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성은 곧 인원조정’ 고정관념이 문제
‘유연성은 곧 인원조정’ 고정관념이 문제
  • 함지윤 기자
  • 승인 2007.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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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유연성, 독이 든 성배인가
③ 봉인된 단어 ‘유연성’

내부적 유연성 논의를 위한 장기적 안목 필요

최근의 한국 경제를 보면 수치와 체감 사이의 극심한 간격이 보인다. 분명 경제성장률, 주가지수 등을 비롯한 각종 수치는 한국 경제가 더 없이 잘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막상 길거리의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힘들겠다, 경기가 너무 안 좋다는 말 뿐이다.

대체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리 사회가 통계나 각종 수치를 조작해서 보여줄 만큼 폐쇄적이고 통제된 사회도 아닌데 이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분명 어딘가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양극화에서 찾는다. 전체 경제 수치는 고점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 수혜는 일부에서만 누리고, 나머지 다수가 평균치 이하에서 허덕이는 구조가 이런 불일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외부적 유연성은 수용 힘들어

어쨌든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따라붙는 얘기 중 하나는 유연성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감과는 달리 유연성 얘기만 나오면 항상 삐걱거리는 소리가 따라붙는다. 

 

여기에 유연성의 딜레마가 있다. 재계에서 말하는 유연성은 일반적으로 외부적 유연성이라는 개념이다. 해고를 좀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하거나 비정규직 사용을 자유롭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같은 유연성의 공세는 신자유주의 흐름과 함께 지속돼 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노동계에서는 유연성이라는 단어에 경기를 일으킨다. 그래서 유연성이라는 단어 자체를 봉인시켜 버렸다. 유연성에 대한 논의가 금기시되어 버린 것이다.


노동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97년 경제위기의 와중에 이미 한 차례 ‘정리해고 대란’이라 불릴만한 소용돌이를 겪었고, 또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화두가 비정규직 문제인 상황에서 외부적 유연성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외부적 유연성이 가능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한국 상황에서 해고는 곧 생계수단을 잃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더욱 강하게 반발하게 된다.


아직은 두렵게 다가오는 유연성

그러나 대공장 노사관계에 있어서의 유연성은 좀 다른 의미를 지닌다. 강력한 노동조합이 버티고 있는 대공장의 경우 정리해고를 중심으로 한 외부적 유연성의 개념이 적용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노무 담당 임원은 “솔직히 우리처럼 강력한 노동조합을 상대하면서는 단어 하나를 사용하는 것도 조심하게 되는데 고용조정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기업 경영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지 않는 한 고용조정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공장의 경우는 유연성의 개념이 내부적 유연성으로 한정된다. 총고용을 유지한 상태에서 생산 물량이나 인원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수준이다. 또 아직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기능적 유연성에 대한 논의도 포함될 수 있다.

 

이 부분은 노동조합에서도 수긍하고 있다. 한 대공장 노조 임원은 “우리도 유연성이라는 것이 정리해고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연성이라는 단어에 찍힌 ‘구조조정’ ‘고용조정’이라는 낙인은 쉽게 걷히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연성의 내용에 상관없는 거부감을 보인다. 현대자동차노조 백종세 교육위원은 “조합원들에게 유연성이란 단어 자체가 두려움으로 각인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는 수세적 논의 넘어설 때

그렇다고 유연성 자체를 언제까지고 땅에 파묻어 놓을 수는 없다. 현재 성장일로를 달리고 있는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언제 위기를 겪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위기가 닥친 후에 ‘어쩔 수 없이’ 유연성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위기가 오기 전에 노동조합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유연성 논의에 참여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현재와 같은 극도로 경직된 내부 시스템으로는 기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사례를 살펴본 현대자동차만 하더라도 내부 체질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에 많은 활동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다만 그런 얘기를 꺼낼 경우 상대 계파로부터 공격받거나 조합원들의 이해를 구하기 어려울 것을 우려해 공론화시키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사석에서는 내부적 유연성을 강화하지 않을 경우 위기를 자초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온다.

 

물론 노조 활동가들도 고민은 있다. 유연성 논의에 나서는 것 자체가 자칫 회사의 페이스에 끌려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그것이다. 또 지금처럼 노조의 힘이 강력할 경우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유연성 논의 과정에서 노조의 힘이 약화되거나 아예 무력화돼 향후에 대응할 수 없게 되는 것에 대한 걱정도 있다.

 

중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

최근 들어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주도해 나가고자 하는 움직임도 늘고 있다. 기아자동차노조 박덕제 정책2실장은 “구조조정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필요 없는 뱃살이 있으면 빼서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 뱃살은 가만히 있는다고 빠지는 게 아니다. 운동도 하고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 실장의 이 말 속에는 당연히 노동조합이 주도권을 가지고 경영 문제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또 힘을 가져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굳이 예전의 개념에 얽매여 어떤 건 논의하고 또 어떤 문제는 얘기조차 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는 자유로워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대자동차노조 조창민 부지부장도 “생산 유연성, 인원 유연성에 대한 논의는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이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어쨌든 내부 유연성을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전처럼 아예 문을 걸어 잠그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몰린 다음에 이런 논의를 하게 되면 더욱 불리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회사가 위기 상황에 놓인 상태에서 정리해고를 막아내기 위한 투쟁을 진행했던 한 노조 간부는 “노조가 중장기적인 안목이나 계획 없이 수세적인 차원에서만 유연성 등 내부 구조조정 문제에 접근한다면 다른 노조와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토로했다.

 

물론 노조의 이같은 유연성에 대한 접근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기업의 경영 마인드 변화도 필요하다. 인적 자원을 단지 비용의 차원에서만 바라보고 비용 절감이라는 접근법만 갖는다면 노조를 협의 테이블로 불러낼 수 없다.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노력은 기업만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기업의 경쟁력과 고용, 그리고 노동자의 삶의 질을 함께 만들어가기 위한 전체 구성원들의 지혜가 모아져야 할 중차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