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하는 언니들① “무엇이 차별인지 아는 게 시작”
노조하는 언니들① “무엇이 차별인지 아는 게 시작”
  • 강한님 기자
  • 승인 2022.03.02 13:48
  • 수정 2022.03.07 1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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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날 인터뷰] 이향춘 의료연대본부 본부장
의료연대본부의 '태아산재' 10년 투쟁
태아산재 법적근거 마련·노동조건 바꿔낸 간호사들

노조하는 언니들

이향춘, 김경신, 박미성, 이은정, 고은하, 권수정, 김은혜, 이병희, 이상미, 인숙교.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노조하는 언니’ 10명을 만났다. 이들은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 그러나 일터에서 겪은 상황을 덮고 넘어가긴 어려웠다. 임신한 동료의 아이가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건설현장에 여자화장실이 없어 곤혹을 겪고,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가 되고, 육아휴직을 썼다고 승진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일을 더 잘 하려면 일터가 바뀌어야 했기에 노동조합을 선택했다. 분투했던 언니들의 싸움은 일터를 넘어 세상을 바꿨다.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향춘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본부장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

이향춘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본부장은 “누가 봐도 의심스러웠다”고 회상했다. 2009년 제주의료원에서 일하던 간호사 15명이 임신을 했는데 5명이 유산했다. 10명의 아이 중 4명이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채 세상에 나왔다. 15명의 간호사들은 임신 중 매일같이 약을 직접 분쇄했다. 이들이 분쇄했던 약에는 항암제도 포함돼 있었다.

소식을 들은 동료 간호사들은 “약이 태아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직감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의 ‘태아산재’ 투쟁은 그렇게 출발한다. 의료연대본부는 엄마의 노동환경이 태아의 건강에 손상을 줬고, 이를 산재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2020년 4월 29일 대법원은 제주의료원 간호사의 태아 건강손상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상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있다고 판결했다. 엄마와 태아는 한 몸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 판결이다. 이는 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아버지를 포함하지 않은 ‘임신 중인 근로자’로 한정됐다는 한계가 있지만, 지난해 12월 산재보험법 개정안이 통과돼 태아산재를 인정하는 법률적 근거가 마련됐다. 법 개정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던 의료연대본부의 태아산재 투쟁을 이향춘 의료연대본부 본부장에게 들었다. 

“상식적인 것을
법으로 만드는 투쟁”

“그때 저는 서울대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어요. 저도 아이가 둘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원인을 찾지 않으면 어느 병원이든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퍼포먼스도 하면서 이 문제를 세상에 알려내려고 했어요. 여성가족부장관 면담을 위해 집회에 참여도 하고요.”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은 당시 마스크 등 보호장구가 지급되지 않은 환경에서 한 근무조당 200알 정도의 약을 분쇄해왔다. 임신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약이 무엇인지 교육도 받지 못했다. 제주의료원노동조합에서는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심의를 요구했다. 유산과 선천성 심장질환 발병률이 제주의료원에서 현저히 높았기에 실태조사를 하자는 주장이었다.

“사측은 ‘알아서 조사를 해 보겠다’고 했는데 믿을 수가 없어서 서울대학교에 맡겼어요. 그렇게 유산 원인이나 선천성 심장질환이 간호사들의 생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약물을 분쇄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게 드러난 거죠.”

그런데도 산재 승인이 어려웠던 것은 관련법이 미비했기 때문이다. 당시 산재보험법에는 업무상 재해를 ‘근로자’의 건강손상으로만 규정했고, 태아에 대해서는 별다른 규정이 없었다. 그래서 간호사들은 ‘태아가 노동자냐’, ‘엄마의 업무로 태아 손상이 발생됐다는 걸 증명해라’는 등의 말을 들었다.

