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조합원 모두의 딜레마…나눔이 사라졌다
노·사·조합원 모두의 딜레마…나눔이 사라졌다
  • 하승립 기자
  • 승인 2007.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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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유연성, 독이 든 성배인가
② 무엇이 유연성을 경직시켰나

악몽·불신·무기력·무원칙그리고 돈

“물량 앞에 장사 없다.”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조강훈 기획실장의 한 마디는 유연성을 둘러싼 노사의 고민을 함축적으로 대변한다. 원칙론적으로야 합리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하지만 ‘임금’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물량 문제를 풀기가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리해고로 대표되는 인원 줄이기식의 유연성이 아니라면 유연성 논의는 가능하다는 것이 현장 활동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예전처럼 유연성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차종에 따른 불균형을 해소하는 유연성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판매가 많은 차종, 즉 물량 자체를 이동시키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데 인원 이동은 쉽지 않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현장에서 일하는 조합원들은 자신이 일하던 곳이 아닌 다른 업무나 공장으로의 이동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일을 익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인간관계 등이 모두 달라지기 때문에 자신들이 움직이기보다는 물량이 이동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특히 근속연수가 높아지고 평균연령이 올라가면서 이같은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사 “노조가 반발하니까”

결국 사람이 아닌 물량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 또한 만만치가 않은 실정이다.


회사는 물량 이동이 쉽지 않은 이유에 대해 ‘노동조합의 반발’을 든다. 카운터 파트너인 노동조합이 있고, 이 노동조합이 동의하지 않는 물량 이동은 결국 노사간 대립과 갈등만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고 싶어도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회사의 한 관계자는 “우리도 정말 스케치는 많이 한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잘 팔리는 차종을 1공장에도 넣어보고 2공장으로 보냈다가, 때로는 해외공장에도 배치한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머리로 하는 ‘스케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스케치에 그치는 이유에 대해 “노조를 고려해야 하는데, 일단 안 될 것이라는 생각부터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조합이 반발하는 이유에 대한 분석은 다양했다. 한 관계자는 “노조가 회사의 생산과 판매 계획 자체를 신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회사에서는 차량을 출시할 때 판매 수요 예측을 내놓고 그에 따라 해당 차량의 생산을 배치하는데 이것이 예측과 다르게 진행되는 경우가 생기고, 이에 따른 생산 계획 차질이 빚어지면서 불신이 깊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판매는 경기 변동이라든지 경쟁 차종 등 주변 여건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쉽게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한 관계자는 “판매 수요 예측은 ‘신의 경지’라고 한다”면서 어려움을 토로했다. 

 

노 “조합원 설득 힘들고 회사도 못 믿겠고”

노조 집행부와 현장 활동가들은 조합원들을 설득하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꼽는다. 노조 조창민 부지부장은 “지난해 3공장의 GK(투스카니) 일부를 4공장으로 이관할 당시 3공장 사업부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당시엔 욕을 많이 먹었다”고 회고했다. 내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결정을 내렸지만 현장 정서는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조 백종세 교육위원은 “지금은 공장별 노동강도 편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이것의 극복을 통한 노동의 인간화를 위해서라도 물량 나누기가 필요한데 조합원들이 자기양보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백 교육위원은 “1공장 조합원 중에서도 ‘아산도 자기 밥그릇인데 그걸 주겠냐’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해외공장이 문제라는 시각도 있었다. 민주노동자회 김홍규 의장은 “해외공장이 계속 늘어나고 그쪽에서 생산하는 물량이 많아지면서 국내 공장의 물량 자체가 줄어들었고 이것이 만성적인 물량 문제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다른 현장조직의 활동가도 “회사의 해외공장 확대정책이 국내공장의 물량갈등을 낳고 있다”며 “해외공장의 물량을 감산하거나 동결하고 해외공장으로 갈 물량을 국내공장으로 가지고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불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무엇일까?

 

 

◈ 유연성을 얼어붙게 만든 원인들

 

아직도 떠도는 98년의 유령

벌 수 있을 때 더 벌자

 

현대자동차 노사는 모두 잊고 싶어하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는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98년 정리해고 사태가 그것이다. 당시 IMF의 광풍이 대한민국을 휩쓸었고 거기서 비껴서 있는 기업은 드물었다. 현대자동차도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아 1만2천명 정리해고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지금도 노사를 막론하고 당시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 극도로 꺼려한다. 회사의 한 관계자는 “말도 말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관계자는 “확실히 98년 이전과 이후의 작업 모럴이 확연히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 이전에는 ‘가족’의 개념이 강한 현장 분위기여서 같이 일하는 동료나 선후배들을 최대한 배려하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40대 후반의 한 조합원은 “당시에는 내 일을 하는 것과 함께 형님들도 챙기고 하는 분위기였는데, 지금 젊은 애들은 ‘같은 돈 받으면서 내가 왜 다른 사람 일을 챙기냐’는 분위기”라고 말한다.

 

시대 상황의 변화도 반영되었겠지만 이런 현상이 ‘98년 학습효과’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또다시 위기가 닥칠 경우 자신이 정리해고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을 때 벌자’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노사협력팀의 한 관계자는 “지금과 같은 역학구도에서 정리해고와 같은 인원 조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텐데도 이런 정서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실제 현대자동차는 98년의 기억을 치유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했지만 예전과 같은 조직 몰입도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노조의 리더십 부재

집행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지금 물량 문제는 노사 어느 일방이 결정하기 힘든 구조다. 인사 부서의 한 관리자는 “예전에는 경영권 문제였던 것이 지금은 사소한 부분까지 노조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단독으로 결정하는 것이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회사의 결정권 강화만을 내세우는 것은 도리어 갈등을 부추길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트너십에 기반한 해법의 모색이 필요하다.


