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불씨는 노동에 있다
희망의 불씨는 노동에 있다
  • 하승립 기자
  • 승인 2015.07.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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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희망, 희망의 노동을 위한 출발점에 서자
유연하고 새로운 전략으로 노동을 희망의 디딤돌로
우리 시대의 노동, 노동자 ⑥ 희망의 실마리를 찾아서

수도권 대도시의 한 초등학교. 인근에 대단지 아파트가 있어 학생들의 대부분이 이 아파트에 산다. 그리고 아파트단지 가구의 70% 정도가 그 지역에 위치한 자동차업체 직원들이다. 이 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있는 도엽 씨(44세)는 자동차업체에서 15년째 인사노무 업무를 맡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학교 측에서 부모 직업소개 일일교사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도엽 씨는 난색을 표했다. 설계나 조립과 같은 자동차생산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동차회사에 다니는 아빠에게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뻔히 아는데, 가서 ‘협상의 기술’을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할 얘기가 없는데.”

결국 사람이 없다는 강권에 못 이겨 학교에 갔다. 교장실에서는 일일교사로 초빙된 부모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정복 입은 경찰관이 넷, 과학수사대 조끼를 입은 경찰관이 둘, 이렇게 경찰관만 여섯 명이 나와 있었다. 정작 자신이 다니고 있는 자동차업체 직원은 다른 한 명을 포함해 둘뿐이었다. 이 학교 부모들의 직업분포로 볼 때 이해하기 힘든 인원구성이었다. 학교 측에서는 수없이 요청했는데 나오겠다는 사람이 없었다는 하소연이었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여전히 노동은 고단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운 직장이고, 그렇기에 남들 앞에서는 ○○자동차에 다닌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지만, 정작 자신의 노동은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이들에게 내가 하는 노동을 통해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만들어낸다고 말하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속내는 ‘너희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고 말하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정부는 ‘산업역군’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줬지만 정작 더 싼 임금에 더 오랜 시간 노동하기를 바라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경제지표만 신경 썼을 뿐이다. 지금도 여전히 노동은 경제의 하위개념일 뿐이다. 노동을 통해 개인이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가보다는 국가가 얼마나 부강해질 수 있는가만이 관심사인 것으로 보인다.

경영자들은 아직도 노동을 비용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비용을 줄여서 수익을 늘리는 것이 지상과제이다. 노동의 질을 높이기 위한 교육훈련이나 노동자의 만족도 향상을 위한 투자는 꺼린다.

학교조차도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라는 급훈을 떡하니 교실 앞에 붙여놓던 시대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노동의 가치, 혹은 노동의 현실에 대한 교육은 부족하거나 아예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은 여전히 고단하다. 성경에서도 노동의 시작이 언급된 창세기 3장의 내용은 형벌에 가깝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사과를 따먹은 후에 여호와는 말한다. “여자에게는 자식을 낳는 고통이 크게 될 것이고, 아담에게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하며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노동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그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철학자 헤겔은 ‘노동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기실현이자 세계와 인간을 매개하는 능동적 실천’이라고 했다. 쉽게 설명하면 자기자신이 되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1981년 9월 1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이라는 회칙을 발표한다. “노동을 하여(Laborem Exercens) 인간은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하고 과학과 기술의 끊임없는 진보에 이바지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한 가족인 형제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회의 문화적, 도덕적 수준을 끊임없이 들어높이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 그래서 노동은 인간과 인간성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시이며, 인격체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 움직이는 개개인의 인격체를 나타내는 표시이다. 그리고 이 표시는 인간의 내면적 특성을 결정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본질 자체를 형성한다.”

능동적으로 새로운 전략을

아주대학교 법학과 이원희 교수는 ‘미세한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렵고 힘든 시대다. 대개의 경우 내가 하는 노동에 대해 밀려서, 끌려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어쩔 수 없이 한다고 말한다”면서 “힘들고 어렵더라도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 비하자면, 현재 노동하고 있는 사람은 미세한 감수성을 발휘해서 그 속에서 버틸 수 있는 보람과 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노력을 해볼 만하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이원희 교수는 “현실을 직시하고 주변을 살펴보면 실망하고 좌절시키는 현상들 속에서 드문드문 희망의 싹을 찾을 수 있다”고 전제하고 “미세한 감수성을 통해 나 자신이 자아존중감을 형성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경청하고 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원희 교수는 또 ‘성과사회’의 극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예전에는 타자 착취였는데, 성과사회로 가면서 이제는 자기 착취를 한다. 나의 삶과 일터에서 노동중독증, 번아웃(burnout)으로 가는 것을 차단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철학을 만들어가야 한다.”

워크인조직혁신연구소 이문호 소장도 어렵고 힘들다는 데 동의한다. 이문호 소장은 “힘든데, 첫 출발을 한 발짝 내딛으면 가는 길은 멀더라도 희망이 보일 테고 그러면 자꾸 모이고 뭉치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뭉치는 주체가 노동조합이 되어줄 것을 당부했다.

이문호 소장은 노동조합에 대한 주문을 덧붙였다. “자본의 잘못, 정부의 잘못? 많다. 맞다. 그런데 계속 그에 대한 비판으로만 일관하면 정부와 자본만 잘하면 된다는 것인가? 노동조합이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내고 능동적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기회를 놓치면 노동조합은 정말 힘들어진다. 매년 임금 1% 올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노동조합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임단협 이외의 다른 영역, 시대 변화에 맞는 유연하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그것에 성공하면 조합원들이 노조를 보는 시각도 달라질 것이다. 자꾸 넓혀나가야 한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노동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작가 톨스토이는 말했다. “노동하고 사랑하는 법을 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노동하고 나의 노동을 사랑하는 법을 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멋지게 살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노동하고는 있지만, 노동을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톨스토이의 마지막 저서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 해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톨스토이는 ‘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일하는가를 기준으로 사람을 존경해야 한다. 두 손으로 노동할 때 우리는 세상을 공부하게 된다’면서 ‘습관의 주인이 되어라, 습관이 우리의 주인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기존의 관습이나 관행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말한다. ‘우리는 영원한 삶과 현재를 동시에 살아야 한다. 일할 때는 영원히 살 것처럼 하고 남을 대할 때에는 오늘밤에 죽을 것처럼 하라.’

노동은 여전히 희망으로 가는 길이고, 2015년 대한민국의 노동은 희망의 디딤돌이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 한국의 노사정에 주어진 역할이다. 노동의 희망, 희망의 노동을 위한 출발점은 바로 지금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