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거리로 나왔나
‘그들’은 왜 거리로 나왔나
  • 함지윤 기자
  • 승인 2007.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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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87년, 그로부터 20년 ① 1987년, 그해 여름
뿌연 하늘, 뜨거운 거리

1987년, 그해 6월의 하늘은 온통 뿌옇게 뒤덮여 있었다. 연일 평균 2만여발(6월 10일부터 26일까지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은 무려 35만1천여발이었다)의 최루탄이 내뿜어대는 연기는 주요 도시의 거리를 삼켜버렸다. 똑바로 눈도 뜰 수 없는 상황에서도 눈물 콧물 흘리며 사람들은 거리로 나왔고, ‘독재타도’를 외쳤다. 뿌연 연기 속에서 그들에게 길을 찾아준 것은 강렬한 태양빛이 아니었다. ‘희망’이란 작은 불빛이었다.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빠른 경제성장만큼 성장한 시민 의식


한국전쟁이 이후 우리 사회는 세계가 놀란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며 급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세계적인 제2차 석유파동과 선진국의 보호무역정책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는 일명 ‘3저 호황’에 힘입어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며 경제성장의 가속도를 붙여나갔다. 이런 경제성장을 발판과 더불어 1960년대 후반부터 실시된 의무교육은 국민들에게 다른 세상을 열어줬다. 이와 더불어 컬러TV의 보급과 활발한 수출무역 등은 국민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게 해 시야를 넓혀줬다.

 

박정희 정권시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군사정권과 독재정권에 대한 반발은 주로 당시 지식인층이라 불리던 재야인사, 종교계, 대학생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사회경제적인 변화 속에서 국민들의 의식도 빠르게 변화해 대다수 국민들의 지식인층의 주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더 이상은 못 참는다

 

500년 조선왕조에서 신분제로 인한 억압과 일본식민지시대에 일본의 억압, 박정희 군부독재의 억압 등 억압에 익숙해 있던 국민들은 눈이 조금씩 틔기 시작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또한 사회적으로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 힘입어 1985년 2월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된 신민당은 다음해인 1986년부터 국민 천만명의 서명을 받으며 개헌을 추진한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1987년 ‘4.13 호헌조치’를 발표함으로써 민중의 개헌요구를 거부했다. ‘4.13 호헌조치’는 연말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시킬 수도 있을 거란 민초들의 일말의 ‘희망’을 짓밟아버린 일이었다.

 

그해 1월에 있었던 서울대생 박종철의 죽음은 희망을 짓밟힌 상처 입은 사람들 가슴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됐다. 심문시작한지 30분후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경찰은 발표했으며, 당시 문공부 홍보조정실은 각 언론사에 심장마비로 인한 쇼크사로 1단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이 사건은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7주년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정부의 조작’임을 폭로함으로써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됐다. 김승훈 신부의 폭로와 부검에 참여한 의사의 양심선언으로 밝혀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본질을 여실히 드러냈고, 잠재됐던 민중의 분노는 한계에 다다랐다.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아무도 우릴 막을 수 없어


4.13 호헌조치 이후 각계각층에서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시국성명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각계와 각 지역을 대표한 2200여명의 발기인이 참가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5월 27일 탄생하게 된다. 국본을 통해 당시 범민주세력은 하나로 단결되었다. 이후 국본은 곧바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맞춰,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규탄하고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국민대회를 6월 10일에 벌이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6월 5일 ‘국민대회 행동요강’을 발표한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6.10 대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경찰병력을 총동원하여 원천봉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방침에 따라서 6월 7일부터 주요 대도시의 검문검색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버스·택시 회사에 경음기를 떼어내고 교대시간을 바꾸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심지어 행인들의 애국가 합창을 막기 위해 오후 6시면 시행하던 애국가 옥외 방송도 금지시켰다. 행사 전날인 9일부터는 민주인사에 대한 가택연금을 실시했으며, 전국 110개 대학을 수색해 시위용품을 압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6월 10일은 밝았고, 육사 11기생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열어 신군부의 권력승계를 이뤄냈다. 같은 날 서울시청 시계가 12시를 알리자 성공회대성당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종탑 꼭대기에 지선스님과 소설가 유시춘 씨가 나타나 성명서를 낭독했고, 오후 6시부터 전국의 22개 도시에서 총 24만여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1만8500명)이 참여하는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같이 피를 흘리지 못하나 눈물만은 함께 흘립니다”


