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섭의 공동체 이야기] 공동체의 정치경제
[박경섭의 공동체 이야기] 공동체의 정치경제
  • 참여와혁신
  • 승인 2024.02.04 18:20
  • 수정 2024.02.05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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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경섭 지역공공정책플랫폼광주로 지역공공정책연구소장
박경섭 지역공공정책플랫폼광주로 지역공공정책연구소장

현 정부는 출범부터 건전 재정을 표방했으나 지속적인 감세로 재정 적자가 누적되면서 한국은행으로부터 차입까지 진행하고 있다. 2023년 정부의 예산 규모는 약 625조 원으로 명목GDP 2,235조 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5%였다. 국가 재정의 운영은 법령에 근거하면서도 정치적 의사결정에 따른다.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라면 재정 운영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는 필수적이다.

한 사회에서 정부의 재정이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막대함에도 많은 사람들은 시장경제의 외부로 이해한다. 경제에서 가계와 기업이 생산하는 부의 비중을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렵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정부 부분을 포함해 비시장경제가 차지하는 몫은 적지 않다. 그럼에도 항상 경제의 초점은 시장경제에 맞춰져 있고 시장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정치와 시장경제의 분리야말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핵심일지 모른다.

시장경제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한 인물은 칼 폴라니(Karl Polany, 1886~1964)였다. 제도주의 경제학의 선구자이자 사회적 경제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칼 폴라니는 어떻게 서구사회가 시장경제 제일주의로 대대적으로 전환했는가를 시장이라는 제도의 역사를 연구하며 밝혀냈다. 칼 폴라니는 이러한 사고의 전환기에 벌어졌던 핵심 사건을 18세기 영국에서 빈민을 위한 법들의 폐지 혹은 약화로 이해한다. 산업화로 어려움에 처한 빈민들을 보호하고자 만든 구빈법은 자본주의 세력에게 노동의욕을 저하시킨다며 부단하게 공격당했다.

칼 폴라니는 이러한 구빈법의 약화 과정에서 인간에게 경제적 행동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시장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모두 ‘공정’하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게 됐다고 했다. 또 경제주의의 오류는 인간의 경제를 시장 형태와 동일시하고 정치를 경제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밝혀냈듯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정치 없이 발전할 수 없었다.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관세와 통행세를 폐지하고, 구빈법이나 공장법과 같은 빈민과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률을 약화시키는 정치적 결정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도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 생각하는 것은 당연시되고 정부의 시장 개입을 우려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정부는 시장의 외부에서 그저 돕는 역할만 수행해야 할까? 정부와 시장이 분리돼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자본주의 기업에만 이로운 개입이 아니라 복지와 재분배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칼 폴라니에게 경제는 시장경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경제를 경제 과정이 전체 사회, 정치, 문화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규정하고 주요한 통합 형태를 호혜, 재분배, 교환으로 나눈다.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되기 이전의 부족사회가 호혜와 재분배로 통합돼 있는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장을 통한 교환이 사회를 지배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따라서 칼 폴라니는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와 무관한 정치라는 경제 제일주의의 환상, 시장 개념의 지배로부터 사고의 해방을 과제로 제시한다.

이러한 시장경제 중심주의로부터 경제들의 해방, 시장 지배적 사고로부터 자유의 쟁취는 어떻게 가능할까? 호혜성과 연대를 강조하는 사회적 경제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시장경제에 비해 사회적 경제는 여전히 취약하며 심지어 정치적 결정과 거리를 두기까지 한다. 칼 폴라니의 사상적 유산을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경제는 시장지배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않다. 사회적 경제를 구성하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조차도 자본주의적 시장 내부에서 경쟁하고자 한다. 마을공동체 사업에서도 정부 보조를 받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서 정치와 무관한 마을기업, 협동조합의 설립과 운영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지방정부가 지원하는 ‘공동체경제’라는 이름이 붙은 사업들은 주민들의 아이디어를 사업화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창업에 필요한 교육이 진행되고 상품 개발, 마케팅, 멘토링, 컨설팅과 같은 비즈니스 언어가 지배한다. 여기에서 호혜의 대상에 대한 고려, 타자에 대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결정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공동체경제’를 이론화하고 실천적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던 J.K. 깁슨-그레이엄 등은 《타자를 위한 경제는 있다》(2014)에서 공존할 수밖에 없는 타자를 위한 윤리적 의사결정과 행동을 공동체경제라고 부른다. 이러한 윤리적 의사결정은 ‘다함께 평등하고 훌륭하게 생존함’, ‘사회와 환경의 건강이 증진되는 방향으로 잉여를 분배함’, ‘우리뿐만 아니라 타인의 안녕을 위한 방식으로 타인들과 관계를 맺음’, ‘지속 가능하게 소비함’ 등을 중요한 고려 사항으로 포함한다.

이들에게 공동체경제는 윤리적·정치적 의사결정의 장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공동체가 돼 간다. 이러한 공동체경제는 시장제일주의 사고방식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칼 폴라니의 과제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공동체경제의 시각에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는 물 위에 떠 있는 빙산의 보여지는 모습에 불과하다. 시장경제를 통하지 않는 정부의 재분배, 사람들 사이의 호혜적 교환, 비자본주의 기업의 상품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실제로 더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를 다르게 상상하고 다른 경제를 위한 언어와 실천이 필요하다. 노동자 자주관리기업, 협동조합 등 공동체경제의 사례는 다양하지만 《타자를 위한 경제는 있다》에서 인상적인 사례는 시나 마테이켄(Sheena Matheiken)의 유니폼 프로젝트(theuniformproject.com 참조)다. 미국 뉴욕의 광고회사에 다니던 시나 마테이켄은 쉬운 소비와 낭비에 저항하면서 1년 동안 같은 옷을 입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는 검은 원피스를 365일간 다양하게 연출하면서 블로그에 게시하고 10만 달러 이상의 기부를 받아 모국 인도의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후원했다. 다르게 살기 위한 윤리적 결정, 공동체경제는 일상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