“법적 공방이 있을 때 참석자들이 울면서 ‘엄마와 아기는 한 몸인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분리시키냐’면서 항의했던 기억이 나요. 탯줄을 끊어야 아기도 ‘앙’ 하고 우는데, 그 전까지는 안 울거든요. 같은 몸이라서 그런 거예요. 아주 상식적인 것을 가지고 법을 바꿔내는 투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나긴 싸움에서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은 지쳐갔다. 이향춘 본부장이 가장 걱정했던 것도 간호사들의 마음이었다. “그때 엄마들이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나 때문에 아이가 그렇게 됐다.’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속에서 아이가 아파하는 걸 봐야 했던 거잖아요. 이런 상황이 결코 엄마 때문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제일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엄마 탓이 아니라 노동환경 탓이죠.”

모성보호에서
건강권·작업환경 개선으로

“지금 산재보험법 개정 내용은 협소한 틀을 벗어나지 못했어요. 한계가 명확하죠. 아버지와 연결을 제외한 것은 태아산재를 모성보호 차원으로만 협소하게 봤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재생산과 건강권 차원의 산재보험법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해요.”

대법원 판결이 난 이후 지난해 12월 말 산재보험법이 개정됐다. 개정안은 임신 중인 노동자가 유해·위험 요인에 노출돼 자녀가 선천성 질환을 가지면 이를 산재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소급적용 부칙을 둬 개정법 시행일 이전 출생한 자녀라도 관련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경우 등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산재보험 수급 자격을 갖추도록 했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자녀들도 산재가 인정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의료연대본부와 시민사회단체들은 이 개정안이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통과된 산재보험법 개정안이 ‘임신 중인 근로자’에 국한돼 아버지로 인한 태아의 건강손상을 법 적용에서 제외시켰다는 지적이다.

“저는 이게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엄마와 아이는 분리할 수 없다’는 게 그동안에는 아예 얘기도 안 됐다가 상식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면, 이제 여기서부터 출발을 해야 된다고 보거든요. 사실 그 약들이 우리한테 해롭다고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던 거죠. 밀폐된 공간에서 임신한 간호사들이 쪼그려 앉아 약을 분쇄했던 환경을 개선하려고도 하지 않았고요. 우리의 노동환경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인력충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공지도 하고, 교육도 받아야 하고, 적극적인 환경 개선과 투자도 필요해요.”

의료연대본부는 10년의 시간 동안 다른 병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구조를 개선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항암약 등 위험한 약 조제는 병동이 아닌 (원내)약국 조제실에서 하도록 하고, 배기구와 환기구 마련, 마스크 지급 등을 단체협상에서 요구해왔다. 무리한 작업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노동자들을 위한 적극적인 ‘투자’도 요구했다.

“간호사들이 환자를 직접 들어 올려서 몸무게를 재는 일이 없도록 자동 체중계를 도입하는 것, 약물 카트를 전동으로 바꾸는 것 등을 요구했어요. 시스템을 굉장히 많이 바꿨죠. 산재 투쟁을 산재를 인정받기 위한 과정 자체로만 볼 수도 있는데, 저희는 똑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게 각 병원들의 환경을 바꿔냈죠. 근본적인 것을 바꾸지 않으면 제2, 제3의 피해자들이 생길 거잖아요.”

ⓒ 의료연대본부 

“세상은 바뀝니다
침묵하지 마세요”

의료연대본부가 말하는 ‘작업환경 개선’엔 직장 내 성폭력도 포함돼 있다. 의료연대본부는 2020년에 병원 내 불법촬영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올해는 병원 사업장에 맞는 성평등 교안을 마련하고, 조합원을 교육하는 사업을 계획 중이다. 의료연대본부에 조직된 노동조합들은 불법촬영 방지를 위해 예고 없이 불시에 불법촬영 기기를 전수조사하고,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전문강사를 선정할 때 노동조합과 협의하는 등의 내용을 단체교섭에서 협의해나가고 있다.

이향춘 본부장은 “평등한 일터는 무엇이 차별인지 아는 게 시작”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무심코 차별하는 것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차별과 평등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한다고 봐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소리 내서 외쳐야 합니다. 10년의 태아산재 투쟁이 힘들기도 했는데, 그렇게 했기 때문에 법을 바꾸고 세상을 바꿨다고 봐요. 침묵하지 맙시다. 그 길이 좀 힘들다 하더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