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6월을 기억하십니까?
당신들의 6월을 기억하십니까?
  • 박인희 기자
  • 승인 2007.06.05 00:00
  • 수정 2021.08.24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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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87년, 그로부터 20년 ④ 넥타이부대, 그들은 누구인가넥타이부대에게 ‘그날’을 묻다시대와 함께 성장통 겪었던 그 때 그 사무직 노동자들

여름의 무더위와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 차는 ‘6월’은 뜨거운 계절이다. 지금 젊음의 열기로 넘쳐나는 명동거리는 20년 전 또 다른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다. 잘 차려입은 양복과 넥타이에 맨주먹을 쥐고 민주화를 외쳤던 사무직 노동자 ‘넥타이부대’. 그들은 그 때의 6월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의 기억 속의 6월 항쟁을 꺼내보았다.

 

 

그 때 그 넥타이들

 

1987년 6월 12일,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도 긴장감이 감도는 명동거리는 회사원들과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다. 

 

이미 명동성당 중심으로 1000여명의 시민과 회사원들이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고 그 주변에는 ‘닭장차’들이 늘어서 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최루탄 소리와 차들의 요란한 경적 소리 속에서도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외침만큼은 강렬했다.

 

시위대 속에는 잿빛 정장에 장발, 그리고 잠자리 안경을 쓴 남성들이 거리에서 맨주먹을 쥐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들은 이른바 ‘넥타이부대’라고 불리는 사무직 노동자들이다.

 

‘넥타이부대’는 사무직 봉급생활자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87년의 넥타이부대는 조금 특별하다. 국민으로서, 그리고 노동자로서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민주화 세력의 주체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명동에서 거리시위에 참가했던 이모 씨는 6월 항쟁에 대해 최루탄 가스가 뿌옇게 눈앞을 가렸던 기억부터 이야기 한다. “그 때 기억이요? 양복 입고 넥타이 맨 채로 최루탄 피하느라 도망가기에 바빴죠.”

 

넥타이부대들이 저마다 거리로 나서게 된 것은 바로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옆에서 누가 같이 시위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혼자 나갔어요. 변두리 영업점에서 은행원으로 일했는데 하루는 외근한다고 나가서 시위에 참가하고, 또 다른 날은 퇴근 후에 거리로 나가 시위대열에 합류 했죠.”

 

그 당시 노동조합들은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에 특별한 조직화나 연대 없이 사무직 노동자 개인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가했다. 

 

현재 공공기관에 근무하고 있는 임모 씨 또한 “군중심리에 시위에 나온 사람도 있었지만  점심시간을 이용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은 대개 나라가 잘못되고 있는 데 책상 앞에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라고 그 때를 기억한다.

 

 

87년 6월, 명동거리의 기억

 

지금이야 대통령 이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서민들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 때는 “대통령 이야기 잘 못 꺼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버리던 서슬 퍼런 시절”이었다고 임씨는 이야기한다. 군부독재 하에서 입과 귀를 막아야만 했던 서민들의 침묵은 ‘6월 항쟁’이라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터져 나왔다. 

 

5월 20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 은폐되었다는 내용의 성명발표와 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최루탄에 맞아 부상을 당한 연세대생 이한열 군의 사망으로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무자비한 공권력에 의한 젊은이들의 잇따른 죽음은 6월 항쟁이 범국민적 운동으로 번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국민들이 내 가족 내 형제를 잃은 것처럼 가슴으로 오열하며 거리로 나왔다.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전국 18개 도시에서 가두시위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후에도 시민과 학생 각계각층의 인사가 참여하는 시위들이 이어졌다.

 

시민들의 반발이 심해질수록 이에 맞서는 공권력의 대항은 더욱 거칠어졌다. 명동성당 주변에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한 닭장차와 ‘흰색 하이바’의 ‘백골단’이 진을 치고 있었다.

 

임씨는 “명동입구에서부터 롯데백화점 앞 거리에서 시위를 했는데, 구호하나 외치려고 하면 여기저기서 ‘지랄탄’ 날아오고 난리였어요. 친구 놈 하나는 백골단 피하느라 골목으로 도망치면서 남의 집 담도 넘고 했는데, 그때는 시민들과 모두 한 마음이었기에 다들 숨겨주고 챙겨주고 했었지”라고 그날을 회상했다.


민주화의 열망과 공권력 대치상태가 이어지면서 6월의 하루하루는 긴장감이 더해갔다. 

이씨는 그 때를 떠올리면서 “내가 무슨 대단한 민주화 투사는 아니지만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이루어야겠다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위에 참가한 것 같아요. 그 시절을 살던 사람들 모두 아마도 개인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관심이 일치했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평범한 시민들 중 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직장을 지켰던 이들이지만 부조리한 시대가 바로 이들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이제 20년이 흐르고


20년 전 그토록 원했던 민주주의를 누리며 살아가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6월 항쟁은 무엇일까? 현재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는 한 학생은 “6월 항쟁은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지만 넥타이부대가 시위에 참가했던 것은 시대의 자연스런 흐름인 것 같다”고 말하고 “나도 87년 넥타이 부대였다면 시위에 참가했을 것”이라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리고 한 20대 노동조합 활동가는 “6월 항쟁에 자세한 이야기는 몰라요. 하지만 4.19나 광주5.18항쟁 같이 모두 시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위해 실천했다는 것은 요즘도 필요한 자세인 것 같아요”라고 이야기한다.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87년에서 20년이 흘러 2007년.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그 시대 넥타이 부대들은 이제는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고 자식들은 이미 성인들로 성장했다. 그리고 더 이상 민주주의를 열망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찾아와 20년 전 6월의 기억도 희미해져간다.

 

 

하지만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남아있다. 현재 이씨의 자녀들은 각각 대학교 4학년과 1학년에 재학 중 이다. 그는 넥타이 부대로서 6월 항쟁의 기억을 자녀들에게 들려 준적은 없다고 이야기 한다. “학생운동도 죽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요즘 아이들에게 그 경험을 들려줄 기회가 없더라구요.”

 

하지만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요즘 세대는 비판적인 시각이 부족한 것 같다”는 게 그의 아쉬움이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은 실업난 때문인지 너무 개인적인 문제에만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문제를 개인적인 측면에서만 보지 말고 공동체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 시절 넥타이부대의 일원이었고 현재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는 한 간부는 “노동운동이 과거에는 대공장 제조업 중심이었는데 서비스 업종과 IT산업이 발전하면서 사무직 노동자들이 다시 한 번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는 날이 올 것”이라고 조심스런 기대를 나타내었다. 이를 위해서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사업장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버리고, 거대담론을 형성해 사회적 이슈와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또 다른 간부는 “87년과 현재의 시대적 상황이 많이 달라졌고, 사회가 성숙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예전과 같은 투쟁보다는 대화와 타협이 중요시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년이 흘러 다시 만난 넥타이 부대들에게 민주화를 외쳤던 기억은 자랑스러운 역사이기 보다는 당시 국민이라면 누구나 변화를 원했고 그 변화를 위해서는 거쳐야 할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은 변했고, 넥타이부대도 달라졌다. 이들에게 더 이상 민주화에 대한 뜨거운 열망은 없지만 시대를 고민하는 따뜻한 가슴만은 아직 식지 않았다. 20번째 돌아온 6월을 맞으며 우리는 지금 너무도 자연스레 향유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이제 새롭게 넥타이를 맨 이들은 그 날 그 거리의 그 넥타이부대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역사에 대한 기억은 남겨진 자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외국문화와 젊음이 넘쳐나는 지금 그 거리에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기억해야 할 역사가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