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하는 언니들④ “숨지 않고, 알리고, 싸우는 게 우리의 일”
노조하는 언니들④ “숨지 않고, 알리고, 싸우는 게 우리의 일”
  • 강한님 기자
  • 승인 2022.03.08 14:12
  • 수정 2022.03.11 1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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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날 인터뷰] 이병희·이상미·인숙교 대한산업보건협회노조 성원들
불평등 일터 균열 낸 대한산업보건협회노조
회식 때마다 술 따르고, 출산·육아휴직 눈치 봤던 날들 “이제 없다”

노조하는 언니들

이향춘, 김경신, 박미성, 이은정, 고은하, 권수정, 김은혜, 이병희, 이상미, 인숙교.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노조하는 언니’ 10명을 만났다. 이들은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 그러나 일터에서 겪은 상황을 덮고 넘어가긴 어려웠다. 임신한 동료의 아이가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건설현장에 여자화장실이 없어 곤혹을 겪고,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가 되고, 육아휴직을 썼다고 승진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일을 더 잘 하려면 일터가 바뀌어야 했기에 노동조합을 선택했다. 분투했던 언니들의 싸움은 일터를 넘어 세상을 바꿨다.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왼쪽부터 이상미 수석부위원장, 인숙교 양성평등국장, 김미옥 조합원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회식하는 날이 되면 프린트에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나눠줬어요. 누가 어디에 앉을지 적힌 순번이요. 국장님 옆에는 친절하고 싹싹한 여자 선생님들이 앉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뒷자리에요. 그래서 국장님 옆에서 앉은 선생님들은 고기를 굽거나 술을 따르는 일을 했죠. 만약 임신을 한다? 출산일이 며칠인지부터 봐요. 출산일이 한창 사업 시작하는 3월이면 말을 하기가 너무 두려운 거예요. 속상하고, 열받고 그랬죠.”

이상미 한국노총 공공연맹 대한산업보건협회노조 수석부위원장이 기억하는 일터 분위기다. 이상미 수석부위원장이 말을 마치자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조합원 김미옥 씨가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라고 되물었다. 지금 대한산업보건협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김미옥 씨는 현재 육아를 하며 한 시간 늦게 출근하는 근로시간단축제도를 사용하고 있다.

대한산업보건협회노조는 출범부터 산하에 ‘여성국*’을 꾸렸다. 노동조합이 문제의식을 가질 만한 분위기였다. 회식부터 시작해 육아휴직, 유리천장까지 손을 대야 할 곳이 천지였다. 지난해 대한산업보건협회노조는 상급단체인 한국노총으로부터 평등상을 받았다. 노동조합이 평등상을 받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이상미 수석부위원장, 이병희 사무처장, 인숙교 양성평등국장에게 물었다.
*지금은 양성평등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노동조합이 절실했던
사업장 분위기

대한산업보건협회는 작업환경측정과 건강진단, 보건관리위탁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비영리법인이다. 50인 이상 사업장이 보건관리자를 자체적으로 선임하기 어려울 때 위탁을 받아 대신 그 역할을 하고,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의 주기적인 건강검진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의사와 간호사, 산업위생기사 등 자격을 취득한 노동자들이 대한산업보건협회의 구성원이다. 안전보건교육을 담당하는 노동자들도 대한산업보건협회에 고용돼 있다.

여러 사업장을 돌아다니는 대한산업보건협회 노동자들은 출장이 잦다. 장시간 운전과 감정노동에 시달렸지만 휴가를 쓰지 못하고 버티는 날들이 많았다. 특히 건강진단팀 같은 경우 누군가 연차를 쓰면 그날 출장에 지장이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 임신과 출산, 육아를 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속상한 날들’이 반복됐다. 대한산업보건협회에 고용된 전 직원의 성별 비율은 여성이 52%, 남성이 48% 정도다.

“여자는 출산이라는 장벽이 있잖아요. 출산을 한다면 휴가를 줘야 하는데, 그만큼 인력 손실이 생기는 거죠. 저도 둘째를 입사해서 낳았어요. 임신했을 때도 제가 노동조합 간부였거든요. 상사가 저를 골방으로 부르더라고요. 그러더니 ‘세 달만 쉬고 오라’고 하셨어요. 바로 따졌죠. 당신도 자식을 키우면서 어떻게 더 쉬고 오라는 말은 못할지언정 그렇게 말씀을 하실 수 있냐고. 여차 하면 퇴사할 각오로 휴직을 했어요.”

