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 찾아온 또 한 번의 시련
군산에 찾아온 또 한 번의 시련
  • 강은영 기자
  • 승인 2018.04.0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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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도 못 녹이는 군산의 겨울
20년 함께한 한국지엠과의 이별
[기획] 위기의 한국지엠 1 공장 폐쇄 결정된 군산을 가다

설 명절을 앞둔 2월 13일, 갑작스런 소식이 전해졌다. 지역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한국지엠 군산공장 폐쇄발표였다. 작년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폐쇄에 이어 다시 위기에 닥친 것이다. 검색어에는 연일 ‘한국지엠’과 ‘군산공장’이 상위권을 차지하며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공장 폐쇄

폐쇄 발표가 나오고 한 달 뒤, 아직도 충격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당사자들의 마음을 듣기 위해 군산을 찾았다. 침통한 분위기를 대변해 주듯 시가지로 접어들수록 군산 시민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문구의 현수막들이 여기저기에서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람들의 낯빛에는 어두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폐쇄 소식을 접했을 때,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솔직히 울컥해요. 대우자동차에 입사했을 때 4대 재벌 안에 들어가는 대기업이었어요. 자부심도 컸고, 주변 부러움의 대상이었어요. 우리는 그 때 한 달에 2일 쉬고, 풀로 쉬는 날 없이 일을 했을 정도로 열심히 했었죠. 폐쇄 발표 나고 와이프는 심장부정맥증상 진단을 받고 병원 다니면서 약 먹고 있어요.” (희망퇴직자 A씨)

“정규직들보다 100배 정도의 충격을 더 받았죠. 그 사람들은 생계 대책을 세워줬잖아요.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는데 저희는 없잖아요. 희망퇴직을 해서 전직할 경우에 금전적인 부분을 해결해줬는데 저희는 그런 게 전혀 없는 상태고요.” (비정규직 B씨)

“처음에는 너무 막막했죠. 배운 것도 없고 일만 했는데 지금 비상대책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시나 도에서 지원을 해주겠다고 하고 일자리를 알아봐준다고 하니까 그나마 빛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죠.” (비정규직 C씨)

“2월 13일 큰 아이 고등학교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어요. 형수님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뉴스에서 군산공장 폐쇄한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돼서 연락을 했다는 거예요. 전화를 끊고 인터넷으로 기사를 찾아보니 폐쇄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무슨 소리야’ 했어요.” (희망퇴직자 D씨)

노동자는 가난하고 불안해야만 하나?

담담하게 입을 열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끝내 눈물을 떨구는 사람도 있었다. 희망퇴직을 신청한 사람에게 지급되는 위로금의 액수가 연일 기사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자극적인 기사들로 인해 여론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언론에는 성과급을 요구하는 귀족노조가 돼 버렸어요. 우리들이 나쁜 놈이 됐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다들 너무 괴로웠어요. 지금도 직원들을 만나면 아직도 우는 친구들이 있어요.”(희망퇴직자 A씨)

“인터넷 댓글로 저희를 대기업이라고, 귀족노조라고 그러잖아요. 노동자가 공부 못 했어도 열심히 일하면 급여 받아서 가족들하고 외식도 한 번 할 수 있고, 여행 한 번 할 수 있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잖아요. 노동자는 항상 불안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바라보는 시선이 안타까워요.” (희망퇴직자 D씨)

복지혜택 중 큰 도움을 줬던 건 자녀들의 학자금이었다. 위로금에 포함된 학자금 지원이 희망퇴직을 결정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자신의 실직으로 인해 자녀들의 얼굴까지 어두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솔직히 저는 둘째까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왔어요. 다행히도 딸이 국비장학생 신청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 전에 장학금을 받아도 ‘회사에서 나오니까 받지 마라. 어려운 친구들이 받을 수 있게끔 해줘라’ 하고 돌렸거든요. 이제 본인 스스로도 학자금이 안 나오니까 국비장학생을 신청하더라고요” (희망퇴직자 A씨)

“학자금이 지원되니 ‘교육비 걱정은 크게 안 해도 되겠구나’ 생각을 했었어요. 폐쇄 발표 이후 아이들이 모를 수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너희 공부할 거 하던 대로 하라고 했어요.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밝게 잘 자랐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에게는 평상시처럼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게 더 저한테도 힘도 나고요.” (희망퇴직자 D씨)

20여 년간 일해 온 회사에 대한 정은 각별했다. 지난 시간 여러 위기를 겪으면서도 떠나지 못했던 건 일을 하면서 얻는 보람 때문이기도 했지만 회사를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대우자동차 처음 입사했을 때 제일 좋았던 플래카드 내용이 ‘대우가족’이였어요. 우리는 가족이다. 어디를 가든. 대우조선을 가든, 대우전자를 가든, 대우자동차를 오든 우리는 가족이다. 그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희망퇴직자 A씨)

“이 회사를 다니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월급도 잘 나오고. 애들 커 가는 것도 못 보고 내 몸 아파도 회사가 먼저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야간에 힘들어도 내가 출근 안 하면 다른 사람들이 해야 되니까 책임감을 가지고 일 했어요.”(희망퇴직자 D씨)

갑작스런 상실감… 오늘은 뭐해야 하나?