6.10 국민대회는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학생들이 먼저 거리로 나섰고, 시민들이 이에 동참했다. 이날 서울에서만 30여 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전날 시위에서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 파편에 맞아 중태란 뉴스는 대회에 참여한 군중들을 더 분노케 했다. 경찰은 강경 진압으로 그날 하루만 전국에서 3831명을 연행했다고 발표했다.

 

서울 도심의 시위대 일부는 명동성당까지 밀려갔으며, 밤 10시가 되자 시위대는 800명으로 늘어났다. 명동성당 시위대는 경찰을 밀어내고 바리게이트를 친 후 15일까지 5박6일 동안 농성투쟁을 벌였다. 농성투쟁 기간동안 시위대 앞으로 국민들의 희망을 담은 성금과 지지편지들이 속속 도착했다.

 

민중의 투쟁열기가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국본은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를 열었으며 이날 16개 도시에서 항쟁 기간 중 최대 인원인 150만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8만6천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정부는 경찰력의 한계가 드러나자 군대 동원 가능성을 비추며 국민들을 ‘협박’했지만, 모든 부조리를 태워 없애버릴 듯한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결국 6월 29일 노태우는 텔레비전에 모습을 드러내 직선제 개헌의 수용과 구속자 석방 및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했다.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민중의 힘으로 새시대를 열다


상지대 정대화 교수는 “6월 항쟁은 30년 군사독재시대를 마감하고 우리 사회가 민주화로 진행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고 평가한다. 또 “6월 항쟁은 5.18광주항쟁의 2단계로 5.18 광주항쟁의 일시적 좌절에 대한 국민적 복원이며, 광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하여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 이후의 운동 속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87년 6월 항쟁으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6월 항쟁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한 시각차이는 존재한다. 여러 가지 논란 속에서 그래도 큰 이견 없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은 첫째, 이전의 대부분 시위가 학생운동권 중심이었던 반면 6월 항쟁은 전국의 다양한 계층의 국민들이 참여했다는 점과 둘째, 승리한 투쟁인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투쟁이 목소리내기에만 그치지 않고, ‘6.29 선언’이란 결과물을 얻어냈다는 점이다.

 

특히, 6월 항쟁을 ‘시민’항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명 ‘넥타이부대’라 일컬어지는 당시의 중산층의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시민항쟁을 완성시킨 ‘넥타이 부대’


금융노련 내 민주화 세력들은 4.13호헌조치가 발표되자, 5월 8일 호헌조치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 민주화 세력은 1987년 11월 금융노련 내 민주노조들은 ‘한국자유금융노련’을 결성하고 이는 오늘날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의 전신이 되기도 했다.

 

서무금융연맹의 박두수 부위원장은 “당시 넥타이부대는 87년 6월 항쟁을 성공으로 이끄는 동력”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중산층을 대변하던 넥타이부대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더라도 점심시간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막아주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6월 항쟁에 동참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 정권 입장에서는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고 시민운동은 자신감을 갖게 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결국 넥타이부대의 참여를 통해 6월 항쟁은 시민항쟁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넥타이부대’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이들 앞에는 지금 새로운 도전이 놓여 있다. 제조업 중심의 노동운동이 여전히 힘이나 조직면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만, 향후 노동운동의 무게중심이 사무직, 서비스업, 공공 분야로 옮겨갈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20년 전 넥타이부대들이 이제 다시 전면으로 나서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다시 20년이 흘렀을 때 87년 6월을 기억하듯 2007년의 의미를 평가할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