이병희 사무처장이 겪은 일이다. 이병희 사무처장은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모두 사용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승진에서 배제돼야 했다. “그때는 대리 진급을 하려면 시험을 봤어야 했는데, 육아휴직 갔다 와서 제가 시험을 봤어요. 시험에 붙었는데 진급을 그해에 안 시켜준 거예요. ‘왜 나는 진급이 안 됐냐’고 물으니까, ‘너는 육아휴직을 갔다 왔잖아. 당연히 대상자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거예요. 너무 부당하잖아요.”

인숙교 양성평등국장은 “다른 사안들도 많이 있겠지만 여성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굉장히 중요했다”고 말했다. 일터에서의 성차별은 이직을 불렀다.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만 해도 여성 이직률이 높았다”는 게 인숙교 양성평등국장의 설명이다.

단체협약으로
못 박은 평등

2011년 대한산업보건협회노조가 출범한 후 노동조합은 먼저 사측에게 성평등을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로 했다. “협회는 직원의 모집과 채용·교육·배치·승진·정년·퇴직·해고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하지 않는다”는 단체협약 조항을 통해서다.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었던 출산·육아기 근로시간단축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이에 “여성조합원이 임신 후 12주 이내 또는 36주 이후에는 1일 2시간의 근로시간 단축을 신청할 수 있으며 협회는 이를 허용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2018년 신설됐다. 임신한 노동자의 야간·휴일근무를 금지하고, 요구가 있는 경우에는 경미한 종류의 업무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조항도 만들어졌다. 2020년에는 기존에 합의했던 유급 육아휴직 1년에 추가로 무급 육아휴직을 쓸 수 있도록 조항을 개정하기도 했다.

대한산업보건협회노조는 유리천장과 관련해서도 지속적인 감시를 해왔다. 대한산업보건협회의 직급은 1급에서 5급으로 분류돼 있다. 노동조합이 설립된 직후인 2011년, 최상위 직급인 1급의 성비는 남성 88%(15명), 여성12%(2명)이었다. 2급도 남성 86%(42명), 여성 14%(7명)이었다. 상위직급에서 남성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것이다.

노동조합 설립 10년차였던 2021년 상위 직급별 성비는 눈에 띄게 바뀌었다. 현재 대한산업보건협회 직급당 성비는 1급 남성 78%(14명), 여성 22%(4명), 2급 남성 80%(67명), 여성 20%(17명)이다. 특히 노동조합 설립 후 진급이 다수 이뤄진 3급의 경우 2011년 여성 31%(30명)에서 43%(287명)으로 여성 비율이 대폭 증가했다.

이병희 사무처장은 “암암리에 인사 배제가 이뤄졌는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인사 때마다 노동조합이 우려를 표하는 말들을 했죠. 예전보다는 육아휴직자들이 진급되는 사례들이 늘었고, 여성 조합원의 진급 비율도 높아졌어요.”

“성평등 분야에서
다른 노동조합 본보기 될 것”

회식 때 앉을 자리를 정해주던 관습은 노동조합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자연스레 사라졌다. 원래 회식자리 지정은 총무팀에서 하던 일이었는데, 노동조합이 이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다.

이상미 수석부위원장은 “성평등 사업을 하게 되니 조합원들의 참여가 더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가 여성 조합원이 많은 편인데, 참여율은 저조한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노동조합에서 하나둘 바꾸는 게 생기고, 여성에게 직접 와 닿는 사업을 하니 ‘당연히 같이 하자’는 분위기가 생겼던 것 같아요.”

요새 대한산업보건협회노조 양성평등국의 관심은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당연히 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아직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남성들은 소수지만, 인숙교 양성평등국장은 “노동조합이 더 꾸준히 활동하면 또 달라지 않을까 싶다”고 소망했다.

“앞으로 우리는 성평등에 있어 공공연맹,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노동조합에 본보기가 되는 노동조합이 되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회 분위기상 남성들이 육아휴직 쓰는 게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성평등을 위해서는 남성들의 육아휴직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성한테만 육아휴직이 허용된다는 건 여성한테만 가정의 일을 다 하라는 거잖아요. 남성들은 사회에서 경력 단절이 되지 않은 채 일을 하고요. 그래서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적극적으로 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모두가 함께 가정을 책임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인숙교 양성평등국장)

“그전까지 힘들었던 것을 지금은 많이 바꿨다고 생각해요. 숨지 않고, 알리고, 시끄럽게 하고, 싸웠던 시간들 덕분이었어요. 그것이 우리 일이기도 하고요. 아직도 저희가 모르는 부분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또 바꿔낼 수 있도록 우리가, 또 사회가 이제는 도와줘야 할 것 같아요. 아픔을 각오하지 않으면 절대로 변하지 않더라고요. 저희도 함께할 테니, 다들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이병희 사무처장)

('노조하는 언니들' 시리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