 안는 계기가 된다면 노동자·민중 경선의 성과는 결코 작지 않다고 본다.

- 현장에서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생소하게 느낀다는 점이 공감된다.

나도 생경하다. 나는 투쟁의 현장에서 계속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에서 살아왔다. 투쟁하는 절박한 노동자들은 차선으로 을지로위원회를 찾아간다든가 보수정당에 도움을 요청한다. 노동자 직접정치의 힘과 의회의 역할이 연동되면 좋겠지만, 그 정도까지 우리가 정치 세력화를 하지 못하다 보니 씁쓸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차선을 선택해온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건 아니다. 상위 10%의 가진 자들의 대변자로 확인된 국민의힘이나 더불어민주당의 정치는 노동자·민중의 이름으로, 노동자 정치로, 진보정치로 끝장내지 않으면 다른 돌파구는 없다고 본다. 지금 조합원들이 노동자 정치에 대한 작은 공감으로 시작하더라도 다양한 소통 방식이 많아진 만큼 우리는 노동자 정치의 길을 끊임없이 찾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 노동자·민중 경선 조합원 서명운동 추진모임은 “노동자·민중-진보 진영은 잘게 나뉘어져 있다.··· 각자 한국사회의 근본적 개혁이나 혁파와 관련해서는 자포자기인 채 아주 작은 영역을 고수하며 자족하고 있다”는 현실을 지적했다.

진보정당들이 전체 진보정치의 희망이 되진 못하지만, 각자 영역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양당 독점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선 내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라고 표현하는 공동연합전선을 만들어야 한다. 진보정치의 집권으로 가는 길에 진보진영의 연합정치는 전 세계에서 당연히 벌어지고 있는 상식이기도 하다.

*‘천하를 셋으로 나눠 갖는 계책’, 두 강자의 대립의 구도에서 약자가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는 전략을 뜻한다.

- 삼분지계를 만드는 공동연합전선은 어떤 뜻인가?

노동자·민중 경선의 핵심은 진보진영을 통합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생태운동, 기후운동, 평화운동, 성소수자운동, 청년운동, 인권운동, 이주운동 등 각 진보진영의 장점이 조화롭게 엮여야 한다. 그래야 진보진영이 이 땅의 전체 노동자·민중이 믿고 맡길 수 있는 내비게이션이 될 수 있다. 각양각색의 의견, 주장, 비전이 하나로 뭉쳐야 노동자·민중을 견인할 제대로 된 동아줄이 되고, 결국 그 힘으로 집권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에선 최근 대선보다 지방선거에 주력하겠다는 이야기도 없지 않아 들린다. 진보진영의 연대 가능성을 낮게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아픈 시간이다. 지금부터라도 상처들을 딱지 지게 해야 한다. 또한 진보진영 간, 진보정당 간 아직 해소되지 않은 갈등도 있는데 이 갈등을 연결하는 역할도 필요하다. 노동자·민중 경선을 시작으로 진보진영이 서로 연결됐을 때 이런 갈등이 풀리고 상처도 자연스럽게 치유될 거라고 생각한다.

“소홀했던 노동자 정치 세력화 시간 
다시 정립하는 계기 될 것”

- 민주노총의 노동자 정치 세력화는 왜 성공하지 못했나?

민주노총에는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고 진보정치의 희망을 키워왔던 시간들이 있다. 그런데 ‘정치는 진보정당들이 하시오, 우리는 지원자 역할만 하겠소’라는 식으로 민주노총이 잘못 판단한 시간이 있었다. 민주노동당이 모든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전담하는 기구처럼 당과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을 따로 봤다. 한때 민주노동당이 정당지지율 20% 수준까지 높은 지지를 받았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굉장히 미약한 상황까지 왔다. 현재까지 진보정당들이 분열되어 있는 것은 그런 맥락이 주효하게 작동됐다고 본다.   

반면 세계 곳곳에선 노동자가 중심이 된 계급투표로 여러 정당들이 집권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노동자를 대표하는 조직이 진보정당에 정치를 위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정치를 직접 주도하겠다는 목소리를 우리나라 보수언론 등은 매도한다. 왜? 무서우니까. 민주노총 같은 조직이 마음먹고 한목소리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정치적 파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러면 부패하고 비전 없는 기득권 체제는 자기 기득권을 내놔야 하는 과정이 기다리게 되니, 이번 대선에서도 보면 민주노총을 탄압하겠다는 이야기를 앞다퉈 하는 것이다.

진보진영이 연결되는 순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조직된 노동자들이 진보정치를 주도할 때만 미조직 노동자들, 불안정 노동자들, 비정규직, 근로기준법 밖에 있는 그야말로 보편적 권리마저 빼앗긴 노동자들이 ‘당신들 주장이 맞다’며 함께할 것이다. 조직 노동자들이 자기들 밥그릇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의 노동자 문제에 대해서 진심을 다하고 진정성 있게 다가서고 있다는 장면들이 포착될 때 노동자·민중 계급투표의 한 서막은 열릴 것이다. 지금이 그럴 시기다. 늦지 않았다. 이번 노동자·민중 경선은 그간 소홀했던 노동자 정치 세력화의 시간을 다시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고, 그렇게 돼야 한다.

- 노동자 정치 세력화는 왜 해야 하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노사관계를 통해 더 나은 삶으로 현실을 바꿔나가는 것이 노동조합이었다. 그런데 공장 안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열심히 하더라도 사회보장제도 등 국가 정책에 따라서 노동자의 삶은 흔들린다. 부동산, 교육, 의료, 통일 등 삶의 주요한 문제는 공장 밖 문제다. 이 문제를 기존 정치인들한테만 맡겨서 그들이 이 사회를 잘 끌고 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런 현실 아래 노동자들이 정치에 개입하기 위해서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이 만들어진 것이다. 만들었으니 사회에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노동자 정치이자 노동자 정치 세력화다.

