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④] 안전 시스템 구축 위해 ‘더 필요한’ 변화
[커버스토리 ④] 안전 시스템 구축 위해 ‘더 필요한’ 변화
  • 정다솜 기자
  • 승인 2022.04.14 00:02
  • 수정 2022.04.14 0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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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착오 가능한 줄이기를 현실적 목표로”
사업장 주체 노동 참여도 중요

안전, 시스템을 입다

안전을 시스템적으로 관리하는 데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올해 초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으로 안전경영시스템 구축에 기업들이 더 열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시스템은 작동해야 시스템이다.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할지가 시스템을 돌린다. 우리 사회에서 안전경영시스템이 없었던 건 아니다. 잘 돌아가는 시스템이 부족했고, 재해를 줄이기에 역부족이었다. 이제 안전 관리를 굴러가는 시스템으로 만들 방안을 고민할 차례다.

커버스토리④ 중대재해처벌법, 그 너머

19세기 초, 영국의 한 직물공장에서 기계에 끼이는 사고를 냈다는 이유로 어느 노동자가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산업재해를 이른바 ‘자유노동’을 택한 개인의 책임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에 따른 일이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 영국 공장법엔 안전에 관한 규정이 포함됐다. 산업안전 사고가 더는 개인이 아닌 사회적으로 풀어야할 과제가 된 것이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됐을까? 

법 개정은 주요한 변화를 이끌었지만,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법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현재 영국이 대표적인 산업안전 선진국으로 불리기까진 사회·정치적 제반의 변화가 함께했다. 영국이 200여 년간 경험했던 산업재해 대응의 역사를 살핀 책 《산업재해의 탄생》에서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산업재해를 기업 혹은 사회가 책임을 떠맡아야 할 책무라고 인식하는 사회로의 전환은 공장법 개혁, 빈민법 개혁, 공중보건 개혁, 사법행정 개혁 등을 포함하는 사회·정치적 제반 변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며 “동시에 정부 구성의 변화, 새로운 사상적 조류의 대두, 정부 운영 형태와 여론 형성 과정의 변화 등이 모두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나라가 겪어온 압축 성장의 부산물이기도 한 높은 산업재해율을 낮추기 위해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수밖에 없다. 송병건 교수는 “영국, 그리고 다른 선진국들이 장기간 역사를 거치면서 치열하게 경험해온 과정을 우리는 생략하고 넘어갈 뾰족한 수가 과연 있을 것인가”라며 “그저 산업재해 선진국들이 경험했던 시행착오를 가능한 한 많이 줄이는 것을 현실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 ‘과정 관리’에 더 신경써야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우선 정부의 관리·감독 역할이 중요하다. 안전보건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들려면 정부가 ‘과정 관리’에 더 신경써야 한다는 것이다. 박두용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경사노위 계간 〈사회적 대화〉(2021-4호) 특별대담(이하 대담)에서 “산업안전보건법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을 갖고 꾸준히 집행해야 하는데, 사건이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서 대증요법식 대응이 이뤄지다 보니 과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산업안전 체계가 쌓이지 않았던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강성규 가천대 길병원 교수는 “(정부는) 사고의 핵심 원인을 규명하고 이것은 반드시 지키라고 조처해야 한다”며 “사고 발생 시 핵심 원인은 무엇이고, 그 원인되는 사항을 동종 사업장에서는 잘 준수하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동진 진영프로토 생산관리 공정개선팀 이사는 정부의 상시적인 과정 관리를 강조했다. 그는 “사고가 안 나는 사업장도 시스템 구축이 잘 돼 있는지 정부가 한 번씩 점검을 제대로 해야 한다”며 “사고가 계속 안 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서류만 보고 가는 게 아니라 직접 현장을 들여다 보고 시스템 구축을 위한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안전관리자 부족 문제
단기·장기 대책 세워야

현장 안전관리자 부족 문제도 해결돼야 한다. 황인호 대한산업보건협회 중대재해예방실 실장은 “자격증을 따는 것과 학부에서 4년씩 배워서 졸업하는 인력 간엔 차이가 있다”며 “그런데 안전보건 분야 인력을 배출하는 대학이 전국에 몇 개 없다. 안전보건 학계도 발달할 수 있도록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 그래야 현장에서 판단하는 사람들의 수준도 올라간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현장의 고민을 풀기 위해 한국과학기술대학교(한기대)는 지난 3월 31일 국내 대학 최초로 ‘제1기 산업안전정책 최고경영자(CSO) 과정’을 개강했다. 이성기 한기대 총장은 “산업안전 전문가가 부족하다는 의견은 주로 수적인 측면보다 현장에서 필요한 역량을 갖춘 제대로 된 전문가가 질적으로 부족하다는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며 “한기대에선 산업안전정책 최고경영자 과정을 운영하고, 2학기부터는 일반대학원에 안전공학과를 만들어서 실무 중심 산업안전 인력을 키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법을 피해가는 방법이 아니라 산업재해 예방을 위해 구체적으로 필요한 기술, 이론, 경험, 노하우 등을 전수할 것”이라며 “직종별로 토론도 하며 고용노동부 산업안전감독관을 비롯한 전문가들이 퍼실리테이터로 함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기적으로 한기대는 학부생 배출도 고려하고 있다. 이성기 총장은 “학부 인력을 키우는 것도 고민하고 있다. 다만 학부 과정은 길어져야 하기에 단기적으론 스페셜 트랙을 만들어 공학 전공 학생들이 산업안전 관련 부전공을 이수할 수 있도록 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대한산업보건협회도 한국노총과 함께 오는 7월 중 4박 5일(32시간) 일정으로 ‘중대재해 전문컨설턴트 양성 교육’을 준비 중이다. 

“산업안전 현장 주체, 노조가 돼야”

정부의 추가 역할, 인력 부족 문제 외에도 중대재해처벌법 너머에는 원하청 구조 문제, 시스템보다 눈앞의 죽음에만 주목하는 여론 등 더 필요한 변화들이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 현장 주체인 노동의 참여도 빼놓을 수 없다. 김광일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본부 본부장은 “노조의 인식이 ‘중대재해처벌법 어기면 경영책임자가 처벌받는다’, ‘잘못되면 회사에서 알아서 하겠지’ 같은 식에서 그쳐선 안 된다 ”며 “그러면 이 법이 정말 처벌만 목적인 법이 된다. 산업재해 예방이라는 취지를 노조도 살려야 한다. 한국노총은 산하 조직에 종사자 의무를 철저히 하면서 사업장에 의견을 제출하라는 등 중대재해법 관련 교육을 할 계획”이라고 이야기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위험성 평가 관련 노조의 참여를 올해 금속산별협약에 명시할 계획이다.

권혁면 연세대 산학협력단 연구교수는 대담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과정에서 노조가 큰 역할을 했고 제도적으로 큰 성과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며 “이제 중요한 건 산업안전 현장에서 주체는 노조가 돼야 한다. 조합원들의 안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거다. 요구뿐 아니라 산업안전에 관한 원인, 전문성까지 커버하면서 경영진과 함께 사고를 줄이는 쪽으로 가야한다”고 밝혔다.

같은 자리에서 박종식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기업뿐 아니라) 그간 노조도 성과금·임금인상·복지 등 경제적 이익, 배분을 목적으로 안전을 부차화했던 측면이 있는 것 같다”며 “안전보건 수준 제고에 대한 무관심은 노사 모두 경제적 이익과 성과를 중심으로 한 합작품의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이어 “실제 제도의 실행 당사자는 사업장 노사”라며 “이제는 산업안전에 대한 담합적 노사관계를 벗어나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