일자리가 없어지고 나서 느끼는 어려움은 다양했다. 생계유지에 대한 어려움보다 더 크게 다가온 건 매일같이 출근하던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상실감이었다.

“희망퇴직서를 내고 승인 문자를 받았는데, 솔직한 심정은 ‘승인이 보류됐습니다’라는 통보가 오길 바랐어요. 반려시킨다는 건 다시금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있으니까요. 막상 ‘승인’ 문자를 받으니까 담담하고 일단은 쉬고 싶어요. 그동안 가족들과 잘 놀아주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대화를 많이 나누고 있어요.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어요.” (희망퇴직자 A씨)

“외식도 3개 먹을 거 1개 먹어요. 아이들이 치킨을 좋아해서 사달라고 하면 ‘아빠가 지금 힘들어, 나중에 사줄게’ 이렇게 돼요. 애들 옷을 못 사주고 있어요. 애들이 자꾸 크고 있는데, 작년에 옷이 많이 남았었는데 어느 순간 딱 맞더라고요.” (비정규직 C씨)

“온 정성을 다 해서 일했는데, 상실감이 너무 컸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뭐해야 하는 지 고민이 돼요. 거실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으면 애들은 학교 가고 와이프는 출근하니까요. 나 혼자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나만 제일 힘들고 그냥 낭떠러지에 있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눈물도 많이 나고, 비참해지는 기분을 많이 느꼈어요.” (희망퇴직자 D씨)

폐쇄 소식과 함께 압박하듯 주어진 희망퇴직으로 인해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은퇴 후의 고민은 코앞에 닥치게 됐다. 미래를 계획하기에 짧은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오면서 일을 하고 살아왔는데, 내가 또 일자리를 찾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그 생각도 들더라고요. 아직까지 5월까지는 여유가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을 하려고요.” (희망퇴직자 A씨)

“그냥 200만원 만 받아도 여기 있고 싶어요. 그래서 군산, 서천, 익산, 장항 주변을 알아보고 있어요. 이 주변에서 구해지면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큰 그림은 이래요.” (희망퇴직자 D씨)

비정규직들에게는 2월 26일 문자로 해고통보가 날아왔다. 의사를 묻지 않은 일방적인 통보였다. 적게는 7년부터 많게는 20년까지 근무한 사람들이었다. 해고통보 후 자발적으로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노동조합의 도움 없이 활동하는 데에는 한계점이 존재했다.

“저희가 호소문으로 알리는 건 기자 분들하고 국회의원밖에 없어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저희가 움직이면서 교육비 지원과 같은 혜택을 받게 해주고 있고요. 도내에 특별조례를 제정해서 지원을 해준다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비정규직 B씨)

축복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지엠 군산공장이 위치한 제2국가산업단지를 찾아갔다. 한때 오식도동은 식사를 위해 쏟아져 나오는 공장 노동자들로 붐볐다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거리에는 퇴근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찾기 힘들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텅 빈 공장들과 손님들로 북적거렸어야 할 가게에 임대가 붙어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문이 열려 있는 가게도 손님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한 식당에 들어갔다. 커다란 식당에는 종업원 하나 없이 사장님 혼자 주문받고 음식을 만들며 뒷정리까지 감당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손님들이 오지 않아 근심이라며 현대중공업이 다시 가동될 거라는 소식에 희망을 품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일을 시작하면서 오랜 시간 군산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은 아직 도시를 떠날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제2의 고향이며 삶의 터전이었던 군산과 한국지엠은 어떤 곳이었을까.

“군산은 진짜 추위도 오래 가고, 바람도 많이 불고, 날씨 측면에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동네였던 것 같아요. 지나고 보니 참 아쉬워요. 군산은 살기 괜찮은 곳이에요. 이만큼 잘 가꿔진 도시가 없는데. 주위 사람들을 잘 만난 거 같아요. 회사 동료들도 참 좋았어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군산을 쉽게 떠나지 못할 거 같아요.” (희망퇴직자 A씨)

“처음에는 기술 배우는 게 너무 힘든 거예요.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가 너무 좋은 거예요. ‘진짜 열심히 해야 되겠다. 내 자식들한테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일했고, 너무 자랑스러웠어요. 이 직장에서 근무하면서 ‘뿌듯하고 축복 받았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갑자기 이렇게 직장 생활을 마치게 되어서 안타깝고 부질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희망퇴직자 D씨)

한국지엠 군산공장 노동자들의 평균 근속년수는 20년이다.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군산에 자리 잡아 인생의 절반을 회사에서 일한 셈이다. 긴 고민 끝에 그만둔다는 결정을 내리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랜 시간 함께해왔던 회사와 군산이라는 도시는 자신들의 동반자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