이 과정에서 정당을 만드는 것만이 노동자 정치 세력화는 아니다. 정치적 요구를 잘하는 집단으로 성장하는 것도 노동자 정치 세력화의 중요한 결이다. 다만 정당을 통해서 다수의 지지를 받아야 노동계급이 집권할 수 있기에 정당이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총, 조직된 노동자들이 집단적 요구를 하며 그 힘으로 광장의 정치를 하고 정치에 직접 뛰어들어 정당정치도 한다. 이 과정이 노동자 정치 세력화인데, 이 나라는 제도적으로 막고 있다.

-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제도적으로 막고 있다는 건 무슨 뜻인가?

이 나라는 노동자·민중의 목소리를 정치에 담을 수 있는 제도적인 민주화가 안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비례대표제를 왜곡하는 위성정당 문제, 결선투표제를 통해서 소수정당들의 의견이 합법적으로 반영되는 시스템의 부재 문제 등이 있다. 그러다 보니 정치는 상위 10%를 대변하는 정치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정치는 비전을 못 보여줬고, 학교에선 고등학생들이 투표권을 갖고 있는데도 선생님이 정치를 가르칠 수 없고, 민주노총은 진보정치를 주도하지 못했다. 이 삼 박자가 맞아떨어져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노동자 정치, 진보정치를 더 나은 가치로 보지 않게 됐다.

결국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이 임단협만 잘하고, 공장 안에서 권리만 잘 찾으면 되지 무슨 정치냐’라고 하게 된다. 사회에선 경쟁만 잘하면 되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살아남는 자가 강자다. 나는 이런 패러다임에 크게 충격받은 사람이다. 아직도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 투쟁 이후 트라우마가 남았다. 요즘 인기인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란 드라마에서 주인공 기훈이 쌍용차가 모티브인 ‘드래곤 모터스’의 구조조정에 맞서다가 동료가 경찰에게 맞아 사망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데, 이는 드라마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대선에서 패배, 
늦은 패배를 자임하는 시간 될 것”

- 노동자·민중 경선을 통해 대선 단일후보가 선출되어도 당선 가능성은 낮지 않나?

당장 진보진영이 큰 합의를 한다더라도 이번 대선에서 바로 집권하긴 어렵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민중 경선을 온전하게 성사시킨 역사는 아직까진 없다. 공식적으로 진보정당들이 합의를 이뤄내고,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참여해 진보정치의 깃발을 들고 이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는 기치로 나아갔던 역사가 없단 뜻이다.

이번에 그 길의 첫걸음을 떼고, 대선에서 진보적인 의제를 국민에게 분명히 제시한 다음의 패배는 패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득권을 독점하려는 세력에게 대선에서 패배는 치명상이겠지만, 우린 아니다. 진보진영은 가야 할 길이 분명하기에 이번 패배는 오히려 지난 몇 번의 대선 전부터 해야 될 패배였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는 너무 늦은 감이 있는 패배를 자임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는 당당한 패배이자 비전을 싹 틔우는 패배다. 또한 희망의 싹을 틔우는 소중한 시작이자 삼분지계의 출발이 될 것이다.

그렇게 출발했으면 좋겠다. 그랬을 때 이 의미가 다음 지방선거로 바로 이어질 것이라고 본다. 사실 우리 안에 진보정치의 비전이 안 보여서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역량들이 있다. 이분들에게 이제 당당히 나서고 힘을 모아보자는 계기가 되는 노동자·민중 경선이 됐으면 한다.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 ⓒ 참여와혁신 송지훈 기자 jhsong@laborplus.co.kr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 ⓒ 참여와혁신 송지훈 기자 jhsong@laborplus.co.kr

“진보정치, 노동의 중원과 청년이 
희망 품을 수 있는 비전 제시해야”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노동의 주문이 중요하다. 노동자 계급정치가 본궤도에 오르려면 노동이라는 큰 원을 그려봤을 때 중원이 어딜까? 근로기준법 밖 노동자들, 4대보험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들, 노동을 하고 있지만 사용자로 둔갑된 신분으로 살아가야 하는 절대 다수의 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들, 노동조합을 통해서 나의 권리를 찾는 것이 헌법으로 보장되는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워서 노동조합을 만들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그런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야 한다. 

진보정치는 노동의 중원과 청년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한 번의 패배로 평생을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을 위해 패배가 오히려 더 나은 삶으로 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 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일들을 도발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진보정치의 시대를 여는 것이 역사의 소명이다.

그리고 더 급진적인 화두를 가지고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프랑스, 독일 녹색당 등 많은 나라들이 기득권 정당에 파열구를 내고 있다. 노동자 직접정치에 대한 가능성이 아니라, 그 시대를 이미 열고 있다.

아울러 한국사회에선 MZ세대라고 하는 젊은 층은 세대가 아닌 시대의 주역이다. 우리 시대의 주역들이 제대로 된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방향이 돼야 한다. 나 같은 기성세대들은 많은 것들을 책임져야 하고 반성해야 한다.

이번 노동자·민중 경선을 통해서 진보진영이 서로 성찰하고, 비전을 확인하고, 비전을 희망으로 발효시키는 효소가 되길 바란다. 노동의 중원을 향해 희망으로 연대가 넓어질 수 있도록 조직 노동자들이 그 효소를 자처하는 노동자·민중 경선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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