그런데 물량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노조도 크게 손 쓸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해외공장과 국내공장 간의 물량 배치 등 큰 틀에 있어서는 노조가 단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국내공장 내에서의 물량 이동은 각 공장별로 이해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에 조정이 쉽지 않다.

 

노조 조강훈 기획실장은 “집행부 차원에서 물량 문제를 책임지고 정리하려고 했는데, 기존에 이미 제기되어 이월된 아산공장과 1공장, 3공장과 4공장 사이의 문제 등이 정리가 안 되더라”고 털어놨다. 

 

현대자동차노조는 독특한 조직구조를 갖고 있다. 워낙 덩치가 크기 때문이겠지만 9개 사업부(1공장, 2공장, 3공장, 4공장, 5공장, 엔진, 변속기, 소재생기, 통합) 대표와 6개 지역위원회(남양, 모비스, 아산, 전주, 정비, 판매) 의장을 조합원 직선으로 선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사업부 대표나 지역위원회 의장들은 해당 사업부나 지역 조합원들을 대변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이 물량 나누기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해당 조합원들의 정서에 반하는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에 더해 컨베이어 작업의 특성상 대의원의 힘이 강할 수밖에 없는데, 개별 공장 내부에서도 대의원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조율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집행부 입장에서는 특정 사업부나 지역위원회 등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안을 섣불리 나서서 해결하기 어렵다. 또 물량 문제는 관련 사업부 내에서 해결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나설 방법도 마땅찮다.


회사의 생산우선주의

일단 만들고 보자

 

자동차업체는 보통 판매 파트에서 5개년 계획을 수립한다. 신차의 연구개발 단계부터 시작한 일정에 따라 계획을 잡는 것이다. 하지만 급변하는 시장 환경을 감안할 때 5년 앞을 내다본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이런 장기 계획 외에도 연간, 월간 생산 계획을 수립하게 되고 여기에 맞춰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전체 조직이 움직인다. 자동차는 생산 및 판매 대수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기업은 생산을 최우선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분위기의 변화가 감지된다. 생산관리부 이광제 과장은 “판매가 잘 될 때는 모든 것이 생산 중심으로 돌아갔지만 지금은 수익성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존의 생산우선주의 관행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다.

 

생산 일선의 부서장으로서는 자신이 맡고 있는 곳에서의 생산목표 달성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생산계획에 맞추기 위한 무리수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판매량의 변동이나 신차 출시 등이 있을 때 UPH 협상과 M/H 협상을 진행하는데 이 기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다. 그럴 경우 출시 일정은 대외적으로 공지되어 있는 상태에서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쏘나타의 페이스 리프트(부분 변경) 모델은 12월 출시 예정이다. 그런데 현재 UPH 협상도 끝내지 못하고 있다. 11월말, 12월초로 예정된 노조 선거 일정 등을 감안할 때 아무리 빨라도 내년초에나 협상이 끝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렇게 양산 일정과 협상 일정이 엇박자를 낼 때, 혹은 협상이 지지부진할 때 협상 자체가 변질되기도 한다. 노조 조강훈 기획실장은 “관리자들이 생산계획을 맞추기 위해 뭐든 다 들어줄 듯 얘기하고, 나중에 가면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서 불신이 생긴다”고 말한다.

 

후속 모델 투입 등 지키기 힘든 약속이 남발되고, 그것이 다시 갈등의 불씨가 된다는 것이다. 회사쪽에서도 나름대로 불만을 토로했다. 한 관계자는 “협의 과정에서 생산과 관련 없는 사안, 예를 들어 고소고발을 풀라는 등의 요구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들어주는 경우가 있다”고 밝혔다.

 

무리한 생산우선주의 방침이 스스로 원칙을 허물어뜨리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결국은 임금이다

누군 더 받고, 우린 덜 받고?

 

유연성 문제가 안 풀리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역시나 임금과 직접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조합원들의 이기주의를 지적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자신의 임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상황에서 쉽게 비난하기 어려운 문제다.


자동차업체의 임금체계는 시급제를 기본으로 한다. 자신의 근무시간에 따라 임금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쉽게 볼 수 없을 만큼 크다.

 

16년의 근속연수를 가진 사람이 한 달간 잔업, 특근 없이 8/8(주간 2주, 야간 2주)로 일했을 때 받을 수 있는 통상급은 183만1047원이다. 그런데 2시간의 잔업이 포함된 10/10일 때는 249만4932원이 된다. 만약 10/10에 특근 2회에 포함되면 276만9576원이 된다.

 

울산1공장은 올 4월부터 9월까지 물량이 부족해 8/8로 근무했다. 10월 들어서야 특근 2회가 실시된 정도다. 이에 반해 아산공장은 현재 풀특근 체제다. 따라서 8/8일 때 1공장 작업자는 한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아산공장 작업자와 비교해 절반의 임금만 받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 돈도 중소 사업장이나 비정규직 등에 비하면 많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주야 맞교대 근무의 특성, 나이, 부양가족, 그간 받아온 평균 임금으로 인한 지출 규모 등을 감안할 때 비난으로 그칠 일은 아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현장 작업자들이 물량에 목을 매게 되는 것이다. “저쪽은 특근 여섯 대가리(특근 횟수를 지칭하는 현장의 표현) 하는데 우리는 왜 두 대가리 밖에 못 하냐”고 말할 경우 조합 활동가도 회사 생산관리 담당자도 할 말을 잃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 활동가들은 “임금체계의 개편 없이는 물량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